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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7화 (177/257)

00177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진중을 향해 가르니 주위로 마치 꿈결처럼 바람이 스쳤다.

아니 스친 것이 아니라 나를 쫓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래에는 그 하나하나가 사람의 숨결처럼 여겨졌다.

오로지 하나의 빛을 잡기 위해 몽환의 평원을 달리고 있는 내가 있었고, 뒤처져 있던 숨결 하나가 나를 앞서 가며 적을 갈랐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폭풍 같은 기세였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는다! 그럼에도, 천운이 따르지 않았으니 오추마는 여기까지로 구나!”

나 못지않은 거한은 슬픈 눈빛을 지으며 더는 달리지 않았다. 그것만 보자면 마치 나에게 일부러 길을 열어주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천하의 항우가 나를 위해 길을 열어준다고?’

진짜 항우인지 의심이 가시기 전에 다시 뒤에서 하나의 호흡이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반인보다 머리가 작고 길쭉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지나치며 잠시 훑는 데 마치 흉포한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창이 허공을 가르자 반경 안에 있던 금군들이 우후죽순 쓰러졌다. 항우의 기세가 패도라면 이번에 등장한 자는 날을 정성스럽게 가다듬은 명검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용맹과 지략이 하늘에 닿아 천하를 내 집처럼 활보했다. 한위(韓魏, 전국시대 한나라, 위나라)를 격파하고 24만을 죽였다. 장평(長平)에서 조군(趙軍) 40만을 죽였다.”

‘백기(白起)다!’

소리 내어 부르면 환상이 깨어질 것 같았다.

항우와 달리 그는 다시 한 번의 창술을 선보였다. 공격에 당한 자는 하나같이 치명적인 요해에 적중했다.

“아군이 그런 나를 두려워했다. 인화(人和)가 사라지니 천운이 멀어졌다.”

백기는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내가 지나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나 금군은 끝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저만치 보이는 빛 역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었다.

그러다 다시 나를 앞지르기 위한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좌우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얼굴 생김만으로 그들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명은 온화했고, 한 명은 몹시 오만해 보였다. 나를 스치자 온화해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무제께서 명하시길, 나라의 큰 근심인 흉노를 멸하라 하셨다. 이에 쌍검(雙劍)이 화답했다.”

‘위청(衛靑)과 곽거병(?去病)!’

곽거병이 앞장서 적을 쓸었고, 위청이 뒤를 안전하게 받쳤다. 한바탕 해일이 몰아친 것처럼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근목피(草根木皮)만이 남았다.

적들이 기세에 눌려 허겁지겁 밀려나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위청이 탄식하며 말했다.

“북해(바이칼호) 너머로 흉노를 몰아내는 대업을 완수했으나 그 틈을 선비가 비집었다. 황명을 완수한 것에 만족하여 그들을 방관한 결과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이어졌다.”

“천하의 그 누구도 말에 탄 나를 쫓지 못했고, 활 시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흉노도 선비도 내 앞에서는 사냥을 위한 금수(禽獸)였을 뿐! 오로지 천수(天壽)만이 유일한 대적자였다!”

곽거병은 여전히 오만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퉁명스럽게 위청의 말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는데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했다. 17세 어린 나이에 군문(軍門)에 입성하여 병사(病死)하는 24세까지 불과 7년간의 활약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의 성격과 행보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시킨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호흡의 수는 이제 두 명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나를 지나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백색 영웅건을 이마에 두르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붉은 안색의 장한……. 관우였다!

관우의 대도가 횡으로 가르며 전면의 적을 베어 갔다. 거대한 파도의 물결이 넘실대듯 그의 대도는 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넛의 군관도 목숨을 잃었다.

“천하를 얻기 위해 병사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형님이 물었다. 항우는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초패왕이 되었습니다. 형님과 아우와 함께라면 1만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이리 말했다.”

내가 관우의 곁을 지나치자 관우가 흐릿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자조했다.

“약관을 넘어 병(兵)과 함께한 지 30년,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고,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다. 안량을 잡기 위해 출병한 날도 그러했다. 내가 맹장은 될 수 있어도 명장이 될 수 없는 까닭을 그날 느꼈다. 오만함은 형님을 도와 왕의 패업을 이루는 것이 우선인 다음에 품었어야 하거늘…….”

관우를 스쳐 지나가자 뒤늦은 탄식이 이어졌다.

“범려, 손빈, 염파, 왕전, 백기, 조참, 주발, 이광, 곽거병, 이 중에 거론된 자 중 어느 하나 공으로 나에게 뒤처지는 자가 없다. 그러함에도 신이 되지 못했다. 나는 패업을 이루지 못하고 신이라 불리다니 그보다 서글픈 일이 어디 있을까?”

