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7 (24) 연징취영(淵澄取暎) =========================================================================
공손승은 쓰러져 있는 이규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 품속에서 손을 넣어 부적을 하나 꺼냈다.
피가 흥건한 허리 쪽 상처에 그 부적을 밀어 넣자 실신한 이규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혼절 중에도 느껴질 만큼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이후 공손승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주문이 아니었다.
“도가에는 3가지 중요한 경전이 있다. 상청경, 영보경, 끝으로 삼황경이 그것이다. 모산은 일찍이 상청경을 주로 삼아 수행에 매진했다. 그렇다고 영보경과 삼황경에 대한 해석과 수련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 삼황경은 천, 지, 인으로 다시 갈라지는데 천을 얻는 자, 악귀와 역병 같은 사람으로서는 막을 수 없는 뜻밖의 재앙을 그 수에 상관하지 않고 모두 액막이할 수 있다.”
어디선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러한 것이 있다면 살면서 최소한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말이지 않는가?
“지를 얻는 자 강과 바다를 건너고, 이무기를 상대할 수 있으며, 풍파를 그치게 한다. 집터를 잡는다면 그 집에 머무는 한 재앙이 없을 것이며, 묘를 쓰면 자손에게 복이 전해질 것이다.”
도교 법회라도 차린 것인지 두 손을 모아 축원(祝願)을 하는 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인을 얻는 자 신장(神將)이 몸에 거한다. 도적과 호랑이가 나를 해하지 못하며, 병마와 악귀가 몸에 깃드는 것을 막는다. 살펴보면 천은 지와 인을 포괄하고, 지는 인을 포괄하니 인이 천을 이긴다거나 지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천과 지가 깨달음에 본령을 둔 힘이라면 인은 신장의 힘을 빌려 깨달음을 가르침 받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그 깨달음을 잘못 이해하여 때때로 자신이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신장은 무한한 힘을 빌려주지만 엄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런 신장이 떠날 때는 깨달음을 얻어 천과 지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이다.”
마술처럼 부적이 상처에 달라붙더니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갔다. 그런데도 전혀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았고 외려 살점이 늘어나고 있었다.
공손승은 파란 불꽃을 잠시 손으로 덮었다가 떼더니 외쳤다.
“보라, 불교에 금고아가 있다면 도교에는 호표(虎彪)가 있다.”
푸른 불꽃이 작은 호랑이의 모양새로 변해 있었다.
나도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호랑이는 포효하며 이규의 상처 안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실제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그 포효가 들리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집단 환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곳은 잠시 후였다.
이규의 상처가 빠르게 낫더니 혼절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규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이상하고 불편한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으헉!”
갑자기 중상을 입었던 허리 쪽에 고통이 밀려오는지 두 손으로 그쪽을 움켜잡더니 눈은 더 떠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런 이규를 보며 공손승은 껄껄 웃었다.
“모산은 존사법(存思法)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데 쉽게 말하면 내면의 깨달음을 하나의 인격적 신으로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을 지녀야 도가 깃든다는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이제는 속으로 하는 욕지거리조차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다들 몸서리쳤다.
호표(虎彪)는 해석하면 호랑이의 가죽, 체취, 흔적 정도로 쓰이지만, 이면에는 호랑이의 깨달음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동양에서 맹수의 왕은 호랑이라고 불리니 그 엄함이야 설명이 필요할까?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던 이규는 주변의 분위기에서 자신이 뭔가 몹쓸 것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를 내며 공손승에게 다가가려 했다.
“어이쿠!”
한 발 내딛기도 전에 빙판에라도 넘어진 사람처럼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그는 엉덩이를 먼저 주무르기보다 허리를 먼저 매만졌다. 식은땀마저 흐르는 것을 보니 고통이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공손승은 손가락을 들어 다음 목표를 가리켰다. 다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번서가 풍랑에 휩쓸린 갈대처럼 떨고 있었다.
공손승은 냉소를 머금었다.
“인의 깨달음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다. 깨달음은 선악을 가리지 않기에 신장 역시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주술의 근본은 의가의 침과 같아서 청정수양을 위한 제세구민에 쓰여야 하는 것이 본래 뜻이다. 그러하니 같은 침을 가지고서도 양의(陽醫)와 사의(蛇醫)로 갈리는 것은 역시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번서는 뒷걸음질 쳤다.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는 비호처럼 박차 번서의 멱살을 잡았다. 그 틈을 노려 무송, 노지심, 여방이 공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공손승이 이규에게 한 행동이 충격적이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캑캑,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호표만은, 호표만은 제발!”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번서에게는 공손승이 딱 그런 존재였다. 처량할 정도로 울며 비는 번서를 보다가 나는 결정을 내렸다.
“컥!”
안면에 주먹이 박히자 앞니가 우수수 빠져나왔다.
사정 모르던 사람이 봤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박장대소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번서는 흉한 모습을 가리기보다 외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더 걱정하며 애원했다.
“대협! 장군! 전하!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평생 모아둔 재물과 고서도 다 내놓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어허, 누가 보면 죽이려는 줄 알겠군.”
공손승은 품에서 다시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는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는데 그때마다 번서가 경련을 일으켰고 주변조차 움찔거렸다.
“제발! 자비를! 읍! 읍!”
