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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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더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려 했지만, 여기가 마지막 장인 것을 깨닫고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아이답지 않은 한숨에 뉴스를 보던 아버지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소설보다 만화가 더 재미있네요. 다음 권은 다음 달이나 나올 텐데 어떻게 기다리죠.”
아버지는 아이의 투정에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척준경의 야사는 워낙 다양해서 여러 소설에서 그려졌지만, 어린이를 위한 만화는 아이가 본 만화책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끔 역사적 고증보다는 서유기 같은 환상적인 모험담에 초점을 두고 있어 어른인 자신이 읽어도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정말 호랑이 똥이 효과가 있어요?”
“그렇다는구나. 동물원 측이 멧돼지 농가들을 돕기 위해 호랑이 배설물을 제공했다고 하는 뉴스가 있었는데 한동안 효과를 봤다고 하니까 맞겠지.”
“한동안이면 계속 쓸 수는 없나 봐요?”
“돼지들은 보기와는 달리 지능이 높아. 처음엔 조심해도 나중에는 위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하지.”
“그럼 여기 적힌 도술도 진짜 가능한 건가요? 엄청 대단한 도사라고 하는데 정작 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천둥이나 돌개 바람 같은 기상이변을 일으키기라도 기대했던 것일까? 아이의 귀여운 푸념에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도술이란 것이 지금도 있는지는 아빠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구나. 그날 강주성을 척준경이 점령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 말이다. 전에 네가 읽었던 공명전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 않았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했는데 제갈공명이 주문을 외워 하늘에서 비를 내렸다는 이야기 말이야. 당시 형주에 머물던 초나라의 총사 이준경은 제갈공명의 능력에 감탄하여 훗날 극진한 예로 맞아들이게 되지.”
후한 말의 혼란기를 다룬 소설, 만화는 예전부터 인기가 많았다. 자신도 한때 푹 빠져 그 시대 역사를 달달 외우곤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한 차례 열변이 토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어려운 말이 연이어 나와서인지 금세 흥미를 읽고 일어섰다.
“그냥 검신 척준경이나 다시 읽을래요.”
아이는 그러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척준경이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일거에 백 명을 쓰러트렸다는 다소 신화 같은 이야기가 가미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어렸을 적에는 황당하더라도 호쾌한 내용이 좋았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진실한 역사 속 내용을 두고 소주 한 잔을 걸치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올 것이다. 아직은 그저 먼 미래의 희망 사항이었지만 아버지는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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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시도 끝에 제방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괸 돌이 빠진 곳은 다른 곳을 돕기 위해 달라붙었고, 그렇게 한 식경이 지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제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 강주성으로 가자!”
이로써 기병은 강주성으로 바로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택할 방법은 오직 하나 우회였다. 그러나 우회 길목에는 고슴도치처럼 잔뜩 성을 내고 있는 요시치카와 도사 공손승이 기다리고 있다.
마케도니아 방진에 고려의 기병 방어법을 그대로 흉내 낸 인간 요새는 기동성을 아예 없앤 대신 기병에게는 그야말로 천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원거리에서 화살을 퍼붓거나 중기병을 사슬로 연결해 일거에 전열을 무너트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다.
내가 배를 탄 것을 알고 제방까지 무너트린 것을 알면 과연 고슴도치를 상대로 싸움을 걸까? 게다가 그냥 고슴도치도 아니고 한 차례 오욕을 줬던 모산의 도사가 포함되어 있다. 고슴도치를 피하기 위해서는 더 남쪽으로 우회해야만 한다. 그럼 왕연이 지휘하는 본대와 길이 엇갈리게 된다. 모든 것이 다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진정한 싸움은 강주성을 얻고 모든 부민(府民)이 보는 앞에서 판가름을 내도 늦지 않은 것이다.
강주성을 향해 300척의 배가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송강과 대종을 구하기 위해 양산박의 군웅이 강주성으로 집결했다. 참수당하기 직전 그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서 송강과 대종을 구해냈지. 그런데 이제는 내가 포청천의 조카, 포면 대인을 구하기 위해 나서게 되는구나.’
그러나 소설과 다른 점은 나는 대놓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마침내 강주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주성의 포구는 경계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일단의 기병이 나를 치기 위해 달려나간 것을 알고 있을 터 그 사이를 노려 급습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둘, 작은 배들 먼저 포구에 닿아 속속 뭍에 내리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병장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모병제의 약점이다. 특히나 이들은 중앙군인 금군이 아니라 지역민으로 이루어진 향군이었다.
금군도 문제가 많은데 향군은 이미 여러 차례 겪은 것처럼 당나라 군대보다도 더 군기가 없는 집단이었다. 이길 때는 몰라도 불리하다고 여기면 자신의 목숨이 우선이라 여기고 그대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다.
조광윤이 송을 건국할 때까지만 해도 모병제는 현대의 군무원이나 하사관과 비슷했다. 일정한 기준을 넘어야 선발되었지만 서하, 대리, 요나라 같은 적들이 송을 압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비를 위해 병사 숫자를 늘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어느 순간 입대 기준이 유명무실해졌다. 그나마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금군의 2/3는 아예 도성 방어만 신경을 쓰도록 했고 전방의 위험에는 나 몰라라 했다.
나는 아주 편안하게 뱃전에서 뭍으로 올라왔다.
‘1만 기병도 그야말로 짜내고 짜내서 만든 전력일터, 송의 멸망이 더욱 가속화될지도…….’
한세충이 서하를 참패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귀중한 기병 전력이 역사가 바뀌어 나를 상대하고 있다. 본래 기병 자원은 하북에 몰려 있는데 연운 16주(북경 일대)를 상실하면서 말을 수급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장점도 없지는 않았다. 성벽에 의지한 수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화약 무기나 활 개량에 신경을 쏟기 시작하여 상당한 발전을 이뤄냈다.
