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1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문준 대사가 다녀간 뒤, 며칠 간은 아무 일 없이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사대강 패거리들은 강주의 동향을 파악하고 수하들을 모두 불러들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의도치 않게 새롭게 합류한 이들이 있었다.
여방과 무송, 노지심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런데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자들이 저마다 몰려와 내 수하로 들기를 청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들이 제 발로 내 밑으로 들어온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 기회에 인근 수적과 산적의 뿌리를 뽑겠다…….’
그건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일일이 상대해야 할 적들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일망타진하겠다는 생각을 한세충이라면 충분히 가졌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시대 유일하게 만인적의 칭호를 사서에 남긴 인물이었으니까.
그렇게 속속 모여드는 인원이 어느덧 일 천명을 넘었다. 사대강 패거리는 2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어선까지 모두 징발하여 300척이 넘는 배를 운집시켰고 한세충에게 쫓기다시피 도망쳐온 파양호 일대의 산적들은 저마다 칼을 갈고 공격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한세충이 반드시 정면 승부를 걸어오리라 생각했다. 한세충이 이름을 날렸던 전투들은 하나같이 정면 승부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작 8천명의 인원으로 금나라 병사 10만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승리한 것은 그중 백미라 할 수 있다.
나는 파양호 일대 지리에 능한 자들을 모두 불러 상세한 지도를 완성했다. 우리가 강주로 진입하기 전에 한 번 정도의 접전은 불가피할 것 같아 최대한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나는 역사적인 사례를 우리가 가야 할 경로와 비교하며 머리를 짜냈다. 그러나 수군과 육군을 병용하거나 혹은 수군, 육군 단독으로 한세충을 상대할 방법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한세충을 여포와 동급으로 놓고 전술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잘 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술 한잔을 기울였고 몇몇 사람이 그 자리에 동참했다. 그중 한 사람인 무하의 안석이 지도에 그린 예상 행로를 힐끔 보면서 내게 말했다.
“어째 제방 길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더 자세히 말해볼 것을 명하자 간강의 매괴가 새치기하듯 끼어들며 잽싸게 말했다.
“파양호는 홍수가 제법 일어나는 곳입니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곳곳에 제방이 설치되어 있지요. 오랜 세월 제방을 쌓다 보니 마치 다리를 놓은 것처럼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곳 지리에 능숙한 자라면 제방 길을 모두 꿰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방 중에는 물에 잠긴 곳도 있습니다. 버려진 경우지요. 수위가 낮을 때는 배가 걸리는 일도 있어서 경험 많은 어부들은 위치를 미리 숙지해놓습니다.”
장마철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수위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제방에서 왠지 비슷한 전투가 생각났다. 그것도 한세충이 본인이 직접 지휘하여 대승한 전투였다.
‘황천탕(黃天蕩)!’
하북을 석권하며 기세등등하던 금군이 장강을 넘기 위해 10만의 병사를 동원하자 한세충은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다. 금군은 장강을 건너기 위해 수전(水戰)과 상륙전을 동시에 계획했는데 한세충의 용맹과 적절한 지휘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세충이 원했던 장소로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곳이 황천탕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호리병 지형의 어촌으로 한세충은 수군을 동원해 입구를 봉쇄했다. 금군은 육지로 우회하고자 했지만, 송군의 요새를 숱하게 거쳐야 장강 이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야말로 꼬인 지형이어서 육상 탈출은 시도도 못 했다.
그 사이 악비까지 가세하자 살아서 장강을 넘어간 자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제방 길로만 통할 수 있는 어촌에서 결전을 벌인다면!’
1만의 송 기병이 수전을 택할 리 만무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그들을 적절한 장소로 끌어들인 후 제방을 무너트리면 그들은 돌아갈 길을 잃게 된다.
