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8 (24) 연징취영(淵澄取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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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이게 말이 돼요?”
책장을 넘기던 중학생 소년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던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질문이 반가웠는지 얼른 손자가 가리키는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벌써 여기까지 읽었구나. 등룡전(騰龍傳)은 여기서부터가 재미있어진단다.”
“칼질로 수십 명 쓰러트리고 수천 명 돌파하는 것까지는 전선 열 척으로 수백 척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부적을 써서 도술을 부리고, 축지법을 쓴다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하잖아요.”
안경을 치켜세우며 제법 진지하게 따져 묻는 손자의 태도가 할아버지는 귀엽게만 보였다.
“예전에는 용과 봉황이 존재했다고 믿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멸종에서 살아남은 공룡의 후예들일 수도 있겠고……. 역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지식을 선사했지만 잃어버린 지식 또한 분명히 존재한단다. 물론 나 역시 도술을 쓴다는 것은 소설적 과장이라고 생각한단다. 의아한 것은 소설답지 않은 사실성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도 충분히 인정받는 등룡전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바로 도술과 기인의 존재라는 것이지. 소설적 장치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것을 넣어야 했던 이유가 존재했을까? 사실이라서 넣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의심쩍고 말이다. 애초에 척준경 같은 이가 등장한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긴 하다만……. 아, 그것보다 다음 권에서 도술보다 더 신기한 것도 보게 되겠구나. 이선이 등장…….”
“할아버지! 아직 보지 않은 내용은 말하지 마세요!”
손자가 빽 하고 소리를 치자 할아버지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주제를 놓고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뒷이야기를 늘어놓을 뻔했던 것이다.
손자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스마트폰을 들고 이리저리 검색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가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이것 보세요.”
“뭐가 말이냐?”
“등룡전으로 검색해보니까 새녘당의 이준경 의원 발언이 가장 최신으로 나오네요.”
“이준경 의원?”
할아버지가 이준경 의원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잘 아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그가 오늘 열린 모 대학 강연에서 등룡전에 빗댄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즉시 그 기사를 정독했다.
“송사(宋史)에도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척준경은 동료 20인과 함께 중원을 횡행했다. 관군 수만이 감히 대항하지 못할 정도로 재주가 대단히 뛰어났다. (拓俊京以二十人橫行齊魏, 官軍數萬, 無敢抗者, 其才必過人.)를 인용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새녘당 역시 우연한 일치로 20인이라며 뿌리 깊은 정치 불신을 일소하여 신뢰받는 투명한 정치를 국민께 약속드린다고 언급했다. 이에 여당의 모 인사는 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쿠데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에잇, 무슨 말 만하면 꼬투리일세.”
할아버지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었기에 소년은 책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동양 문학 중 하나를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방학 숙제만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읽어보니 뜻밖에 재미있지 않은가? 나중에 시간이 나면 대민국의 건국을 다룬 전국지(全國志)도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희한하긴 하네. 다들 이름이 준경이야.’
소년은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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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리를 가도록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산길이 이어졌다. 증 가주가 앙심을 품고 더 사람을 끌고 오려나 싶었지만, 그 정도 배포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행보 자체는 조용하지 않았다.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일행 중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공손승에게 호표를 받은 번서와 이규였다.
험상궂은 장한 둘이 눈물을 짜며 힘겹게 걷는 것이 가관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닌지라 처음엔 두고 보고만 있었지만, 곡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참다 못하고 요시치카와 이준이 동시에 나섰다.
뒤통수도 때려보고 어르고 달래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수를 썼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자 공손승이 나섰다.
“호표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표식이다. 그러나 그냥 호랑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영물이 호랑이고, 청동군이 악인들에게 위엄과 용맹을 보이기 위해 내려보내는 동물이 호랑이다. 호표가 너희를 인정한다면 자연히 구속은 사라질 것인즉 항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윗사람의 명을 잘 따르도록 하여라.”
“노예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릴 요량이시라면 기한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규의 본성대로였다면 습관처럼 욕이 먼저 나왔겠지만, 고통을 겪고 나니 제법 온순해져 있었다. 머뭇거리며 묻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선함의 기한을 어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에라도 깨달음을 얻어 등선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사람이거늘. 그러나 굳이 그 기한을 들어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남협의 의중에 달렸을 것이다.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도력을 쓸 때는 오직 수많은 인명을 구하는 경우다.”
“우리 둘에게 잔인한 제약을 베풀어 놓고 무슨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차라리 모두 호표를 쓰셨으면 억울함도 덜 하겠습니다.”
번서는 재수 없게 걸렸다는 푸념으로 가득했다. 공손승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너희는 다 죽었다. 애꿎은 증가의 사병들도 말이다. 지금 남협을 따라나선 이들조차 너희가 만만하게 볼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호굴에 발을 디뎠는지 거꾸로 내가 물어볼 말이다. 철대인 이탁이 버티는 채구의 금군이 어찌 당했는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단 말이냐?”
