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다들 감회에 젖어 있을 때, 이준이 잊고 있던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어찌하여 채구를 방면하는 조건에 포면 대인을 넣지 않았습니까?”
포면이 강주 옥사에 잡혀 있다고 했다. 채구는 살기 위해서 어떤 부탁이든 들어줘야 할 처지였고, 설사 포면을 풀어준다고 해도 나에게 향하는 순간 반역자가 될 것이니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흔쾌히 들어주었을 것이다.
“채구가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하느냐?”
“설마 일부러 그러셨다는 말입니까?”
“금군은 이미 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장수들은 더하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병사들의 목숨을 헌납해야 했다. 군기가 유지가 될 수 없지. 그러한 공포는 곧 천하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곳의 일을 수습하는 대로 나는 강주로 갈 생각이다. 두려움에 쐐기를 박는다.”
“허, 형님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엄청난 일들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저 가는 길에 저만 빼놓고 혼자 가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이준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근처에 듣던 사람들도 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대강의 상상만으로도 상궤(常軌)를 벗어난 행동이라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장청이 내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염초 같은 걸 말리라는 임무로 남으라고 명하신다면 저 그냥 도망치렵니다.”
주변은 가벼운 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날까지의 소식은 곧 천하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하북삼절의 일인이자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졌던 철대인 이탁이 사은의 지지와 진결을 얻은 역도와 팽팽하게 겨루던 중 무리 난입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몸을 가졌다고 알려진 그다. 전장에서 수백의 창칼을 받아내면서 기어이 적장의 목을 벤 전설이 어찌 그리 쉽게 죽을 수 있느냐며 믿지 못했지만, 남창에 도착한 금군들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알리며 전모가 드러났다.
이탁과 팽팽하게 겨룬 역도가 칠만의 대군을 종횡하여 채구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알려지고 마침내 채구의 수습으로도 뒷감당이 되지 않았을 때 민중은 숨죽여 환호했다.
민중에게 있어 새로운 전설의 출현은 언제나 흥분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항주 민심은 요동쳤다. 아직도 항우의 제단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 준비를 차근차근 펼쳐나갔다. 예전의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상적 준비를 장상영과 이소, 이강 등에게 맡겨두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장상영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이(程?)의 제자들이 대거 복건으로 밀려들었다.
정이는 휘종이 즉위하던 해에 사망한 유학자였는데 사마광이 한 수 접어줄 정도로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평가받았다. 그는 왕안석이나 소동파 등과는 뜻이 맞지 않아 당쟁을 겪기도 했는데 이후 정이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이가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다.
율가와 도학, 불학, 기존 유학, 신유학까지……. 그들이 열띤 토론을 거치며 나라의 사상을 제정하는 일은 참으로 볼만한 일이었다. 장수들은 그런 나를 보며 참으로 인내심이 강하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말이다.
“정이 선생께서 이르길 올바름에 ‘어떻게’라는 물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올바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즉 옳은 가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겠지요.”
갑론을박이 며칠 간 이어지자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그때 학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정이의 제자들이 보이던 반응은 참으로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정이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고 여기며 대번에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장상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장군, 아니지 이제 보위에 오르실 몸이니 전하라 불러도 무방하겠지. 전하께서 정이 대학사의 말을 우리에게 일부러 전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송이 처음 창건하던 때를 떠올려 보세. 태조의 곁에는 시대가 낳은 쟁쟁한 문인들이 저마다 식견을 뽐내며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꿈꾸었네.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고 바른 식견이었지. 그러나 지금 송은 어떠한가? 명분의 허례가 송을 그리 만들었네. 대신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종(祖宗)의 법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이용하니 원칙은 절멸에 가까웠지. 그러하니 무엇보다 나라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은 쟁의(爭議)가 적연(寂然)하고 지무(至無)한 것에 그 근본이 있다고 말한 정이의 주장을 옮겨 담고자 하네.”
정이는 자신의 유학론이 적연하여 지무한 것에 근본이 있다고 말했다. 이 시대 새로운 유학의 선두주자라는 자존심 때문에 줄곧 다른 이들과 소통의 부재를 겪었던 정이의 제자들은 장상영이 정이의 주장에 따를 것을 천명하자 이제야 자신들의 학문이 인정을 받았다며 좋아했다.
그때 장상영이 나에게 보냈던 눈빛은 참으로 장난꾸러기 같았다. 뛰어난 자는 문장에 담긴 뜻이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적연하여 지무하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던가? 지엽은 움직이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하나요, 천변만화하는 기후가 진정하면 곧 고요하고 조용함이 찾아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은 학문에 그대로 대입된다.
모든 학문을 하나로 합쳐내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필요한 곳에 적합한 학문을 사용하는 것도 중용이다.
그것은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학문이 주가 되느냐, 그 학문을 통해 평안함을 얻게 될 백성의 마음이 주가 되느냐?
정이 학파의 학자들이 내게 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물었다. 나는 정이의 생전 발언을 빌려 화답했다.
“왕은 있음(有)의 배후에 없으므로(無) 존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정이가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정이 학파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토의에 나서기 시작하자 사상 논의는 급진전하였다. 그런 것을 보면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가 옳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세운 원칙은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남의 원칙도 중요하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의 차이다. 이것을 이기고 지는가의 문제로 끌고 가면 문제 해결은 어렵다.
