00194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
그렇게 관아로 뛰어들자 창을 든 병사들이 사방에서 돌진했다. 난전이 된 이상 활은 이미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벽을 굼뜨게 넘었던 탓에 노달은 팔에 화살 하나를 허용해야 했다. 그게 흉성을 자극했는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나는 4층 높이로 만들어진 전각의 입구에서 쥐새끼처럼 도망갈 기회를 엿보는 채구를 발견했다. 법도를 풍차처럼 돌리며 그에 다가가자 채구는 나를 막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우리는 양떼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와 늑대들이었다.
실력과 기세에서 밀리자 뒤로 주춤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구는 어렵다고 보았는지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시간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2층 난간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일일이 쳐내며 계단을 타고 전진했고 활을 던지고 칼을 뽑아든 병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본보기로 있는 힘을 다해 병사 하나를 일도양단하자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만큼이나 상대하는 병사들은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구를 호종하는 병사들인 만큼 그들의 실력은 일반 병사보다 뛰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채구에게 대우받은 것을 게워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부나방처럼 나에게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잠재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침내 2층 난간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는 거실에 당도했다. 휑한 구조를 보니 마치 연무장을 옮겨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사망유희(死亡遊戱)의 이소룡이 된 기분이군.”
아니나 다를까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둘 다 관부 무장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낭아봉을 든 군관은 마치 장비를 떠올리게 하는 체구와 외모를 지녔고, 활과 단검을 소지한 군관은 감녕의 기도와 흡사했다.
“채구의 준비성이 대단하군. 혹시 몰라 방수(防守)들을 이렇게 두고 있었을 줄이야.”
“도적의 수괴가 감히 겁도 없이 강주 관아까지 난입하다니, 육시(戮屍)도 모자랄 중죄다!”
낭아봉을 든 장수가 소리치자 마치 벽력이 치는 것 같았다.
‘벽력화(霹靂火) 진명(秦明)인가? 그럼 활과 단검을 든 자는…….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
만약 내가 생각하는 둘이 맞는다면 참으로 강적들의 출현이었다. 진명은 양산박 기병을 이끄는 다섯 장수 중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고, 소이광 화영은 주동보다도 뛰어난 궁술의 달인일 뿐 아니라 단검을 이용한 근접 전투에도 강했다.
‘그러나 그 강함은 어디까지나 수호전의 기준일뿐…….’
양산박 군웅 중 무예 실력이 차원이 다른 노준의만 빼면 내게는 다 고만고만한 실력이었다. 나는 이미 양산박 군웅 수십 명을 만났고 그들과 겨뤘다. 임충, 관승, 동평 같은 이들이 눈앞의 두 명보다 못하다는 기록은 없었다.
동평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꽤 재미난 결투가 벌어졌겠지만, 그는 중간에 가벼운 병에 걸려 무하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막 자기소개를 하려던 진명을 무시하고 나는 곧장 화영에게 다가갔다. 불시에 공격을 시작하자 둘은 당황하며 흩어졌다. 벽력화 진명은 기습이 무척 기분 나빴는지 예의 벽력같은 소리로 외쳤다.
“도적의 수괴라 어쩔 수 없구나! 오냐, 네놈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본래부터 가만히 있으려던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너무나 상투적인 대사를 들으며 나는 화영을 따라잡았다. 화영의 놀라운 궁술실력만큼은 귀찮았기 때문이다.
화영은 내가 계속 따라붙자 짜증이 나는지 단검을 뽑아들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도 수법은 내게는 어린 아이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느냐!”
벽력화 진명이 구리 못이 촘촘히 박힌 묵직한 낭아봉을 수수깡 다루듯이 휘두르며 내 배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던 나는 주먹을 뒤로 젖혀 그의 안면을 쳤다.
“컥!”
