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80화 (180/257)

00180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확실히 이소의 소식은 활력소였고 좋은 조짐의 시작이었다. 바로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건성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아직 완벽한 국가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재상의 자리를 공고히 한 장상영조차 버선발로 뛰쳐나가게 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저희가 다 미력한 탓입니다. 가산(柯山) 선생께서 친히 오실 때까지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장상영은 노학사를 보며 어려워했다.

생김새만 보아도 장상영보다 윗줄이 분명했기도 하고, 인문학 명성으로만 치자면 장상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노인네라 욕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리 환대해주니 고맙구먼.”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 중 지금껏 활동하시는 어른은 이제 두 분에 불과합니다. 그중 무구(無咎) 선생은 와병 중이라 은퇴에 가까우니 오직 선생만이 남았을 따름입니다. 그런 선생께서 어려운 몸을 이끌고 합류를 청하셨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산 선생은 장뢰(張?)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후 백 년 이내 가장 뛰어난 문인을 가리켜 소문사학사라 일컬었는데 이를 소식이 열거하면서 정석으로 굳혀졌다.

그러고 보면 북송 시대는 유난히 뛰어난 문인들이 많았다.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대가들이 여럿 출현하며 최소한 문학에 한해서 압도적인 결과물을 쏟아냈다.

구양수, 소식, 매요신 같은 이들이 전대의 거물이었다면, 지금에 이르러 황정견, 진관, 조보지, 장뢰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들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황정견과 진관은 사망했고, 조보지는 지병으로 고생하며 오늘 내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는 장뢰였다.

“한때 내 임지가 바로 이곳이었지. 나는 잘못된 악습을 뿌리 뽑고자 정성을 다했지만, 기존 기득권을 설득하지 못했네. 그때 깨달았네. 동파 선생은 나를 일컬어 백거이의 시풍을 완벽하게 계승했고, 음악은 장적(張籍)을 능가했다고 칭찬하셨지만, 그것이 곧 목민관의 자격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일세.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병상에 누운 무구(無咎)를 만났네. 아마 생전에 마지막 만남이 아닐까 싶네.”

“아, 무구 선생을 이미 만나고 오셨군요.”

장뢰가 왔다는 소식에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제법 먹을 갈 줄 안다는 관리들이 모두 모여든 상황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장뢰의 말에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무구는 조보지(晁補之)를 가리킨다. 17살 때, 조보지가 아버지를 따라 항주에 왔다가 시를 지었는데 소식이 우연히 그것을 읽고 자신의 재능이 그만 못하다고 탄식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시에 관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리로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마치 당금의 황제인 휘종이 문학적 성과로 높은 평가를 얻지만, 정치는 엉망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룻밤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네. 애초에 우리는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려고 했을까? 문인의 길과 관리의 길이 이렇게나 다른 것을 백발이 되고서야 알았으니 참으로 우둔한 삶이 아닌가?”

노학사는 회한을 담고 있었다.

“이제야 장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무구와 웃었지.”

그것은 무슨 뜻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노학사는 나를 직시하며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건의 새로운 주인에게 여쭙고 싶소이다. 나와 무구는 관리로서 제일 철칙을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잡았소이다. 그러나 장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의 시작이라고 말했지요. 우리의 능력부족인지 아니면 장자의 그 말뜻 그대로인지 몰라도 분명히 관리 생활의 나는 시와 노래를 읊을 때의 내가 아니었소이다.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이까?”

정치인은 언제나 외친다. 백성을 국민을 사랑한다고.

나 역시 근본으로 돌아가면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생각이 조금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장자가 화두를 던진 것은 사랑한다고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짜 백성을 위한 일인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현대 정치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거에 나온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온전하게 국민에게 돌아오는 경우는 지극히 적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랑을 외치는 것은 명분, 또는 형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명분은 명분을 낳고, 형식은 형식을 낳는다. 말을 바꾸면 체계를 세운다고 볼 수도 있다. 체계는 울타리와 밖을 나누는 과정이고, 명분, 형식, 체계가 세워진 순간 그것을 지키기 위한 쪽과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믿는 쪽의 다툼이 시작된다.

즉, 국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의 행동이 수많은 사례를 통해 진실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장자가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이리라.

“재상 채경은 신법의 적용과 애민(愛民) 정신을 앞세웠지만, 곧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황제와 몇몇 대신들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했지요. 황제가 진귀한 돌, 여럿을 얻어 감상하는데 불과 일각도 걸리지 않는다면 그 여럿의 돌을 캐고 황궁으로 이송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백성이 동원됩니다. 이제는 그가 애민을 외쳐도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소수 선량한 관리의 말조차 백성은 믿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것을 줄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만 백성이 바라는 것은 실상 매우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또한, 제가 지키고 싶은 가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노학사 장뢰의 눈이 반짝였다.

“공정(公正)입니다. 어떠한 재물을 취할 때, 그것이 우리가 정한 양심을 위배할 때, 불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가는 사회가 옳은 것일 것입니다. 지금 조정은 어떠합니까? 황궁에 쓰이는 물품을 수제 명품으로 채우겠다며 공예국을 설치하고, 후궁을 뽑기 위해 후원작을, 진귀한 기암괴석을 채취하기 위해 화석강이 생겼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황제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습니까? 그저 나라를 위한다는 말로 그들을 부렸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불학 무식한 자들도 세상 이치는 다 압니다. 그것이 어찌 나라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참고 참아 생기는 것이 원성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은 더욱 쥐어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곳처럼 전국에서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북방에 대적을 두 곳이나 두고 있는 송이 지금 벌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 없는 망종이란 말입니다. 그러함으로 저는 경제와 사회의 공정을 이야기합니다. 경제와 사회 전반에 불공평하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정치는 흔들립니다. 정치가 흔들리면 경제와 사회가 더욱 흔들립니다. 위정자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공정은 백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위정자, 자신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허어…….”

