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그날을 기점으로 내가 생각했던 꿈은 한 발짝 더 나아간 느낌이었다. 스노우볼 (Snow Ball)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고 할까? 그건 분명히 예전의 나와는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워낙 가진 것이 많아 가진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경쟁자를 탈락시킬 수 있었던 초나라 시절과 달리 지금은 개인적인 힘과 포부만을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자연 감회와 성취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성공에 도취한다면 나는 숱하게 흘러간 뭇 소 왕조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그들의 교훈을 통해 나는 움직일 힘을 얻게 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중 한 명인 버트런드 러셀은 실업으로 고통받는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살아 있는 동안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떠올려보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세계를 바꾸기 위해 거창한 인물이 되라는 평범한 조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봄직도 하다. 행복한 세계와 불행한 세계, 둘 중 현재의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대다수 젊은이는 불행한 세계, 불행한 사회에 한표를 던질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불행한 세계 또는 사회에 산다고 같은 답을 내놓은 젊은이 중 행복한 세계를 성립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원하는 젊은이와 불행한 세계에서 탈피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원하는 젊은이의 가치관은 같을까? 아닐 것이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각박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점차 희석되고 당장 내일을 살기 위해 준비하기에도 어려운 것이 사회다. 그런 사회는 기실 현대의 우리만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류가 공동체를 형성한 이래 끊임없이 제기된 오래된 불만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인들은 여러 정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의 차이만 있을 뿐, 여러 지류에서 흘러내린 사고(思考)는 일천 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지금 당장에도 일관된 답을 내놓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절망하고 욕하고 체념하고 있다면 불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고통스러운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은 누가 대신 꿔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움직일 마음은 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꾸는 꿈을 이야기한다.
-덕(德)은 동반자가 없이는 최고에 이를 수 없다.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덕을 이루는 과정과도 같다. 혼자 산다면 덕이란 단어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베푸는 자가 있다면 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정의하는 과정이 행복한 세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현실적이지 않은 공허한 외침인 것을 안다. 그러나 현실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현실을 바꾸지 않겠다는 무언의 승낙이다. 그러면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어라며 현실적이지 않은 꿈을 버린다.
그중에는 훗날 역사책을 집어 들며 척준경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본래 척준경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사실 척준경의 삶은 현대의 평범한 젊은이가 열광하는 성공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신분이 낮았지만 타고난 신체 조건과 무예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두각을 보였고, 끝내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다. 게다가 역모의 주도자였으면서 그 역모를 다시 진압하는 진귀한 장면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며 그라는 사람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개인적으로는 성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지만, 그에게서 어떠한 존경할 만한 점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즐겨보는 장르 소설의 도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행하고 괴로운 세상에서 즐거움이란 술, 담배와 같다. 지금 당장은 현실을 잊을 수 있지만, 내일이 되면 여전히 세상은 불행하고 괴롭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고려를 떠나 아무 연고지도 없는 이곳으로 왔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되는 행보로 훗날 기존 척준경의 삶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고, 지금의 나만 기억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자신만만하게 나도 이 정도는 했을 것이라는 마음은 비록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중의 한 명이 세상, 또는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새로운 척준경의 삶을 사는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고된 길을 가느냐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고 개인적인 영화를 버려야 하는 삶을 재밌어서 택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좀 더 고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현자, 대인, 군자, 인격자로 남고자? 단언컨대 그것을 원하는 것은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친분도 없고, 얼굴을 알지도 못하며, 심지어는 내 행동을 욕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아우르고 같은 꿈을 심어주고 싶다. 각박한 우리의 삶을 바꿔줄 영웅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각박한 삶에 당당하게 저항하며 하루하루를 보람으로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의 위안’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의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보라.’라고 적었다. 니체가 고통은 없애고 싶은 감정의 잡초가 아니라 성장과 발전을 낳는 씨앗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역사에 남기고자 하는 씨앗이기도 하다.
그렇게 장뢰를 국사(國士)로 받아들이고 열흘이 지났다.
“남들이 그리 말하면 미친 짓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형님이 말하니 제가 할 말은 한마디뿐이군요.”
이준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 역시 웅성거렸다. 지금 내 주위로 이준뿐만 아니라 양지, 관승, 주동, 장청, 석보 등 힘쓴다는 이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이준은 모두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 큰 소리로 의사를 못 박았다.
“저는 죽어도 쫓아갈 테니 그리 아십시오.”
양나라가 세워질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남은 일이 있었다. 강주 관아에 갇혀 있는 포면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공표하자마자 다들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양지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이곳 건성에서 강주까지…… 1,400리나 됩니다. 포면 대인을 구하겠다고 천하에 고하고 북상하는 순간, 관군은 물론이고 호승심 강한 강호인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철대인 이탁을 꺾고 오은의 지지를 받아 남협의 반열에 오른 형님을 꺾으면 단숨에 강자로 인정받을 테니 말입니다.”
