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6 (23) 천류불식(川流不息) =========================================================================
(23) 천류불식(川流不息)
참찬관일기(參贊官日記) 이준경 열전 中
조선 선조 13년(1580년)
임금께서 조회에서 말씀하시길,
“사졸(士卒)을 잘 선택하는 것이 장수를 잘 선택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안정된 북쪽과 동쪽과 비교하면 서쪽과 남쪽에 출몰하는 왜구들로 걱정이 크다. 이에 특별히 사람을 잘 뽑아 곤외(?外)를 맡겨야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이에 사직을 앞둔 영의정 이준경이 답했다.
“왜인들이 우리를 능멸하는 것은 변장(邊將, 장수)의 탐욕과 무능이 큽니다. 굴욕을 달갑게 여기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백성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변방의 백성이 원한을 품고 한 사람도 조정을 위하지 않으며, 외려 왜인과 마음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 말이 지당하다. 남쪽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는 백성이 왜인을 만나 피살되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고 들었다. 어찌해야 왜인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준경이 답했다.
“수사(水使, 수군절도사)와 수령(守令) 등의 관원이 신경을 써서 요해처(要害處)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주야로 왜인을 감시한다면 어찌 왜인이 마음대로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왜인들의 배는 작고 빨라 지금까지의 관선으로는 쉬이 쫓지 못했으나 장인들의 노력으로 비거도선(鼻居刀船, 거룻배 모양의 쾌속선)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수령을 잘 선정한 뒤에야 왜인으로부터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영의정의 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신들이 새로운 경상수사를 천거했으나 영의정이 모두 기각하였다. 참찬관(參贊官) 류성룡이 대신들을 대신해 영의정의 의중을 묻자, 의외의 인물이 나왔다.
“나는 새로운 경상수사로 이순신을 지목하고자 하오.”
그 이름을 듣고 반대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곧 사직을 앞둔 팔순 고령의 영의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순신이 경상수사가 되었다.
그해 이준경의 사직이 윤허 되었다.
노환으로 고향인 광주(廣州)까지 가지 못하고 한성에 머문다. 임금께서 시의와 의녀를 보냈다.
충청도에서 군관으로 복무하던 이순신이 상경하여 참찬관 류성룡과 함께 이준경을 접견했다. 이는 이준경의 뜻이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했을 때, 그것은 순리가 아니라 하여 끝끝내 거부하자 미움을 산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익이 공을 세울 수 없는 충청도로 경을 파견한 것이고……. 그곳에서도 뚜렷한 원리원칙 때문에 절도사의 사행(私行)을 조정에 보고하고자 했으나 장계를 받은 사졸(士卒)이 절도사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없는 사람 신세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율곡 이이가 그런 자네를 기특하게 여겨 가문의 어른(덕수 이씨)으로서 그대를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그가 이조판서임을 들어 지금은 사사로이 만날 때가 아니라고 전했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그대를 경상수사에 놓으려는 이유다. 비록 이 몸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왜적을 방비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것이 있으니 오직 왜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라.”
이어 참찬관인 류성룡에게도 당부하기를 능히 재상이 될 수 있는 재목이니 앞으로도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며 이순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 날, 영의정 이준경이 임종했다.
세인들은 근래의 영상 중에 업적이 가장 많았다고 평했다. 시호는 충정(忠正)으로 증시(贈諡, 왕이 시호를 내림)하고 임금이 직접 배향(配享)하였다.
임종할 때, 유차(遺箚, 유언)가 있었다.
-구천에서 신 이준경은 세 가지 조목을 전하께서 살펴주시길 바라옵나이다.
첫째, 제왕의 임무는 함양(涵養)에 있습니다. 전하의 학문은 치지(致知, 지식)의 공부는 부족하지 않다 여기지만 불민하게도 함양의 공부가 미치지 못하다 여깁니다. 언사(言辭)가 거칠고, 쉽게 마음을 보입니다. 너그럽고 겸손한 기상을 세우소서.
