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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5화 (175/257)

00175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표정을 봐서는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몸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사람이라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반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이탁은 달랐다.

어깨가 부러진 쪽, 즉, 내 가슴 쪽 손에 자신의 남은 손을 덮었다. 그리고 강하게 힘을 주었다. 통증이 밀려들었고,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팔을 내주었다.

손바닥으로 서로 마주 잡았다면 버틸 수 있었겠지만, 손등을 손바닥으로 잡고 힘을 주면 힘에 대항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임이 순간적으로 풀리자 이탁은 발로 내 가슴을 밀치고 재빨리 일어섰다. 나 역시 왼손등을 어루만지며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퇴물들의 진결(眞結)이 이것인가?”

이탁은 왼손을 오른쪽 어깨로 가져가며 말했다.

잠시 후 악 다문 그의 표정에 맞춰 뼈가 짧지만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보며 순간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승리감에 도취되는 바람에 완벽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팔을 꺾으면서 일시적으로 관절이 변성(變成)되었을 때, 후속 기술을 빠르게 가져갔어야 했다.

그 짧은 도취 사이에 이탁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고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이제 아까와 같은 기술은 다시 써먹기 어려울 것이다.

이탁은 내가 질문에 답하지 않자 자신의 질문에 수긍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말투가 그러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문장을 들었는데 공격 형태가 확연히 바뀐 것은 진결의 영향이겠지.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아무리 뼈를 끼워 맞췄다고 해도 임시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드물지는 않은지 이탁은 더욱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내가 관절 기술을 펼칠만한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이것이 소림의 저력인가?’

타격 기술에 중점을 두다 보면 관절 기술에 뜻밖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탁은 혹독한 수련과정과 실전을 통해 한 번 겪은 기술들에 대한 대처를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이 정도이니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자라는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나는 기회를 노렸다.

전개가 치열해지자 잠시 소매 깃을 잡을 기회가 왔고, 나는 강하게 끌어당겨 순식간에 이탁의 목을 오른팔로 감쌌다. 오른손이 왼손과 단단히 결합 되면서 힘이 실리자 이탁의 상체가 인사를 하는 것처럼 굽혀졌다.

이른바 헤드락 기술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방심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즉시 그의 목을 비틀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때 내 등 뒤로 이탁의 왼손이 둘리더니 내 왼팔을 잡았다. 그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고, 나 역시 버티기 위해 팔에 힘을 가득 넣었다. 버텨서 목을 비틀기만 하면 상황은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탁의 행동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손을 내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어 오른쪽 허벅지를 잡더니 쌀가마니를 던지듯 허공으로 폈다. 한쪽 다리가 들리자 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며 버티려고 했지만, 이탁은 중심 잡기를 포기한 듯 나를 밀며 넘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넘어지면서 이탁이 말했다.

“부둥켜 조이는 것은 어린 시절 놀이였다. 다 큰 성인이 체면도 모르고 그것을 쓴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을 뿐, 내가 진정으로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바닥에 완전히 넘어지자 이탁은 내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내 머리 쪽으로 완전히 밀기 시작했다. 발을 땅에 대고 마치 100m 달리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자세로 나를 밀자 마땅한 지지가 없었던 나는 몸이 굽혀졌다.

나는 내심 ‘젠장’을 외치며 이탁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그러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힘이 강하게 들어가지를 않았다. 오로지 상체의 근력으로 승부를 봐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때, 이탁은 나를 밀던 것을 포기하고 재빨리 몸을 반대로 돌렸다. 나는 관성으로 살짝 몸이 돌고 있었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왼손등이 내 목을 때렸다.

일반인이라면 기절할 수 있는 과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사이 이탁은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던 내 팔을 벗겨 내고 재빨리 일어섰다.

나는 자세를 잡고 일어서면서 이탁의 반응을 빠르게 복기했다. 생각해보니 주짓수에서 헤드락을 걸었을 때 탈출 방법으로 권장하는 기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라면 그의 전투 본능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아직도 끝내지 못한 것인가?”

병사들이 썰물처럼 갈라지더니 기병들의 호위를 받는 호화로운 수레가 등장했다.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자는 상당히 젊어 보였는데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미녀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채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곳에서 이탁에게 함부로 굴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를 비웃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온 것인가?”

이탁의 말투도 곱지 않았다. 이탁의 주군은 동관이었고, 공적 역시 적지 않아 채구가 감히 하대할 상대는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후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말투만 보자면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지경이었다.

채구는 이탁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탁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 다시 나에게 집중했다.

“여흥이 길었다. 이제 끝내야겠구나.”

“하긴 여흥치고는 너무 길었지.”

나는 채구의 행동을 똑같이 흉내 냈다. 채구는 박장대소했고, 이탁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이탁이 나에게 쇄도하자 나는 뒤로 물러났다. 계속 물러나자 어느새 나를 응원하는 패거리들과 접촉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대체 무슨 수작이냐! 아까부터 네놈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무인이라고 부르기가 참으로 민망하고 하찮구나.”

자신이 덤벼들면 내가 호응하리라 여겼던 이탁은 벌컥 화를 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어리둥절한 산적 패거리 중 두 명의 칼을 뺏어 들었다.

이탁은 그런 나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하나로 부족하니 두 개를 들겠다는 건가?”

“나도 잡고 싶지 않았다.”

다시없는 기회가 왔다. 지금의 기회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목적, 그 자체에만 충실해야 했다.

“너를 죽이고, 채구까지 잡으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뭣이!”

이탁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모두 무기를 쥐어라. 한바탕 놀아보자!”

내가 뛰기 시작하자 어리둥절하던 패거리들은 이내 그 외침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신이 나서 돌격을 시작했다. 선두에는 동평과 이준, 사대강 패거리들이 있었다.

