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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82화 (182/257)

00182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미 출발할 때부터 절대 떨어질 수 없다며 수십 명이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치안을 담당하던 관승과 병권을 쥔 석보까지 하나같이 고집불통들이었다.

깊게 따지면 항명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장상영과 장뢰는 껄껄 웃으며 외려 그들을 부추겼다.

“양국은 곧 전하입니다. 전하의 안위가 양국의 존망과도 연결된 셈이지요. 남창의 금군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복건을 어찌할 적은 당분간 없습니다. 게다가 지킬 곳도 건성과 야성, 천주 세 곳에 불과하여 이 늙은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지요.”

그들의 호언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이유 때문에 홀로 나설 작정을 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강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자마자 동관이 친히 5만의 정예를 이끌고 항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은 설마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몸소 움직이리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강남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항주였고, 그런 항주를 얻기 위해 성동격서를 펼쳤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사람이 이득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실수다. 포면 한 사람이 가져다줄 더 큰 이득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장기판의 졸로 보는 한 그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느릿하게 북상했다. 그것이 더욱더 성동격서라는 생각을 적들에게 심어주었을 것이다.

대신 밀려드는 것은 채구가 내건 현상금에 혹한 낭인들과 인근 토호의 사병들이었다.

여정의 초반에는 그리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랬던 것이 건창(建昌, 강서성 남성현)에 이르면서 확연히 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험한 산으로 추앙받는 인근의 마고산(麻姑山)을 넘을 때였다.

오합지졸처럼 대오도 없이 나섰던 앞선 낭인들과 달리 이번에는 제법 질서정연하게 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 이번에는 눈깔들에 생기가 있는 것이 싸워볼 맛이 나겠는걸?”

뒤에서 무하의 안석이 반색했다.

그는 일행 중에서 길잡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가는 길이 무하를 따라 강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안석의 말에 발끈하는 듯했지만, 선두에 선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이내 잠잠해졌다. 사내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증거였다.

“마운금시(摩雲金翅) 구붕(歐鵬)이오.”

“황문산(黃門山)의 맹금(猛禽)!”

뒤에서 몇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러다 멋쩍은 듯 침묵이 흘렀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황문산의 도적이로군. 그대도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탐나서 왔나?”

도적이라는 말에 구붕의 얼굴이 굳었다.

나름 의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그에게 도적이란 말은 제일 듣기 싫은 단어였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수호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본래 군관 출신이었으나 상관에게 미움을 받고 탈영하여 황문산에서 세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러다 그가 양산박에 들어가는 계기를 보면…….

‘송강이 강주에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를 구하기 위해서 양산박 일행에 들게 된다.’

나름의 소신이나 강단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면 현상금만을 노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내 강함을 시험하고 일행에 합류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3대가 먹고 살 수 있는 금을 내린다고 하니 어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탁을 꺾은 나를 이기면 천하제일이란 명성이 절로 따라오거늘…….”

구붕의 눈매가 흔들렸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그가 눈짓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거한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등장했다. 나는 거한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석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석보는 뛸 듯이 기뻐했고, 주변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구붕의 미간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직접 나설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장소도 넓으니 그러지 말고 저 뒤 나가고 싶어 근질거리는 놈과 너까지 나서라.”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인가?”

“무시가 아니라 접대다.”

나는 동평, 양지를 차례로 지목했다. 그들은 석보 만큼 뛸 듯이 기뻐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숫자를 맞췄다. 이 중 한 명이라도 진다면 내 목을 주지.”

그러자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구붕마저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다들 내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을 각오로 따라나선 것이 아니었나? 이럴 자신도 없다면 짐 싸서 복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지.”

“황문산 도적쯤이야 저 혼자서도 박살 낼 수 있습니다. 외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꺼내셨습니다.”

석보가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자존심이 상한 구붕의 표정이 살벌해지더니 나를 보며 외쳤다.

“오냐,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그 결정 후회하게 하여주마. 마린(馬麟), 나서라!”

황문산 패거리는 네 명의 수뇌가 있다고 했다. 구붕, 마린, 도종왕(陶宗旺), 장경이다. 그중 장경은 이미 내가 거둔 바가 있다. 장경이 하급 관리를 그만두고 황문산 패거리에 합류하기 전에 나를 만났기 때문에 자연 황문산의 수뇌는 세 명이 된다.

동평이 구붕을, 양지가 마린을, 석보가 도종왕과 겨루는 구도가 되었는데 그것을 예상하고 지목한 인선이기도 했다.

먼저 석보와 겨룰 도종왕은 거한답게 힘이 무척 세지만 기술은 별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농부 출신이라 철초(鐵?, 쇠갈퀴)를 무기로 쓰는데 이쯤 되면 절로 한 명이 떠오른다. 바로 저팔계다.

둘의 대결은 예상보다 시시하게 끝났다. 자신의 힘을 믿고 손바닥 싸움을 걸어온 도종왕에게 석보 역시 힘으로 대응하여 일시에 맞잡은 손바닥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다. 황문산 패거리들이 미처 놀랄 시간도 주지 않았을 정도로 삽시간에 끝난 승부라 나머지 두 명의 승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행 중 나 다음으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석보와 요시치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보는 지휘도 상당하여 나 대신 일행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나가떨어진 사람이 구붕이었다. 동평은 나를 만나고 수련을 거듭한 덕분에 예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였다. 그 덕분에 마린을 몰아붙이고 있던 양지에게서 조급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양지가 경지를 뛰어넘기를 바랐다.