그사이 채구를 사로잡은 그날 이후로 절대적인 추종자를 자처하는 민강의 백서가 턱을 쓰다듬으며 탄성을 발했다.
“설마 그걸 생각하고 강주 수군의 배를 모조리 불태운 것이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삼면이 장강으로 휘감기며 천연의 요새가 된 강주였다. 그러나 성벽 역할을 하던 수군의 배가 불태워지면서 지금은 방어 면에서 크게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을 치를 경우였다.
“나는 이상을 위해 무장을 선택했다. 그 말은 곧 상황에 따라 이상을 위해 무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번 행보로 나는 확실한 구심점이 되려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고통과 괴로움을 애써 삼키는 숨은 인재들에게 나를 알리려 한다. 순창 전투의 성공이 결코 기적이 아니었음을 확인시키려 한다.”
“강주로 가기 위해서는 남창을 지나야 합니다. 남창의 4만 금군이 성에서 농성이라도 벌이면 10만의 병력이 있어도 떨어뜨리기 어렵습니다. 후방이라고는 하나 천하의 요새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남창입니다. 건성과 야성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이건 아무리 전하라 해도…….”
주동은 염려된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1,400리 길을 왕복하려는 목적은 오직 하나, 포면 대인을 구하기 위해서다. 농성하겠다면 나에게는 외려 고마운 일이지.”
“그럼 그 수많은 금군을 평야에서 어찌 상대하실까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미 전하께서 신화를 이루셨으니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포면 대인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찌 됩니까? 도성으로 옮긴다면…….”
주동의 재질문에 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옮기지 않는다. 내가 먼저 행로를 밝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 조정에서 자존심 때문에라도 후퇴하는 인상을 보이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포면 대인을 도성으로 옮긴다면 백성은 흔들릴 것입니다.”
장청이 탄성과 함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런 장청에게 질문을 던졌다.
“장청 너의 말이 맞는다고 치고, 조정은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이미 주군께서는 순창 전투를 통해 병사는 아무리 많아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게다가 남창의 금군은 주군에 대해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군관을 사로잡으면 근처의 금군은 죽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으니 말입니다. 만약 순창에서 장군이 사로잡은 군관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목숨으로 끝낼 것을 청했다면 이렇게까지 공포가 팽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포는 상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으니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들을 동원하여 전투를 치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남창의 금군은 모두 도망갈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니 제가 조정의 대신이라면 높은 현상금을 걸어 낭인 무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관부 무인들을 대거 참여시켜 주군의 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장청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았다.
명성을 노리는 자, 또는 재물과 직위를 노리는 자들이 수없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에게 희망을 거는 자들 역시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군웅 집단은 기존 수호전의 108 두령과 다른 구성일 수밖에 없다. 이쪽의 뜻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는 아예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죄를 짓고 관군에게 쫓겨서 어쩌다 보니 나에게 의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삼국지의 내용이 바뀐 것처럼, 척준경의 삶이 바뀐 것처럼, 수호전의 내용 역시 훗날 바뀌게 될 것이다. 온갖 범죄자들의 소굴이었던 양산박을 벗어던지고 의와 협을 아는 진짜 무협 시대를 여는 것이다.
그렇게 내 생각이 확고해졌음을 알자 이준 등은 수긍하며 서로 쫓아가려고 난리였다면 문신들은 다른 의미로 난리가 일었다. 이제 곧 천하에 양나라가 세워짐을 알리려 하는데 이 중요한 때, 위험을 자초하느냐는 타박이 쏟아졌다.
그들의 대표로 장뢰와 장상영이 찾아왔다.
차를 들며 장뢰와 내가 각각 한 마디 던졌다.
“관자(관중)가 이르길 성공하지 못할 일은 하지도 말고 얻지 못할 물건은 바라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성공을 하리라 장담할까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도 두 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포면 대인을 구할 기회는 이미 있었습니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장뢰와 장상영은 말이 없었다. 차를 다 마신 후에야 ‘역시 복건차가 제일입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율곡 이이도 관중과 비슷한 말을 남긴 적이 있다. 하지 못할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준비를 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어설픈 준비로 요행을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많은 경험과 충분한 준비를 통해 당연한 결과를 바라는 것인지의 차이다.
그리고 며칠 뒤 천하에 하나의 소문이 퍼졌다.
-강주 옥사에 억울하게 감금된 포면 대인을 구하기 위해 남협이 나섰다. 처음엔 혼자였으나 갈수록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삼국지를 쓸때와는 다른 의미로 여러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같이 제게는 아낌없는 조언이었고, 방향타였습니다.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젊어서는 남들에 자랑하려고 공부했다. 그 뒤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했다. 지금은 재미로 공부한다.'
그렇게 따져보니 삼국지를 쓸때나 지금의 고려는 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쓴 글입니다. 아직 더 발전하며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에 그날을 위해 글을 씁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쓰는 모든 글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보편적인 이상에 초점을 두고 전개를 해나가고자 합니다. 현실에서 저는 제 할말 다 못하는 소시민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한 해도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