자신의 말을 가로챘다며 매괴와 드잡이질이라도 벌일 기세의 안석에게 나는 그런 적절한 마을이 있는지 물었다. 기병들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제법 넓은 평지여야 했고 제방 길로만 진입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 곳은 남호촌(南湖村)밖에 없습니다.”
인근 지리에 밝다는 산적들까지 가세하여 이구동성이었다. 나는 지도에서 남호촌의 위치를 표시하고 제방 길을 그려 강주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너무 멀어도 적이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주에서 대략 100리 정도였다. 40km 정도의 거리라면 기병으로 한달음에 올 수 있었다. 그 사이 남호촌에 대해 서로 아는 대로 고하기 시작했다.
“남호촌은 제방 길을 두 곳이나 거쳐야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제방 길을 이용하지 않고 올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서가산(徐家山)을 지나야 합니다.”
서가산의 산적 출신도 다수 있었기에 더 자세한 상황을 들었다. 서가산은 이 동네에서는 교통의 요지로 꼽히는 곳으로 강주에서 경덕진으로 가기 위해 필수로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제법 큰 채석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적을 남호촌으로 끌어들이면 제방 길 하나만 끊어도 적은 서가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기병들의 발목을 묶고 나는 유유히 강주로 향한다……. 나쁘지 않은 전술이었다. 아니 더 생각해보다 보니 생각의 가지가 계속 확장되었다.
그날의 술자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계획을 다듬으며 역할 분담을 했다.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신속하게 움직이던 내가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각자 맡은 역할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강주에서 사람이 왔다.
“으허헝, 형님!”
그 사람을 보자마자 이규가 달려와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산만한 사내가 그보다 왜소한 사내를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우는 장면은 한 편의 희극이었다.
“그대가 대종(戴宗)인가?”
전서(傳書)를 넘겨주기도 전에 나는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규가 형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오직 강주의 원장(院長), 신행태보 대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호남 일대는 절급(節級, 군 관련 사무를 보는 하급 관리)을 원장이라고 칭했다. 대종을 간혹 대원장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씨 성을 가진 원장이란 뜻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먼저 말하자 잠깐 흠칫하기도 했지만 이규가 말했으리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전서를 꺼냈다.
그사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종을 보며 아는 체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뇌물을 주는 것이 관습처럼 여겨지던 시대라 그럴 것이다.
한세충이 보낸 전서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으니 한판 붙자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는지 우리와 동수를 맞춰 주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다 읽은 전서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자 놀라는 대종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떠한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포면 대인을 구하려고 나선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장군은 역도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도지요. 많은 사람이 포면 대인을 끌어들여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장군 휘하에 수적과 산적들이 죄다 모인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한세충이 나를 잡기에 앞서 인근 수적과 산적들을 들쑤신 것은 일망타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여론몰이를 위한 작업도 있었을 것이다. 민심의 향방이 승부를 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단 칼에 베어버린 범죄자들도 있었다. 민심을 위해 지금 내 밑에 모인 자들을 쫓아버리고 죽여버리는 것도 생각해봤었다. 그러다 문득 손오공이 떠올랐다. 악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인자(仁者)가 아니라 무자비한 강자(强者)였고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악인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모습은 백성에게 있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언제인가만 남았을 뿐이다.
“애송이에게 전하게. 이틀 뒤, 남호촌으로 오라고.”
“남호촌?”
대종 역시 이곳이 고향인지라 잘 아는 듯했다. 나는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남호촌으로 오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더군. 배를 타고 오거나 두 곳의 제방 길을 거치거나. 제방 길로 온다면 우리는 제방을 붕괴시켜 돌아갈 길을 막을 걸세. 그러면 서가산으로 가는 길만 남겠지. 그곳에서 기병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내가 애써 세운 방략(方略)을 털어놓자 주변인들이 깜짝 놀라며 팔짝 뛰었다. 그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한세충은 그 이야기를 듣고 반드시 남호촌으로 오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진 자였다.
대종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중요한 사실을 말했을까 하는 의문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건으로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자 고개를 절래 흔들며 말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의동생을 돌려달라고 할 참인가?”