불학의 도리에 율학의 실무 관점으로 접근하면 될 일이 있고, 신유학의 도리에 불학의 실무를 접목해서 해결이 될 일도 있을 것이다. 그 적절한 선을 찾는 과정이 이제야 진정으로 시작된 것이다. 흔히들 새로움은 하늘 아래 없다, 모든 것이 기존 발상에서 출발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헌법과 비견되는 사상적 토대가 만들어지고, 법에 비견되는 실무 이론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거대한 담론에 참여하기 위해 천 리 길을 달려오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여서 처음엔 임시 조당(朝堂)에서 시작되었던 담론이 곧 조당 마당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백성 사이에서는 나라 이름을 뭐로 하느냐를 두고 높은 관심을 보였다.
장상영이 혹여 생각해둔 국명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심중에 담았던 이름을 말했다.
“양(洋)이라고 합시다.”
장상영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내가 개민왕의 업적을 재현하겠다고 했을 때, 민나라 아니 더 나가 민 제국의 법통까지도 이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껏 어떤 나라도 쓰지 않았던 양이란 국호를 입에 올리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물이 움직여도 하늘이 고요한 것처럼, 바다 역시 물줄기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사(事)와 리(理)는 궁극을 공유하고 미(微)와 현(顯)은 근원(根源)이 하나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민 제국의 태조가 학문의 모범을 보였다고 식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가 학문적으로 정말 뛰어나서가 아닐 것입니다. 학문을 통효(通曉) 했기 때문입니다. 양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장상영은 감탄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모은 후,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끔 전하의 식견은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한송백은 전하를 적룡이라 칭하며 능히 세상의 병폐를 불사를 거친 용이라고 말했는데 이럴 때면 전하는 천지의 도를 깨달은 군자 같습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웃어넘겼다.
내가 국호로 양을 선택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조야는 시끄러워졌다. 거부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저마다 자신의 해석을 선보이느라 시끄럽게 보였을 뿐이다.
양은 바다를 뜻하니 바다를 접한 복건에 가장 들어맞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바다만큼 넓은 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다.
“주군!”
나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오는 자가 있었으니 고려로 떠났던 요시치카였다. 그는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공적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속하가 빨리 당도하여 모시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대만 보이는 것을 보니 이소는 오지 않은 게로군.”
요시치카를 보낼 때부터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있었다. 이소가 나에게 올 것이란 마음과 외려 나를 위한다며 이자겸 곁에 남을 가능성이었다.
요시치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모께서는 주군이 자신의 마음을 짐작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과연 주군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서 품에서 하나의 편지를 꺼냈다. 발신인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이소가 보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화(梨花)가 우중(雨中)에 흩날렸다. 울며 잡지도 못하고 이별한 님, 그도 날 생각하는지, 밤비가 지나고 아침 새 울 때, 찾아오시려나.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요시치카를 따라 이곳에 왔으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과거의 이소였다면 나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매를 잃었을 때 다짐한 바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시간은 흘렀고, 약속은 희미해진 것인가? 결단코 그것은 아니었다. 나이를 먹고 생각이 많아졌다는 의미이리라.
시는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필체가 흔들렸다. 그러다 마음을 잡았는지 이어진 글은 단정했다.
-태자와 태사께서는 상공께옵서 상산사공(商山四公)이 되길 원하시나 이소는 세사(世思) 친영(親迎)을 기다리겠습니다.
짤막한 글귀였다. 그러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태자라면 숙종의 뒤를 이어 곧 보위에 오를 예종을 가리키는 것이고 태사라면 내가 일전에 만난 곽여가 맞을 것이다.
그들이 이소에게 상산사공을 언급했다면 이미 이소와 어떤 식으로든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 고조 시절, 상산사호(商山四皓)라는 네 명의 저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유방이 아무리 청해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다 유방이 태자(혜제, 惠帝)를 폐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장량이 상산사호를 청하여 태자를 돕게 했다. 유방은 그제야 태자를 폐할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곽여는 자신들과 내가 다른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겠지. 같은 길을 가는 한 상산사공의 자리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 그런데 이소는 고려로 돌아오기 위해 큰 숙제를 내걸었군. 세사 친영이라니…….’
두보는 자신의 시에서 문사(文思)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다. 깊은 문체와 생각을 이 단어로 비유한 것인데 시에서는 제왕의 어짐을 칭송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소는 세사(世思)라는 단어를 썼다. 직역하면 세상의 생각 정도가 되겠지만 두보의 표현이라면 세상을 꿰뚫는 생각, 그 생각으로 큰 업적을 이룬 것을 말한다.
친영이란 혼례 마지막 단계로서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아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의미하니 세사 친영이란 곧 금의환향과도 같다.
그런데 신부집이 그냥 신부집이던가? 당대의 세도가 이자겸이다.
“이자겸이 어떠한 방해도 할 수 없는 거인이 되어 돌아오라는 말이군. 나는 정말 욕심 많은 아내를 얻었다.”
내가 피식 웃자, 요시치카가 따라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