둘째,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 위의(威儀, 기품)가 있어야 합니다. 현성(賢聖)인 체 자존(自尊) 하는 모습은 아랫사람에게 마땅치 않습니다. 신하가 임금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옵고, 온화(穩話)로 대해주소서.
셋째, 붕당(朋黨)의 사론(私論)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잘못한 과실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서로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검속(檢束) 한다든가 책을 읽는 데에 힘쓰지 않으면서 고담대언(高談大言, 허세)으로 친구나 사귀는 자를 훌륭하게 여김으로써 마침내 허위(虛僞)의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군자는 공박(攻駁, 지적) 당하더라도 위의(威儀)를 지키고, 소인은 남이 자신을 공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공평하게 보시어 폐단을 제거하는데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착란 되어 마음속의 말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으로 유차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에 임금께서 사관에게 말하셨다.
“공은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여 죽는 날에도 이런 유언을 남겼으니 참으로 옛 직신(直臣)과 같다. 심의겸(서인의 당수)의 당이 이 유언을 지적하며 무미건조한 차자(箚子, 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상소문)라고 소를 올려 배척하기까지 하니 참으로 군자의 직언은 소인이 싫어하는 것이다.”
이에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두 달 뒤,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 급한 장계)하였다.
-정공도감(正供都監)의 취지를 어지럽히는 사족(士族)들이 도성 족벌(族閥)의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이니 굽어살펴 방안을 하교하여 주옵소서.
이에 임금께서 크게 노하였다.
“정공도감은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해 이준경이 제안한 것이다. 과거의 민폐를 구제하기 위해 재주와 학식, 덕망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세관(稅官)을 맡기고자 한 것인데 그로 말미암아 조세는 늘었고, 백성의 삶이 이로워졌다. 그런데 다시 옛 폐단을 범하려고 하니 관련자는 직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파직하고 귀양을 보내겠다.”
이에 당파를 막론하고 관련자가 처벌되니 수십 명에 이르렀다.
*선조 대왕 지문(誌文) 中
……영의정 이준경이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명종의 부름을 받았다. 세자가 없어 여러 조카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명종께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임금과 아비 중 누가 중한가?’라는 질문을 각 조카에게 던졌을 때,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임금과 아비는 비록 다르나, 충효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명종께서 기특하게 여기셨던바, 대왕을 후사로 삼았다. 대왕께서는 전국의 명유(名儒)를 적극 돈유(敦諭, 가르침을 청함)하여 이황, 이준경, 이이 등을 맞아들였다. 정공도감이 세워졌고, 왜구를 막기 위한 대책들이 시행되었다. 나라가 20년간 태평성대를 누렸다.
만력 19년(선조 24년, 1591)에 왜 장군, 평수길이 사신을 보내 중국을 침략하려 하니 길을 비켜달라고 위협했다. 그 말투가 몹시 거만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해인 임진년에 왜적이 왜국의 병사를 모두 끌고 왔다.
왜적은 우리나라가 누대(累代)를 태평하게 지내어 백성이 전쟁을 모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 영상 이준경의 혜안으로 발탁되어 10년 넘도록 훌륭하게 경상수사의 역(役)을 치러낸 이순신이 동래 앞바다에서 적선 수천 척을 침몰시켰다.
왜선보다 빠른 비거도선과 화포로 무장한 판옥선, 마치 항우나 관우를 연상시키는 선봉, 거북선이 조화를 이루니 조총이라는 이병(異兵)을 가진 왜적들도 당해내지를 못했다. 그 와중에 동래성에 다다른 왜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강토를 사수(死守)해야 한다는 관민의 합심으로 격퇴되었다.
왜적 포로는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인근의 모든 백성이 오랏줄을 들고 지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왜 장군, 평수길이 사신을 보내 부모의 나라에 불경을 저지르게 되었으니 이는 자신의 안목이 부족함이라며 포로를 되돌려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대왕께서 이르길, 대마도와 구주는 옛 고려의 땅이니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평수길이 이에 응했다. 이후 나라가 태평하였다.
대왕께서 무신년(1608년)에 승하하니 수(壽)는 57이었고 재위(在位)한 지 41년이었다.