강주성 역시 중요한 요지답게 그런 기술의 도움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포구를 통한 입성 외에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않았다.
척준경이 보통 석성을 점령한 기록을 보면 사다리를 놓고 그걸 단숨에 뛰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 높고 방비가 튼튼한 성이라면 아무래도 어렵다는 뜻이었다. 강주성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정공법으로는 큰 피해가 예상되는 곳이다.
그들은 내가 남호촌을 결전장으로 예정했을 때, 제방 길과 서가산에서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을지 고민했겠지만 나는 역으로 그들의 의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기를 바란 것이다.
사실 전쟁에서 가장 어이없게 지는 경우를 보면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믿는 상황에서 뒤통수를 맞는 경우이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보다 훨씬 유리했던 국민당이 패한 이유는 국민당의 군벌들이 전력 차가 많이 나는 공산당의 처리는 이미 끝난 것으로 보고 장제스와 권력 싸움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멸망도 따지고 보면 귀족들이 의자왕에게 병력을 내놓지 않으면서 자초한 결과였다. 중앙군 5천으로 싸워 멸망한 백제가 부흥 운동 과정에서 수만의 병사가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원인인 만치케르트 전투도 그러하고 안녹산의 난이 전국적으로 커진 것도 같은 이유다.
강주 관아로 향하는 함성이 점차 커졌다.
그러다 강주성에서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네거리 어귀에 이르니 수많은 인파가 놀라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담에 숨어 우리를 살피는 자들도 있었다.
아침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자 하나의 단이 보였고, 그 위에 산발한 인물 하나가 포승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종, 그대로군.”
나는 단으로 올라가 대종의 포승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옆에 박혀 있는 명패를 읽었다.
-죄수, 대종은 죄인 포면을 위해 사사로이 소식을 전하고 역모 죄인 준경과 내통하여 모반하려 했으므로 법에 따라 목을 벤다. 강주부윤 채구.
“하하하!”
나는 크게 웃었다.
몇 글자만 바꾸면 수호전에서 송강과 대종의 처형식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명패를 읽는 사이 거지들과 소금 상인들이 나타나 혼란을 일으킨다.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묶였던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손목을 매만지며 일어서는 대종이었다. 아마도 그가 포면에게 신경 써주는 것을 누군가 채구에게 고변(告變)한 모양이었다. 채구는 민심을 공포로 누르기 위해 기꺼이 대종을 희생양으로 삼았을 것이다.
나는 망나니가 황급히 떨어트리고 간 법도(法刀)를 집어 들었다. 처형 전에 정갈하게 닦았는지 예기가 번들거렸다.
“채구를 죽이기에는 딱 좋은 칼이로군.”
전투로 죽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건 처형식이었다.
대종은 내 중얼거림을 듣더니 기운이 회복이라도 되었는지 한참을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는 와중에 늦게 배에서 내려 도착한 이규가 대종을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대종의 산발한 머리와 처형식 준비를 보고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상황 파악이 되었던 것이다.
“계양진 패거리는 성문을 점거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이준을 필두로 수백 명의 인원이 우르르 성문 쪽으로 향했다. 강주 관아 다음으로 성문이 가장 위험했기에 나름 가장 강한 패거리를 선택했다. 장순, 장횡, 목춘, 목홍, 이립, 동위, 동맹이 따르는 어부들과 소금 상인들을 이끌고 몰려가는 모습은 마치 이몽학의 난을 지켜봤다면 이런 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안석, 매괴, 백서는 각자 세 방향으로 흩어져 겁에 질린 부민을 설득하여 관아로 모이도록 하게. 오늘 채구의 제삿날이라고 설명하게.”
“이번에도 싸우지 못하는 겁니까?”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한 매괴가 철봉으로 애꿎은 땅만 찍었다. 그러나 내 명령은 번복되지 않았고 어깨가 축 늘어져서 맡은 방향으로 흩어졌다.
나는 남은 군웅을 이끌고 대로를 활보하며 관아로 향했다.
그러나 관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전각 지붕이란 지붕 위에는 모조리 궁수가 올라가 있었다. 담이라도 넘는다면 벌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사히 담을 넘더라도 창을 움켜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갖 무서운 함정을 팠다고 해도 성이 아니라 전각 형태의 관아였다.
“석보, 장청, 이규, 여방, 무송, 노달!”
이름을 호명하자 번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알량한 주술 빼고는 실력은 가장 떨어지는 번서였기에 택한 선택이었다.
“이제부터 전공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내가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
다들 눈빛이 바뀌었다. 그러나 번서는 울상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리 가랑이라도 붙잡고 출전을 요청해야 하나 그런 눈빛이었다.
“내가 먼저 가겠다. ……번서!”
번서가 혹시나 자신도 나가도 되나 싶어 잡고 있던 봉을 연방 휘두르며 과시했다.
“엎드려.”
“네?”
“담장을 넘으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춰 번서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힘이 있었다면 나를 한 대 치고 싶었겠지만, 그는 목숨이 아까운 줄 아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이내 넙죽 엎드렸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도약 거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곧 뛰기 시작했다.
“나보다 적게 잡는 놈은 번서에게 소원 기회를 준다!”
준다는 말이 나올 때쯤 나는 번서의 등을 힘껏 밟고 담을 향해 날아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화살이 전혀 두렵지 않은지 저마다 번서를 밟고 뛰기 시작했다.
“앗! 그건 안될 말입니다!”
나만 뛰면 될 것으로 알았던 번서는 이규가 등을 밟자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더니 마지막으로 노지심이 등을 밟고 간신히 담에 매달렸을 때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아마 꿈속에서 그는 내가 이기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