일순의 빈틈을 노려 안면에 주먹이 정확하게 적중하자 진명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보통 진명의 생김새만 보면 기병 오호장 중 가장 강할 것 같지만, 종종 적에게 잡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용맹하지만 워낙 성격이 급해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 사이 내가 휘두른 법도가 화영을 스쳤다. 화영은 가까스로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곧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활줄이 끊어지면서 등에 메고 있던 활이 바닥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활이 없는 화영은 진명보다도 약하다. 나는 그가 악착같이 휘두르는 단검을 가볍게 피하며 가슴팍을 발로 찼다. 그가 뒤로 구르는 사이 나는 진명의 머리칼을 낚아채고 그대로 기둥을 향해 달렸다.
진명의 머리가 기둥과 부딪치자 전각이 일시에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생겼다. 그리고 진명은 기절했다.
나는 다시 번개같이 움직여 자세를 잡으려던 화영의 발을 밟아 움직임을 늦추고 주먹을 안면에 박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화영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실내는 오로지 규칙적인 내 숨소리만이 들렸다.
만약 실내가 아니라 야외에서 싸웠다면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수 없었겠지만 제약된 공간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제약된 공간일수록 실력 차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때 4층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박수 소리의 주인공은 천천히 3층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0년 전보다 실력이 늘었군. 둘을 이렇게 빨리 제압할 줄이야.”
“호연작……. 자네까지 이곳에 왔군.”
그의 등에는 원형 금속이 띠를 이루는 형태의 채찍 두 개가 엑스자 형태로 교차하여 메여 있었다. 전에 그가 썼던 편술이 진짜 채찍이었다면 마치 쌍절곤의 이음새를 보는 듯한 사슬 형태의 막대였다. 묵직한 만큼 위력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예전엔 한 마리의 야생 늑대를 보는 것 같았는데, 강산이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흐른 탓일까? 이제는 정기를 품은 호랑이가 되었군.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10년을 고련 한 내 쌍편이 쟁쟁한 강자들을 숱하게 꺾은 준경 너에게 통할 수 있을지.”
“나를 만나기 위해 자청했단 말인가?”
“이기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쾌검의 달인은 발도술이 사람 눈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호연작은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쌍편을 풀어내더니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쇠사슬에 손잡이가 달린 형태의 편이 한번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나무 바닥은 여지없이 깨졌다. 법도로 쇠사슬에 부딪혀가자 호연작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살아 있는 생물 마냥 쇠사슬이 법도를 칭칭 감았다.
호연작의 손목이 다시 움직이자 법도는 내 손을 떠나 실내 가장자리로 떨어졌다.
“맨몸으로 무쇠 쌍편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네. 닿는 즉시 뼈를 으스러트리거든.”
“그래? 그럼 확인해보면 되겠군.”
법도를 잡고 버틸 수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탁과 겨룬 이후 무기의 이점을 가지고 싸우는 경지는 이미 벗어났다. 그러나 노준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직 그 경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노준의는 죽봉을 제 몸처럼 다루며 천하제일에 올랐다.
무쇠 편은 내가 접근할 경로를 모두 막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그것이 칼과 다른 점일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과 긴 사거리를 통해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해낸다는 것.
그러나 단점도 있다.
“사슬의 중간 부분을 잡으면 힘을 쓰기 어렵지.”
재빨리 무쇠 편의 중간 부분을 낚아채며 나는 빠르게 근접했다. 그러나 무쇠 편은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무쇠 편의 추가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으합!”
나는 있는 힘껏 기합을 넣으며 복부에 힘을 주었다.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이미 그쯤은 예상 범위에 넣었다.
회심의 일격에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쓰러지지 않고 주먹을 뒤로 젖히기 시작하자 호연작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컥!”
주먹이 호연작의 복부를 올려치자 육중한 신체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이내 떨어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하얀 타액이 흘러나왔다.
“여……. 역시!”
호연작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가운데 눈빛만큼은 담담한 기운이 감돌았다.
“죽어라!”
그 사이 정신을 차린 벽력화 진명이 낭아곤을 치켜들고 배후에서 돌진해왔다. 나는 진명의 무릎을 노려, 하단 차기를 시도했다. 그러자 마치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쓰러졌다.
화영도 때마침 정신이 돌아왔는지 단검을 들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이만하면 되었다!”