“그렇습니다. 아우만 돌려주신다면 장군이 원하는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
“포면 대인을 빼돌릴 수 있습니다.”
한세충의 전서를 전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애초부터 이런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듯싶었다. 포면을 빼돌린다는 것은 역도의 무리에 가담했다는 사실과 다를 바가 없다. 즉,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위험함을 감수하며 자신을 구하겠다는 대종의 말에 이규는 다시 대종을 껴안았다.
“포면 대인이 원하지 않을 걸세.”
“그걸 장군이 어찌 아십니까?”
내가 아는 포면은 왕에 대한 충성보다 백성을 위하는 자였다. 그것은 숙부인 포청천도 마찬가지였다. 맹자가 역성혁명을 외쳤던 것은 왕이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왕에서 물러나야 하고 마땅히 배운 자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주자가 성리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모자랐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성계나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을 구호로 삼아 조선을 일으켰지만, 조선을 세운 뒤에는 왕조의 지속성을 우선하는 이론을 찾아야 했고 성리학은 그 뼈대가 되었다.
“내가 아는 그분은 내가 직접 옥사의 문을 깨주길 기다리고 계실 분이네.”
“정녕 포면 대인과 안면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대종의 목소리가 떨렸다.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포면 대인을 존경하여 일찍이 도주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사실 제게는 기이한 재주가 있어 포면 대인 한 분쯤은 얼마든지 안전한 곳으로 모실 수 있어서 드린 제안이었는데 말입니다. 장군이 복건을 장악하고 채구에게 씻을 수 없는 망신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드렸을 때 껄껄 웃으며 ‘과연 동파와 적설이 인정한 사람답군.’이라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었지요. 그것이 사실일까 싶었는데 장군의 말을 듣고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기이한 재주란 적토마에 비견된다는 발놀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도술의 도움을 받아서인데 갑마(甲馬)라는 부적을 다리에 붙이면 발동된다. 1장으로 하루 300리를 달리고, 2장을 붙이면 500리를 달리며, 4장을 붙이면 800리까지 간다는 그야말로 신통방통한 축지법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축지법의 달인 마령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면서 더욱 실력이 올라 나중에는 하루에 일천 리 달리는 믿기지 않는 실력을 뽐내게 된다.
그래도 놀랍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공손승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호전에서 공손승의 술법은 가히 신선의 경지다.
“의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좋다. 그래서 하나는 약속하지. 내가 포면 대인을 구할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기꺼이 풀어 주도록 하지.”
“장군의 뜻이 그리 확고하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럼 저 역시 아우의 생존을 위해 장군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혹여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저 내가 한 말을 애송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 더하자면 포면 대인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안부를 전해다오.”
너무나 약소한 부탁이라고 생각했을까? 대종은 가벼운 한숨을 남기고 떠나갔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세충이 내 전언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기대되었다. 우리는 흔히 만인적 하면 관우나 장비를 떠올리지만, 국어사전에서는 만인적의 뜻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혼자서 많은 적과 대항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고, 둘째는 군사를 쓰는 전술이 뛰어난 사람이다. 한세충이나 악비 같은 이들은 둘 다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역사 속의 척준경은 차라리 관우나 장비 같은 과라고 볼 수 있다. 동북 9성에서의 성과를 보더라도 그가 전술 병기는 될 수 있어도 전략적으로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척준경은 바로 나였다.
나는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누가 진짜 만인적인가?”
그것을 판가름하는 자리가 왔다. 전력으로는 불리하지만 나에게 유리한 점도 있었다. 그건 한세충이 아직 약관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예는 완성되었을지 몰라도 경험이란 측면에서는 내가 더 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천재는 나이를 가리지 않으므로 방심은 금물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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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연재가 늦어 죄송합니다. 몸이 좀 아팠습니다.
오늘 설명에 대한 지도를 설정란에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