수호전에서 양지를 검술로 앞서는 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나를 만난 후 뛰어난 사람들을 숱하게 보면서 자격지심을 얻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양가장의 후예다!”

쌍칼을 휘두르며 잘 버티던 마린이었지만 양지가 집안의 명예를 걸고 온 힘을 다하자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문산 패거리들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들이 애초에 믿었던 것은 구붕보다 마린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쌍검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린은 손목이 시큼한지 안색을 찌푸리다가 이내 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잘생긴 얼굴에 우수가 낀 모습을 여자들이 보았더라면 얼굴을 붉혔을 법했다.

구붕은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조차 이리 강하니 과연 소문이 진실이었군요. 아무리 진신 무예가 강하다고 해도 강주 옥사를 소수로 깨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나같이 이런 정도의 실력이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이 갈 마음이 들었는가?”

내 질문에 구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장경이 그러더군.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황문산에 의탁하려 했다고. 그 정도 되는 인물이 고작 도적질이나 하려고 그대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장경?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우리를 도운 셈이 되었군요.”

구붕이 손을 모으자 황문산 패거리들 역시 같은 행동을 취했다.

“포면 대인은 숙부인 포청천 못지않은 천하의 의사(義士)입니다. 그런 의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이 지금의 송입니다. 황문산이 미력하나마 포면 대인을 구하는 길에 앞장을 서고자 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때 언덕 저 너머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장청이 어느새 나무 위에 올라가 전면을 주시하더니 크게 소리쳤다.

“증(曾)이라는 깃발이 보입니다!”

“증? 남평의 증가!”

하나둘 고개를 넘어 모습을 드러내자 무하의 안석이 전면에 선 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군, 증공(曾鞏)을 아시겠지요? 증공의 명성에 먹칠하는 개 같은 자식이 바로 저놈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묏자리에 알아서 굴러 오는군요.”

증공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대단한 문인이었다.

소동파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했고, 구양수의 인정을 받으면서 왕안석과도 교류했던 당대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방관으로서의 행적도 나쁘지 않아 그가 머물렀던 곳의 백성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사망한 지 20년은 된 인물인데 안석의 설명을 들으니 본래 고향이 이 근처라고 했다.

“쓰레기 같은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우습지도 않군.”

길죽하게 생긴 말상에 찢어진 눈매는 무척 음험하게 보였다. 뒤로 끌고 온 사병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천이 넘지 않은 것을 보면 따로 꿍꿍이가 있는듯했다.

“아버님은 존경할만한 분이었지만 처세가 부족했다. 지방관을 고집하다가 중앙으로 들어간 것은 환갑이 넘은 뒤였다. 그렇게 해서 맡은 일이 국사 편찬이었지. 재상이 될 수 있었음에도 아버님은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식을 위해 음서(蔭敍) 하나 챙기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

호부 밑에 견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증가가 천하의 명문가로 우뚝 설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가문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할 일만 다하다 간 아버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기를 20년, 드디어 증가가 이 궁벽한 곳을 벗어날 기회가 왔다.”

“단단히 미쳤군.”

안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증공은 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우뚝 서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외려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으니 어찌 기가 차지 않을까?

그때 사병들을 밀치며 험상궂게 생긴 인물 여럿이 앞으로 몰려나왔다. 그들 중에는 생김새만으로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이도 있었다.

그중 쌍둥이로 보이는 인물 중 한 명이 우리를 힐끔보며 말했다.

“헛소리는 작작 좀 하고 이놈들을 모두 때려잡으면 약속한 보수는 확실히 주겠지요?”

쌍둥이를 비롯해 앞으로 나선 인물은 모두 8명이었다. 저마다 풍기는 기도가 섬뜩하면서도 괴이했다.

그중 도사 복장을 한 괴인이 조용히 말했다.

“금은 필요 없다. 원풍유고(元豊類稿)만 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죽여주마.”

원풍유고는 증공의 저서였다.

괴인 도사를 초빙하기 위해 증공의 친필 저서를 보수로 내걸었다면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인정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수호전에서 유명한 도사는 2명이 있다. 한 명은 공손승, 다른 한 명은…….

‘혼세마왕(混世魔王) 번서(樊瑞).’

혼세마왕은 서유기에서 등장하는데 번서는 그 명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로 붙인 경우였다. 양산박 인근, 망탕산의 산적 두령이었다.

만약 눈앞의 괴인 도사가 번서가 맞는다면 쌍둥이의 정체도 알 것 같았다.

‘해진, 해보 형제.’

각각 양두사와 쌍미갈로 불리며 사냥을 주업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용병으로 참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유난히 시커먼 얼굴의 거한이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대종 형님을 풀어주겠다는 약속, 반드시 지켜라.”

박력이 듬뿍 담긴 쇳가루 목소리였다. 저 인상에 대종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오직 한 명뿐이었다.

‘흑선풍 이규!’

수호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살자가 그였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대종과 송강뿐이다. 대종은 강주 감옥의 간수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외려 감옥에 갇힌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네 명만 하더라도 쟁쟁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들에 뒤처지지 않는 기도를 내뿜는 인물이 아직 4명이나 남아 있었다. 증가에서 자신만만하게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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