호연작은 겨우 복부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는지 허리를 펴며 손을 내저었다. 앞으로 넘어져 코가 깨진 진명이 겨우 일어났는데 코피가 났는지 안면이 피범벅인 상태에서 호연작의 중지 명령을 듣고 엉거주춤한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동파 선생께서 임종을 며칠 남겨두고 이런 말을 남겼었지. 실현되지 않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문치주의를 택하여 이념을 강화한 송이 바로 그러하다고 하셨지. 나는 솔직히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포면 대인에게서 설명을 들었지.”
호연작은 손가락으로 4층을 가리켰다.
“올라가게. 채구가 저곳에 있네.”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채구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나는 즉시 4층으로 올라갔다.
채구는 나를 보자마자 덜덜 떨고 있었다. 아마도 순천 전투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호연작, 진명, 화영, 이 배신자들! 내가 너희에게 쏟아 부은 돈이 얼만지 아느냐! 왕연 장군이 도착하기만 하면 대역죄로 다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준경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송의 재상을 아버지로 둔 몸이다!”
악몽이 지나치니 악이 바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채구의 멱살을 잡고 전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호연작과 진명, 화영이 뒤따랐다.
전각을 나갔을 때는 난전도 마무리되던 상태였다. 관아 밖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니 많은 백성이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관군은 채구가 사로잡힌 것을 보자 사기가 떨어져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내가 크게 외치자 이규와 여방이 관아의 빗장을 풀고 활짝 젖혔다. 예상대로 많은 백성이 사대강 패거리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채구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잡혀 있는 것을 보자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채구를 호연작에게 넘겼다. 호연작은 얼떨결에 채구의 목덜미를 쥐고는 이게 무슨 뜻이냐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종!”
“여기 있습니다!”
“포면 대인의 옥사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저만 따라 오십시오.”
호연작은 그제야 알았다는 눈빛으로 채구의 목덜미에 힘을 주었다. 채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호연작에게 풀어달라고 애원했지만 호연작은 흔들리지 않았다.
옥사에는 많은 사람이 수용되어 있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그제야 나는 포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왔구나.”
포면은 투옥 동안 상당히 야위었다. 그러나 형형한 안광과 정기는 잃지 않았다. 대종이 재빨리 옥사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뒤지는 사이 나는 철문의 빈틈에 양손을 밀어 넣어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죄인을 가두는 옥사가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모든 힘을 다했다.
“사람이 아니다!”
대종을 비롯해 다른 곳에 갇혀 있던 죄인들은 내가 지금 벌이고 있는 행동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경악성을 금치 못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할 수 있을까 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엿가락처럼 철문이 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입술에 짠맛이 느껴졌다. 이마에 생긴 땀이 이슬처럼 굴러떨어진 것이다.
“야아압!”
기합성이 더해지자 철문이 휘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휘어지자 나는 손을 뗐다. 그제야 손바닥에 고통이 밀려들었다. 손바닥은 용해되는 철판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포면은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그 손을 잡았다.
“이 손이야말로 송이 깨치지 못한 주득성이(做得成耳)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포면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뒷짐을 지고 옥사를 빠져나갔다. 나로서는 그저 포면의 뒤를 쫓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 수감 생활 탓에 볕에 닿은 포면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 채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백성 중에는 포면을 보며 가벼운 탄성을 지르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송을 개국하고 태조(조광윤)께서 송의 이념에 대해 많은 학자와 고민했다. 하(夏), 은(殷), 주(周)의 도의(道義)와 왕도(王道)를 따르느냐, 아니면 한(漢), 민(民), 당(唐)의 복리(福利)와 패도(覇道, 질서)를 따르느냐. 오랜 전쟁에 지친 많은 학자가 건의하길 당연히 도의와 왕도를 따르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송의 이념이 고결하기를 원했고 고결함에 걸맞은 현실 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나왔다. 이상적이고 순수한 이념이 강할수록 살기 위해 저지르는 현실적인 부정(不正)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더욱 큰 악(惡)을 불렀다.”
포면은 지그시 채구를 바라보았다. 채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