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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83화 (183/257)

00183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나는 험상궂은 이규를 보며 어찌 처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기분대로 사람을 죽이는 이규의 성정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대종과 친분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수호전에서 대종은 빠른 발을 이용하여 전령, 감시병의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로 묘사되지만, 이면에는 조율자의 역할도 있었다. 원한을 맺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렇게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나머지 인물들이 차례로 소개되고 있었다.

“내가 소온후(小溫候) 여방(呂方) 이다.”

소온후라는 별명에 걸맞게 마치 여포의 살아생전 모습을 그대로 박제한 것 같은 사내였다. 물론 여포가 보여주는 기도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방천화극만은 제련술이 발전되어서인지 더욱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대영산을 양분하는 두 명의 두령 중 한 명입니다. 아마도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새인귀(賽仁貴) 곽성(郭盛)에게 쫓겨난 모양입니다.”

장청이 바짝 붙어 내게 설명했다.

내가 알기로 여방과 곽성은 대영산을 홀로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실력이 백중세라 승부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력 싸움에서 밀려난 것일까?

여방에 이어 나온 자는 험상궂은 무리 중에 그나마 인상이 나아 보였다. 호방한 풍모라고 할까? 생김새만으로는 누구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8명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언뜻 수줍음마저 보였다.

“……무송이오.”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뻔했다. 무송이 이 자리에 나오리라고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지. 무송이 처음 등장한 것이 고향에서 술에 취해 시비가 붙었다가 관리를 때려죽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도망을 쳤다가 관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사면을 받았다. 그럼 아직 사면을 받기 전인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전력이 있는 만큼 무송은 결코 쉽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 경우였다.

무송의 성격은 이규와 비슷한데 좁쌀만 한 이성을 더한 이규라고 보면 될 것이다. 번외로 무송의 형수가 그 유명한 반금련이다.

반금련은 수호전과 금병매에서의 행적이 조금 다른데 수호전에서는 형을 죽이고 불륜을 저지른 반금련과 정부 서문경을 무송이 잔인하게 죽이면서 끝나고, 금병매는 무송이 살인미수에 그치면서 둘이 살아남았다고 가정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놈도 살려, 말아.’

고민이 더 깊어졌다. 그것이 증가의 탕아에게는 곤혹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세상의 소문이 모두 왜곡되었다고 믿고 자기가 본 것만 믿는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다.

그중 한 사람이 무겁게 보이는 철봉을 휘두르더니 바닥에 내리찍으며 나름의 위용을 보였다.

“노달이다.”

그게 끝이었다. 이름이 낯이 익어 몇 번을 되뇌다가 그제야 정체를 알게 되었다. 화화상 노지심이다.

‘허, 지금쯤 노지심도 쫓기고 있을 시기인가?’

본래 위주의 제할(경찰)로 근무하던 중 마을 부녀를 괴롭히던 백정을 혼내주다가 실수로 죽여버리는 바람에 도망을 친 경우였다. 도망을 치다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이나 복장을 봐서는 아직 승려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았다.

대도를 어깨에 걸친 장한은 의기양양하게 나서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양산박의 제일 호걸 한백룡이 나다.”

“양산박?”

뒤에서 이준이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호전에 등장하는 양산박 108 두령에 그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의 양산박을 관리하는 자가 이준이었다. 그가 모르는 인물이 있을 수 없었다.

‘한백룡, 한백룡이라……. 아!’

열심히 머리의 기억을 검색하다 보니 걸리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비웃음이라 인식했는지 한백룡은 대도를 강하게 내리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흥, 세 명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철대인 이탁을 죽였다지? 수만을 가로질러 채구를 사로잡았다고 하지만 혼란을 틈탄 요행인 것을 네가 모를 줄 알았더냐?”

나는 파안대소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뒤를 향해 외쳤다.

“다들 나서게 해주고 싶지만, 새로운 식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겠다. 그리고 소문이 제대로 나야…….”

발을 구르자 어느새 한백룡 코앞까지 다다랐다. 한백룡은 순식간에 자신 앞에 다다른 나를 보고 귀신을 본 듯 놀란 인상이었다.

“컥!”

팔꿈치가 한백룡의 가슴을 후려치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뒤로 굴렀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를 쫓아 허리를 발로 후려쳤다.

“웩!”

신물을 토해내며 정신없이 바닥을 구르는 한백룡이었다.

“뻔하군. 여기저기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가 강남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겠지. 그래도 쥐꼬리만 한 실력은 있어서 양산박 출신이라고 신분을 대니 그냥 믿어주었겠지.”

말 그대로였다. 전형적인 범죄자였던 한백룡은 주귀와의 친분을 믿고 양산박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마침 주귀가 자리를 비우던 중에 이규와 시비가 붙어 죽게 되는 인물이다.

“비겁한 놈! 철대인도 이런 식으로 공격했구나!”

“겁탈과 약탈을 일상처럼 해온 네놈에게 들을 말은 아니군.”

나는 서슴없이 한백룡의 목을 발로 비틀었다. 목에 힘을 주며 버티려고 했지만, 발에 가해지는 압력을 끝내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위험!’이란 외침이 수하들에게서 들리더니 허리를 노리는 강력한 풍압을 느꼈다. 일순간 한백룡의 눈에 안도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생에서 지을 수 있는 마지막 표정이 되었다. 발에 더욱 힘을 주어 마치 포를 뜬 것처럼 목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풍선 터지듯 선혈이 사방을 적셨다.

“이런!”