공손승의 손을 떠난 부적은 파란 불꽃이 타오르더니 이내 아까 보았던 작은 호랑이로 다시 변했다. 번서는 호랑이를 보며 귀신을 만난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순식간에 번서의 입안에 안착했다.
이윽고 우리는 부러진 앞니가 새로 돋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규는 그것을 보며 자신의 허리로 손이 절로 갔다. 이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눈으로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내 몸 제대로 돌려놔!”
이해는 해도 감정은 죽일 수 없는지 이규가 쿵쿵대며 공손승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곧 외마디 비명과 함께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모산의 시조가 신선 중 청동군(靑童君)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구나. 으허허엉!”
번서는 끝내 울먹였다.
반항심이 아직 살아 있는 이규와 달리 번서는 일찌감치 반항할 생각을 버린 것 같았다. 다 큰 사내가 정말 처량하게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공손승이 나를 보며 말했다.
“시조께서는 신선인 청동군에게 종이처럼 펼쳐진 흰 옥에, 푸른 옥으로 새겨진 경전을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모산의 술법은 모두 푸른 색을 띠지요.”
부적을 쓸 때마다 푸른 불꽃이 일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공손승은 다시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적들을 차례차례 살폈다. 그러자 하나같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얼굴과 기세만 봐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 같던 노지심, 무송, 여방도 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남협과 모산의 도사에게 대항하는 우리가 어리석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증가의 사병 중 최초로 이탈하는 이가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썰물처럼 산 아래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젠장, 우리가 상대하려던 것은 남협이지, 모산의 도사는 이야기가 없었잖아!”
여방이 도망 행렬에 편승해 내빼버리자 이런 상황에서 의뢰주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로 얼굴만 보고 있던 무송과 노지심도 신형을 돌리더니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번이 저들을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어떤 식으로든 내 앞에 나타날 것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오늘 일어난 사건만으로도 수호전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증가에 정말 충성스러운 몇몇 사람만 남은 상황이 되자, 증 가주는 더는 측은하게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자에게도 호표를 박을 텐가?”
호표라는 것은 다친 상처 부위에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나는 증 가주의 몸을 훑으며 어디가 가장 괴로울까를 떠올렸다. 그것이 더한 공포감으로 작용했는지 증 가주의 하의가 흥건하게 젖기 시작했다.
“대협, 아니 전하. 그리고 진인. 살려 주십시오. 제가 눈이 어두워 차마 고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모든 재산을 보시(普施)하고 평생 청정하게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공손승이 내 곁까지 다가와 준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동군께서 시조에게 당부하길 청규를 잘 준수하고 마음을 다해 깨닫도록 하라. 내가 준 경전으로 가족을 해하는 재앙을 자르고, 마을의 안락을 위험에 빠트리는 귀신을 베며, 나라의 운명을 타락시키는 요괴를 죽여라. 시조께서 83살에 귀천하며 후세에 남기길 10년이 지난 후 내가 떠난 자리를 파보라고 말씀하셨다. 10년이 지나 그 자리를 파보자 한 자루의 검이 나왔다. 그것이 진령(眞靈)이다. 모산은 자애로우나 진령을 받는 자는 침으로 병마를 고치는 의원과 같다.
“진인!”
공손승의 일갈에 증 가주는 혼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규를 가리키면서 바락바락 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럼 저놈은 왜 살렸습니까? 하나같이 지독한 강주 옥리(獄吏) 중에서도 인간 백정이라고 소문난 놈이 저놈입니다. 내가 그보다 죄를 많이 지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나에게도 호표를 쓰란 말입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은 산과 물, 모양 있는 것과 없는 것. 너와 나를 구분하는 생각 자체가 없다. 알면서도 악의를 행하는 자와 배우질 못해 왜 이것이 나쁜지를 모르는 자는 그 해악의 크기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미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느냐. 호표를 받은 놈이 가족을 해하고, 마을의 안락을 위험에 빠트리는 재앙 또는 귀신이라면 너 같은 종자야말로 나라의 운명을 타락시키는 요괴다. 저들은 홀로 또는 소수가 모여 악을 저지르지만 너는 수백, 수천을 동원하여 악을 저지른다. 그에 대한 처벌도 이미 밝혔다. 재앙과 귀신은 베고, 자르지만, 나라의 운명을 타락시키는 요괴는 죽인다고!”
공손승은 증 가주에게 하는 말을 빌려 우리 일행에게도 충고를 던지는 것 같았다. 공손승의 인간 같지 않은 범상치 않은 행동을 연이어 보아서인지 이준조차도 내 곁으로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인견문각지위심(祇認見聞覺知爲心) 위견문각지소복(爲見聞覺知所覆) 소이부도정명본체(所以不睹精明本體)라! 불(佛)은 악의 크기를 재지 않는다. 작은 악이든 큰 악이든 부처 앞에서는 모두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道)는 다르다. 우리는 악의 크기에 연연한다.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 도지만 악의 크기를 셈하는 것에 집착한다. 작은 산에 신령이 있고, 큰 산에 신선이 있으며, 저 하늘 위에 상제와 신군들이 있는 이유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만으로 마음을 삼으면 현상에만 가려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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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사정이 있어 다음 연재는 28일이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설에도 글을 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