“그거야…….”
살면서 남을 해코지할 줄만 알았지, 자신이 당해본 적이 없는 이규로서는 그저 애꿎은 뒷머리만 벅벅 긁어댔다. 당해본 적이 없으니 자신감이 넘쳤고, 직접 맞부딪쳐보기 전에는 결과도 알 수 없다는 경험론도 작용했다.
둘 다 우는 것은 그쳤지만, 표정은 풀이 죽을 대로 죽어 있었다. 나는 그중 이규에게 물었다.
“강주의 옥리라니 내가 포면 대인을 구하러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겠구나.”
“물론 입지요. 그것 때문에 백성 사이에서도 내기가 제법 크게 걸려 있습니다.”
“내가 포면 대인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말이냐?”
“그렇습니다. 채구가 어리석은 위인이긴 하지만 권력은 대단합니다. 사실 제가 남협의 강함을 오판하게 된 것은 다 채구가 뿌린 거짓 소문 때문입니다.”
“채구가 무어라 하더냐?”
“순창에서 귀환하여 말하길 남협이 악독하고 비겁한 수로 철대인을 시해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하여 부득불 철군을 결정했으나 두 번 당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귀환한 금군의 피해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습이 운 좋게 주효하여 성공한 것으로 아는 자가 많았습니다. 개중에는 진실을 말하는 자도 있었으나 소수였지요. 저 역시 양쪽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가 이탁과 반나절을 겨루고 칠만 대군을 무인지경으로 내달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항우나 여포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하다고 믿었지요. 철대인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동관이 펄펄 뛰며 자신이 직접 달려올 기세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채구나 동관에게 철대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제가 들은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동관이 항주로 가면서 본래 서하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도성에서 보내려던 1만 금군을 채구에게 보내 반드시 남협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흥, 까마귀 무리가 아무리 많아져 봐야 까마귀지.”
요시치카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이소의 소식을 전하고 며칠 동안은 잠잠하다가 이곳에 적응되었다 싶으니 점점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게 그냥 1만이 아니라 이름난 금군 교두 수백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라고 합니다. 서하와의 분쟁에 그들을 투입하려고 했던 것이 실전 훈련을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더이다. 무엇보다 장수진이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이름들이 나섰는지 들어볼까?”
내가 호기심이 일어 재촉하니 이규가 줄줄 외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나는 내심 놀랐다.
“왕연(王淵)이 주장이고 한세충(韓世忠)이 선봉입니다. 남협을 상대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금군 교두가 나섰는데 지금은 교두에서 물러나 수좌의 영예만 가지고 있는 왕진이 집안 친척이기도 한 왕연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현직 금군 교두 중에는 임충이 가세했다고 하지요.”
하나같이 가벼이 볼 수 있는 이름이 없었다.
왕연은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지만 어려서부터 군공을 세워 빠르게 승진한 경우였다. 주로 서하를 상대로 공을 세웠고,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동관의 명으로 강남으로 내려와 진압에 참가하기도 했다. 지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이름난 명장이었지만 권력욕이 적지 않아서 말년은 그리 편치 못했다.
악비나 이강 같은 이에 비하면 능력면에서 한 수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동관이 부릴 수 있는 자원 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장수라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더 문제는 선봉에 섰다는 한세충이었다.
누란에 빠진 송을 지킨 인물로 대부분 악비를 꼽지만, 한세충 역시 그 대열에 서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외려 처신 면에서는 악비를 능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품도 훌륭하고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으며 정치 수완도 나쁘지 않아 간신들 틈바구니에서 끝까지 천수를 누린 인물이니 장수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쯤 나이가 십 대 중반쯤 되었을 것인데 어려서부터 말타기가 뛰어나고 무예도 뛰어났으며 전장을 보는 시야도 남달랐다고 하는 것을 보면 될성부른 떡잎이 아니라 이미 다자란 나무나 마찬가지가 지금이다.
본래대로라면 서하를 상대로 무명을 떨쳐 상관인 왕연에게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칭찬을 받게 되는데 이 시기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아예 기록에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왕진과 임충이라…….’
왕진은 나에게 방패술을 전수해준 인물이었고, 처음으로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난 과거였지만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임충이 내가 아는 표자두(豹子頭)가 맞는다면 이번 출진이 고아내의 장난일 수도 있겠군.’
수호전에서 임충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 비해 제법 널리 알려졌다. 간신 고구의 양자 고아내가 임충의 부인을 탐했지만, 임충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자 임충의 친구인 육겸을 재물로 꼬드겨 임충을 무고죄를 몰아 귀양을 보내버린다.
그러한 인과 관계라면 고아내가 힘을 써서 임충을 전쟁터로 보낸다는 이야기도 제법 그럴듯하게 성립했다. 교련(敎鍊)에 힘쓰는 금군 교두가 직접 전쟁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말이다.
“재미있겠군.”
힘들겠다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제대로 된 이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뜻에 동조해준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