노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것이 보였다. 놀랐을 것이다. 그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철봉을 한 손으로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달의 힘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셌다. 손바닥이 충격으로 찢어졌고 봉을 따라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군!”

“전하!”

일행은 당장에라도 나서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절대 나서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엉덩이를 들썩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 피를 보게 된다면 내 명령과 상관없이 싸움판에 뛰어들 것처럼 보였다.

나는 멈칫한 노지심의 복부를 발로 후려쳐 떨어트린 후 틈을 노려 쏜 해보의 화살을 팔목으로 쳐냈다.

“바보가 아니니 실력을 보고 뽑았겠지? 몇 명을 상대했던가? 열 명? 스무 명? 그런 인물이 8명이나 있으니 천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이규가 쌍부(雙斧)를 휘두르며 후방을 점했고, 무송은 전면에서 대도를 아낌없이 휘둘렀다. 해진, 해보 형제는 화살통을 바닥에 던지고 창을 잡아 노지심과 함께 육방의 나머지를 점했다.

그사이 번서는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웠다.

공격은 번개처럼 흘렀다. 그 사이 주문을 끝마친 번서가 부적을 날렸다. 허공에서 부적이 불붙은 것처럼 타오르자 내 머리 위에 작은 먹구름이 일더니 섬광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손승이 축지법을 보였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것을 보면 과연 내가 있는 이곳이 진짜 역사인지 의심될 때가 있다.

‘못 믿는다면 부처나 예수, 기독교 성자들이 일으킨 기적들도 다 거짓이란 거겠지.’

그 사이 먹구름의 섬광이 뇌전을 만들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빛의 속도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뇌전은 그대로 내 전신에 꽂혔다.

번서는 의기양양하여 소리쳤다.

“내 도술에 적중되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최소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지.”

뇌전이 내리치자 놀라서 뒤로 물러섰던 적들이 나를 끝장내기 위해 몰려들었다. 상태를 지켜볼 법도 한데 외려 누가 채가지 않을까 조급한 기색이 보이는 것을 보면 보상을 차등 지급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뇌전이 전신을 관통하는 순간 고통스럽기는 했다. 일반인이라면 번서의 호언대로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겐 겨울철 정전기를 일순간 느낀 것처럼 딱 그 순간뿐인 참을 수 있는 고통에 불과했다.

애초에 나 정도 되는 사람에겐 이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번서는 도술로 천하를 주름잡았을 것이다. 심지어 공손승에게 도술로 밀려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을 정도였다.

“헉!”

해보는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가 내 수도에 창대가 부러지고 멱살까지 잡혔다. 해보가 잡히자 해진은 급히 휘두르던 창의 방향을 바꿨지만 이규와 노달, 무송은 해보의 안위와 상관없이 함께 두 동강 낼 기세로 삼면에서 덮쳤다.

“야, 이 미친놈들아!”

해진은 자신의 동생마저 죽이려는 단호한 행동에 격분하여 창을 거꾸로 쥐고 가장 가까이 있던 무송의 하체를 공격해갔다. 무송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휘청이며 뒤로 넘어졌고 그 사이 이규의 쌍부와 노달의 철봉이 앞뒤로 몰려왔다.

나는 해보를 노달의 철봉에 던져주고 몸을 숙였다.

“그륵.”

철봉에 등을 격타당하고 이어 이규의 쌍부가 배를 가르자 해보는 단말마만 남긴 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해진은 눈이 돌아가 미친 듯이 노달과 이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증 가주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는지 나를 가리키며 적은 이쪽에 있다며 소리쳤지만, 다시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전투에 끼지 않고 번서 곁에 있던 여방이 해진의 등에 창날을 박았다. 해진이 경련을 일으키다 한스러운 얼굴로 쓰러지자 여방은 귀찮은 짐짝을 치웠다는 표정으로 전투에 합세했다.

번서는 그 와중에 부적을 여러 개 꺼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아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위력이 강한 도술을 쓰려는 것 같았다.

“너희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하던 내가 어리석었구나.”

수호전에서 양산박에 입문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범죄를 저질러 도망치던 중 친분에 의해 이끌리는 경우가 전자라면 유능한 인물을 포섭하기 위해 죄를 뒤집어 씌워 범죄자로 만든 후 데려오는 경우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노지심, 무송, 번서 같은 이들이 전자에 해당하고, 노준의, 주동, 화영, 안도전 같은 이들이 후자에 해당한다.

주동의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런 식이다.

주동이 관리의 신임을 얻어 잘 지내고 있는 와중에 그를 끌어들인답시고 관리의 어린 아들을 죽인다. 그리고 주동을 살인자로 모함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 방법과 다르지 않다. 특히나 노준의는 철저하게 당했는데 만약 그가 양산박으로 빠지지 않았다면 북송의 멸망은 늦춰졌을 것이다. 그런 방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이 송강, 오용, 이규 등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무뢰한마다 송강을 의인이라고 칭송하지만 기실 조직 폭력배 사이에서의 의리 그 이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수호전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젊어서 수호전을 읽지 말고 늙어서 삼국지를 읽지 말란 말도 있지 않았던가?

지금 그러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비록 대가를 위해 뭉친 일행이라지만 그런 일행의 안위에는 눈곱만큼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대강 패거리처럼 실력을 보이고 위엄으로 누른다면 계도 할 수 있다.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형님이라 부를 것이다.

그럼 반면에 내가 강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저들에게 있어 거래의 대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셈이다.

사대강 패거리도 악행은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때와 달리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내 눈앞에서 이들의 마음가짐을 직접 확인해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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