“너, 너 이놈! 감히 무인의 결투를 이렇게 망쳐!”

이탁이 길길이 날뛰며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동평! 이준!”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내가 부를 것을 예측했는지 이탁의 좌우에서 창과 칼로 공격해 들어갔다.

“컥!”

이탁은 불신, 원망, 억울함이 깃든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공격을 막는 그 찰나, 나는 정면에서 쇄도했고, 쌍칼로 가슴을 꿰뚫었다.

“너는 자신을 너무 믿었다. 무턱대고 나를 쫓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허무할 수도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은이 진결을 읊는 순간, 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 왜?”

이탁의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삼은은 자신들이 나타난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자신들의 손으로 키워볼 후기지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능가하는 강남 무인의 출현이었다. 그들의 심득(心得)은 심득 자체에 뜻이 있다기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자신들이 지닌 모든 명분을 물려준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채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탁을 무슨 수를 써서든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삼은이 나타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이 나름의 심득을 읊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4년 출시되었던 이연걸 주연의 의천도룡기라는 영화였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삼풍은 장무기에게 즉석에서 태극권을 전수하는 장면이 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오직 장무기만이 오의(奧義)를 깨닫고 적들을 물리친다.

나는 그 장면을 나이가 들어 다시 보면서 혹시 장삼풍의 그러한 행동이 장무기에게 명분을 실어주기 위한 행동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극권으로 적을 물리친 이상 장무기는 누가 뭐래도 무당파와의 연관성을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그럼 장무기는 온전히 태극권으로만 적을 물리친 것일까? 그전에도 이미 장무기는 강했다. 그저 기연 같은 것으로 그 강함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는 무예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건 지금의 나와 견주어도 별다를 것이 없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입을 빌려 삼은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후인이 바로 나라고 선포한 것과 같았다. 자신들을 공경하고 지지하던 자들에게 나에게 힘을 몰아 달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런!”

이탁은 눈을 부릅뜬 채로 절명했다.

이탁의 죽음을 듣는 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세 명의 기습적인 공격을 막지 못해 죽었다고 여길까? 아니면 고작 세 명을 막지 못하고 죽었다고 할까? 그중 한 명이 근 반 시진을 이탁과 팽팽하게 겨룬 자라고 한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한 마디도 회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채구가 제 발로 나타난 이상, 나는 무조건 그를 잡을 것이다.’

금군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반 시진 이상 대련이 진행되자 초반의 흥미진진함도 잊고 지루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던 차에 갑자기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어찌해야 좋을지 일제히 채구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채구 역시 넋이 나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탁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쌍칼을 날개처럼 펴며 채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과거에 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진안(陳安)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의 입에서 누구와 닮고 싶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로구나. 진안이라 하면 급사(給事) 진안(陳安)을 가리키는 것이렷다.

-그렇습니다. 설사 아군이 예상치 못한 일로 주군이 쫓겨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저는 기꺼이 두 자루의 칼을 잡겠습니다.

진(晋)의 하간왕(河閒王) 사마옹(司馬?)이 관중(關中)에서 패하여 도주할 시기가 있었다. 그러자 수하로 있던 급사(給事) 진안(陳安)이 7척(尺) 쌍칼을 들고 붉은 말에 올라타 추격군을 휘저으니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쓰러졌다고 한다. 패전의 암울한 기운이 삽시간에 가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허저, 오늘 내가 진안이 되어야 할 것 같네.”

가장 먼저 보이는 기병을 공격하여 말을 빼앗았다. 삽시간에 올라타자 채구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공격을 외쳤다. 그러면서 자신은 수레를 돌려 도망갈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앞뒤로 기병에 둘러싸여 있었고, 좌우는 보병들이 밀집해 있었다.

나는 북해에서 여포가 원담을 잡기 위해 달렸던 광경을 떠올렸다. 질풍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호쾌하게 치달렸던 그 상황을 내가 재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삐를 잡고 말을 안정시켜야 했다.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았고, 왼쪽 겨드랑이에 칼 하나를 낀 다음, 왼손에 남은 칼을 부여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채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64명이다. 이제 목숨 값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관들이 금군을 독려하고 있었으나 내가 말을 달리며 소리치자 일부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병사들까지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곁에 있던 군관이 사로잡혀 그 목숨 값으로 자신들이 지목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말이 안정을 되찾고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나는 고삐에서 손을 놓고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칼을 오른손에 잡았다.

그리고 질주를 시작했다.

몸을 비틀며 좌검이 오른쪽으로 접근하던 기병을 벴고, 우검은 뒤에서 접근하는 적을 쳤다. 우검이 왼편으로 돌면, 좌검은 뒤의 적을 쳤다. 좌검이 오른편을 방어할 때면, 우검은 왼편을 방어했다. 그렇게 뒤를 쫓는 자들이 잠시 없을 때면 힘껏 말을 독려한 후 양팔을 활짝 벌려 앞으로 치고 나갔다.

“화살을 쏴라! 화살을 쏘란 말이다!”

“그럼 병사들도 맞습니다.”

“지금 병사가 중요한가! 내가 중요한가! 당장 쏴라!”

가까워질수록 채구의 초조함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채구의 재촉에 못 이긴 군관이 마침내 명령을 내렸고, 내 주위로 화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포는 장포를 두른 후, 펄럭이며 화살을 튕겨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나에게는 장포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를 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나와 같은 조건에서 싸운 자가 이미 있었다.

-당서(唐書)에 배민(裵旻)이 동부우문씨(東部宇文氏)  부족, 해(奚)에게 포위되자 말 위에 서서 칼춤을 추었는데,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들었으나 모두 칼로 막아 동강 냈다.

채구의 안색이 점점 시퍼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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