관우의 절절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앞서 등장했던 항우, 백기, 위청, 곽거병만 보더라도 관우보다 못하다고 평할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관우는 신으로 남았다. 관우의 자존심상 그것을 명예라 생각할까? 외려 지독한 고통일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호흡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가 치고 나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동안 그는 나와 나란히 달렸다.

무슨 뜻일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순간 꽉 잡고 있던 말 고삐를 놓아버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로구나.”

여포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손을 뻗어 내게 내밀었다. 나 역시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이 거칠다. 이제야 남자가 되었구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짐에도 여포는 껄껄 웃었다. 태연하게 칼로 쳐내자 나 역시 뒤질세라 일일이 쳐냈다.

“관우와 나는 성정도 실력도 닮았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달랐지.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내가 너를 만난 것, 그 하나의 차이가 최후를 갈랐다.”

나와 여포가 일제히 적에게 달려들었다. 위청과 곽거병이 일으켰던 해일을 넘어 거대한 폭풍처럼 적을 집어삼켰다. 나에게 이런 힘이 존재했는지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너의 용기(勇氣)를 항상 기억해라. 인(仁)이 살아 있고, 부조리를 꿰뚫으며, 옳음에 대한 확신을 모두에게 심어주는 용기, 그것이 바로 너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불신, 악의, 탐욕, 허위라는 이름의 적들! 역사만큼 오랜 전쟁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지 마라.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그 뒤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여포가 잡은 손을 떨쳤다. 점점 멀어지는 여포를 향해 나는 애써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여포는 껄껄 웃으며 자신이 할 말만 남겨 놓고 멀어져갔다.

한순간에 적들에게 고립된 상황이 벌어지자 적들은 악착같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병장기가 겹쳐지고 사람의 벽이 만들어졌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그때였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반가운 얼굴들이 적들을 걷어내며 나를 독려했다.

태사자, 육손, 여몽, 감녕, 허저, 서성, 진도, 주태, 반장…….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들이 내 앞길을 뚫었다. 그때 누군가 멍한 내 어깨를 쳤다. 고개를 돌리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앞에는 송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한,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러니……!”

송겸의 손이 내가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매섭게 후려쳤다. 말이 놀라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라! 영웅에게는 비단옷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저 멍청이에게 똑똑히 알려줘라.”

그러면서 송겸 자신도 창을 휘두르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용과 호랑이 수십이 사슴과 토끼를 상대로 일방적 몰이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길이 순식간에 열렸고, 빛이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살라딘은 철저한 위선을 통해서만이 정치의 선에 이른다고 했다. 그의 웅대한 지략과 관대함은 유럽까지 알려졌다. 그러나 살라딘 사후 일족들에 의해 제국은 다시 분할되었다.’

이제 앞을 가로막는 적은 열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고 칼을 들고 반항하는 것조차 꺼렸다. 애써 나와 칼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진로를 열어주고자 물러났다.

그중 충성심이 남다른 한 명은 내가 지나가는 틈을 노려 칼을 내질렀지만 눈치챈 나에게 목을 헌납하고 말았다.

“칼을 잡는 이유.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

이제 남은 것은 불안감으로 둘러싸인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꿈처럼 순간인 사람의 삶. 그러나 누구도 악몽을 꾸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세상의 왕들에게 고하고자 한다!”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저 멀리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고지가 아스라이 보일 정도였고, 나를 돕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패거리들도 그저 신형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어느새 무수히 많은 적을 단신으로 뚫고 채구의 머리에 칼끝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달아나는 채구를 쫓으며 달려온 것이 어느새 적 군영의 가장 막다른 곳이었다.

“귀신이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게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채구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진저리를 쳤다. 그는 내게서 애써 멀어지고 싶었지만, 칼끝이 그의 볼에 가벼운 상처를 내자 이내 풀죽은 모습으로 덜덜 떨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내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들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무기를 재빨리 바닥에 던지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제야 달아올랐던 긴장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자왕 리처드가 아파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단신으로 이슬람군을 공격했다. 살라딘이 그 광경을 보다 자신의 볼을 꼬집더니 이건 꿈이라고 했다. 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이슬람 종군 사가는 노르만 거인을 아무도 잡을 수 없었으며 다 죽을뻔했다고 기막힌 심정을 적었다. 그러나 사자왕 리처드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척준경이다. 1105년 2월에 벌어진 순창 전투에서 송군의 총지휘관, 채구를 단기로 사로잡는 위용을 보인다. 7만이라는 대병력을 상대로 얻어낸 믿을 수 없는 전과라 일부 사가들은 화포와 원군의 시기적절한 활약으로 말미암은 유격 전술의 승리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나 역시 유격 전술이 제대로 먹혀든 사례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이다. 적 진형을 가상으로 추정하고 일개인의 운동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돌파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를 계산해보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차라리 수천을 상대한 리처드의 경우가 더 현실적이다. -中略- [Genealogy of Warrior by 시오노 나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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