장뢰는 장탄식을 했다.

“옛 민과 당은 변방의 군대는 군 중의 장이 우선이라 필요에 따라 왕의 명도 어길 수 있다고 했소. 그러나 지금의 송은 환관의 감독을 받아 현장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환관의 눈치만 보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족쇄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오. 응당 마땅한 질서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오. 내가 이곳으로 온 까닭이 바로 이와 같소. 그러하니 장군, 아니 양왕(洋王)의 말씀이 무구와 내 생각과 같소이다. 일찍이 동파 선생께서 양왕을 칭찬하셨다고 한 것이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소이다.”

나는 장뢰의 손을 잡았다. 잔뜩 주름진 손은 따듯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중용에서 이르길 천하는 구경(九經)으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라 했지요. 왕이 대신을 공경하면 대신은 아래 신하를 공경할 것이고, 아래 신하는 지방 관리를 공경할 것이고, 지방 관리는 백성을 공경할 것입니다. 그것이 공정의 시작입니다. 간신 고구가 황제의 눈을 흐리고, 암신 채경이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으며, 환관 동관이 대장군을 자처하며 병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이유는 황제가 황제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겁도 없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백성’이란 내부의 적을 만들었습니다. 외부의 적도 무서운 상황에 내부의 적까지 키웠으니 송이 오래가길 바라는 것은 무리지요. 개혁의 근본은 바른 인재를 구하는 것이고, 바른 인재들이 시대에 맞는 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파 선생이 일찍이 제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세상이 태평할 때는 중신의 말도 깃털처럼 가벼이 여겨진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범인의 말도 중요하게 들린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제가 중히 여길 지침과도 같습니다. 옳은 말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저에게 한 고조의 장량이나 당 태종의 위징 같은 자가 없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저 국정에 참여하는 신하들은 하나같이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수재들이거늘 어느 누가 현명한 군주에게 인정받길 싫어하거나 세상일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지금의 혼란은 폐단을 제거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할 방도를 천자가 선택하지 못하므로 야기되었습니다.”

장뢰는 내 손을 살포시 떨쳐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자 장상영이 깜짝 놀라 자신 역시 무릎을 꿇었다.

“지방관을 겪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진 재주를 써야 하는 곳이 따로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자 엉거주춤하며 지켜보고 있던 문신들마저 그와 같이 엎드리고 말았다.

“때로는 고루한 말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하던 바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노력은 하겠으나 제 지식이 세상을 모두 덮을 정도는 되지 않아 시비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언로를 지켜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진정으로 원하던 바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장뢰와 같은 눈높이였다.

“채경이 재상이 되고 첫 과거를 치렀는데 지공거 송연이 장원을 뽑지 않았습니다. 채경의 신법을 비판하는 절실하고 강직한 문장이 장원으로 꼽혔는데 이후 몰고 올 파장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실 단순합니다. 폐단을 구하고자 언로를 열었으면 그것을 막지 않고 가감 없이 보는 것입니다. 민은 열 가지 항목으로 관리를 선발했습니다. 아홉 가지 인성과 한 가지 재주를 보았지요. 반면 조나라를 세운 조조는 재주와 기량이 적당한지만 따졌을 뿐 그 인물의 인성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조조 생전에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대신들의 불만을 잠재웠으나 그가 사망하자 자신의 재주를 뽐내며 겸손하고 양보하는 도리를 모르는 신하들 간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사마의가 그러한 경우겠지요. 그러하오니.”

나는 장뢰에게 세 번의 절을 했다. 장뢰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선생께서 제 입과 귀가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관리의 표상이 되어 주십시오. 오늘날에 이르러 구경이 학문의 지식을 겨루고 문장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으나 옛 성현들이 설마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편찬을 하셨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이상적인 관리 선발은 문장의 아름다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덕행에 있다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사리사욕을 극복하며 공동체의 조화를 생각하는 사람이 제가 생각하는 관리의 상입니다.”

현대에서 공무원을 뽑는데 영어와 상식, 법률 조항을 묻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올바른 가치관, 국가관, 인간관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인문 교양도, 역사의식도, 인류애에 대한 통찰 없이 어떻게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직업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기실 사기업에 복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학은 젊어서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했고, 늙어서는 교육을 하기를 적극권장했다. 정치는 한 시대에 남지만, 교육은 만대에 남는다는 철학 때문이었다.

제왕을 교육해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는 생각도 바로 그런 마음가짐에서 출발했다.

“정치가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미래의 꿈을 만든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매우 훌륭했지만, 차츰 수단이 본뜻을 훼손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언로가 특권층에게만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북송, 고려 시대는 나에게 유리한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격론이 일었다는 신법, 구법 논쟁 때도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정치를 선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로 돌아온다.

같은 정치 체제에서도 흥망기와 쇠퇴기가 존재하는 이유.

올바른 제도는 국가에 꼭 필요하지만, 제도를 실천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내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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