대왕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공검(恭儉)하고 인자하며 효성이 뛰어났다. 풍화(風化)를 숭상하고 절의를 중히 여겼으며, 염치(廉恥)를 독려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였다. 백성의 목숨을 애석하게 여겨 일찍이 망녕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비록 곤충과 같은 미물(微物)이라도 죽이기를 경계하였으며, 매번 옥사(獄事)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측은히 여겨 살려주는 방도를 구하되 삼가 법을 지키고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니면 부산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을 예우하여 비록 혹 과격하더라도 늘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대왕의 학문은 사명(辭命)을 억양(抑揚)할 수 있었고 무략(武略)은 환란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며 총명은 어진 자와 간사한 자를 분별할 수 있어, 초년(初年)의 청명(淸明)한 정치는 거의 천재 일시(天載一時)였다. 백성이 지금까지 칭송하여 마지않는 이유다.
대왕께서 유차를 남기시는 자리에서 ‘하성군 시절부터 단 매를 아끼지 않았던 은사(恩師)이자, 국정의 영원한 동반자였던 이준경에게 모든 공이 있다.’라며 겸양을 보이셨으니 이는 대저 대왕의 어진 천성일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고려 연방(The Commonwealth of Korea)에서 준경이란 이름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이다. 그것은 재미있게도 시대별로 기이하리만치 뛰어난 업적의 주인공들이 준경이란 이름을 가졌던 탓이다. 북중민국(北中民國, Republic of North China)과 남양 자치령(Dominion of South Ocean)이 서로 자국의 인물이라며 주장하는 고대 초나라의 전설적인 승상이자 민 제국 창건자, 이준경,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명재상 이준경, 재미있게도 남양 자치령의 건국자이자 서양사에 큰 파문을 일으킨 척준경도 있다. 특히 척준경은 로마와 민 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정당한 전쟁(just war)이론을 현실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정당한 전쟁의 기원을 논하자면 저 아득한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도 능히 들어갈 수 있으나 이는 신화의 영역이니 현실적인 부분에선 논외로 두기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척준경의 전쟁 원칙을 스콜라 철학과 연동하여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 원칙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저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년~1971년)의 하바드대 강연 中]
말의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채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 채구는 수레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수레를 가볍게 만들고자 했던 것인지 채구는 애첩으로 보이는 여인을 발로 차서 수레 밑으로 밀쳤다. 황망한 일을 당한 여인이 상황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을 때는 비명도 함께였다.
채구를 호위하기 위해 보기(步騎)가 겹겹이 에워싸면서 그대로 밟혀 버린 것이다.
놀랍지도 않았다. 역사 속에서 흔히 일어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식을 버리고 마누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유방과 유비의 사례가 있지 않던가.
수레 속도에 점차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일시적으로 우리의 기세가 오르기는 했지만,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였다.
이번이 아니면 채구는 잔뜩 겁을 먹고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악착같이 소모전으로 가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때였다.
굉음과 함께 내 머리를 넘어 여러 발의 화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고지를 향해 눈길이 갔다. 그곳에서는 하나같이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달리라는 뜻이었다.
화포가 다시 발사되었다.
말들이 놀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밀집된 대형에 떨어진 화탄은 많은 사상자와 함께 공백지를 만들어냈다. 채구 탄 수레 역시 말들이 놀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나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탁, 그대는 내게 무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그대는 잘못 알고 있었다. 권력과 이익의 단맛에 취해 자긍심을 잃어버린 무인은 더는 진정한 무인도 진정한 무장도 될 수 없다. 그저 무간(武姦)일 뿐이다. 무인의 정당함은 일대일로 겨룬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식의 정당함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를 무를 통해 관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를 수련하는 것이 좋아서, 또는 그것을 통해 도를 깨닫기 위해서라면 심산유곡의 구도자라 할 수 있다. 그럼 통상적인 무인이란 어떤 경우에 칭할 수 있는가?
사회에 나와 무로서 영향을 끼치는 이를 말한다. 누구도 해악을 피는 이를 무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불한당, 무뢰한, 불량배, 깡패 같은 저속어로 표현할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