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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4화 (174/257)

00174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그러자 이탁은 불쾌함을 넘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정색한 얼굴로 나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사실 이탁이나 나나 기술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현란한 기술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체력과 근력에 의존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나한 18수가 폭풍처럼 펼쳐졌다. 그 파괴력은 가히 바위를 쪼갤 정도의 기세였다.

대저 고수들이라 하면 초식을 현란하게 다룰 줄 안다고 하는데 그런 자들은 대부분 연무에 능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탁 같은 이는 철저한 실전 무예였다. 누군가를 죽이고 제압하는 방법만을 수련해왔다. 만약 심약한 사람이 나한 18수의 정수를 얻었다고 해도 그는 고작 3류 무사에 머물렀을 것이다.

내가 수벽타로 그의 나한 18수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누군가에게 수벽타는 간단한 호신술에 불과하겠지만 내 힘과 속도가 수벽타에 더해진 순간, 수벽타는 더는 일반의 수벽타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매서운 공방이 연이어 펼쳐졌다. 이탁의 타격에 팔이 부어올랐지만 나는 이탁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 받으면 하나를 주는 싸움 형태가 이어졌다. 나나 이탁이나 맷집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맷집이 더 단단한지는 곧 결판이 날 것이다.

그때, 뒤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싸우는 도중에 힐끔 보니 노도사(老道士), 청담불출이었다.

“제천대성과 우마왕이 서로 겨루는 형상이로다. 우마왕은 제천대성보다 힘이나 체력에서 근소하게 앞섰으나 민첩함에서 밀려 사흘 밤낮을 싸워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천봉원수(저팔계)가 제천대성을 돕기 위해 끼어들었고, 오방게체(五方揭諦), 육정육갑(六丁六甲), 이랑진군(二郞眞君), 나타태자(??太子)까지 가세하자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친다. 그래도 쫓아오는 신들을 상대로 본신(本身)인 거대한 소로 변해 겁을 주었는데, 제천대성이 이에 뒤질세라 삼두육비의 거인으로 변모하여 기를 꺾었다. 그리하여, 뭇 요괴 중에 가장 강한 우마왕이 사로잡히자 상제와 여래께서 제천대성을 칭찬하며 투전승불(鬪戰勝佛)이란 명호를 내렸다. 싸움을 잘하여 승리를 얻은 부처라는 말에 제천대성이 즐거워하자, 여래께서 말씀하시길, 백만의 요괴(妖怪),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대요괴(大妖怪)와 싸워 이겨 명호를 내린 것이 아니라 잔납(원숭이)이라면 본능처럼 지니고 있는 분주함과 마음속 잡념, 망상과 싸워서 이겨낸 것을 칭찬한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부처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스스로 얻었으니 이는 홀로 심검(尋檢)을 깨달은 것과 같다고도 했다. 대저 심검이란 무엇인가? 지혜의 칼로 번뇌를 끊는다는 뜻이다. 무지와 무능을 타파하여 스스로 깨달은 자가 바로 투전승불이란 뜻이다.”

심오한 이야기였다. 그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아까 의심과 내면의 대화와 연결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과도 참으로 절묘했다.

아까 어쩌면 무협 소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화입마가 나에게 찾아온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다른 무림인들과 다르게 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주화입마가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설사 주화입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면의 고찰이 그 과정과 비슷하다면 삼 인의 은자와 이탁은 무인의 처지에서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청담불출은 상황에 빗댄 조언을 내린 것이 아닐까?

빗댄 예제도 참으로 절묘했다. 손오공과 우마왕의 싸움은 서유기 내에서도 흥미진진한 편이라 나 역시 재미있게 봤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손오공의 기원이라고 알려졌었고, 마침 우마왕과도 비슷한 이탁과 나는 겨루고 있다.

이탁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누르락붉으락했다. 그러나 분노를 바로 청담불출에게 돌리지 않았다. 나를 꺾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탁은 가벼운 심호흡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것을 보면 심성과 다르게 확실히 남다른 무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다시 이탁과 나의 박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박투가 시작될 것을 기다렸던 것인지 청담불출의 일장 감상에 이어 세한송백의 걸걸한 음성이 이어졌다.

“제천대성이 우마왕을 꺾고 투전승불의 영예를 얻었으나 조력자들의 도움이 컸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바, 나 역시 미력하나마 그 예를 따르고자 하노라.”

그러면서 그의 입에서 문장들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장지구(天長地久) 천지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 고능장생(故能長生)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비이기무사야(非以其無私耶) 고능성기사(故能成其私).”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되다. 천지가 늘 그러하고, 또 변함없이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살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써 능히 오래 살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성인은 그 존재를 뒤로하나, 존재를 앞에 두게 되는 것과 같다. 몸이 밖에 물러나 있는 것이 그 몸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 곧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사로움을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도덕경에 흔히 나오는 문구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탁의 반응이 거셌다. 겨루면서 말할 여유도 없거늘 애써 비집고 나온 그의 놀람은 틈을 만들었다. 내가 그의 가슴에 팔꿈치를 후려치자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이탁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세한송백의 내기(內氣)가 수진경(修眞經)에서 비롯된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은거를 선택한 이유도 있었겠지. 이제 모든 비전을 만천하에 공개할 셈이라도 든 것인가? 그 비전이 이놈에게만 온전하게 갈 것으로 생각했다면 망상이라고 해두지.”

나는 수진경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주변이 제법 웅성거리면서 세한송백이 낭송한 문구를 외우려고 애쓰는 것을 보니 평범치 않은 내력이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문구를 아무리 되돌려 생각해도 도덕경에 적힌 것 그 자체였다.

보통 무협 소설을 보면 문구에서 오묘하게 숨겨진 혈도의 흐름을 읽는다는 내용이 왕왕 있었는데 내가 그런 쪽으로 지식이 밝지 못해 생긴 일일지도 몰랐다.

세한송백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검선(여동빈)께서 수진경을 세상에 내보내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광풍이 불었지만, 곧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도덕경을 풀이해놓은 것에 불과하자 다들 진짜가 아니라며 정말 진짜는 따로 있으리라고 헤맸소이다. 그러나 수진경은 정말 진짜였소. 나의 내기가 수진경에서 근원 되었다고 전해진 것은 무도인의 마음가짐, 아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부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오. 대저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믿을 수 없다! 검선이 흔하디흔한 도덕경 구절을 애써 적어 수진경이라 이름 붙일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닦을 수(修), 참 진(眞). 이미 검선께서는 제목으로 목적을 쉽게 알려 주셨는데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은 욕심에 눈먼 자들뿐이었소이다. 내 특별히 수진경의 서문에 무어라 적혀 있는지 알려 드리리다.”

세한송백은 진중한 표정으로 한 자 한 자를 천천히 읊었다.

“참됨을 아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큰일이며,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도를 배우지 아니하고도 즉시 도를 이루고자 하고, 사람의 길을 배우지 아니하고 곧바로 신선이 되고자 하니 참됨을 아는 자들이 적은 이유이다……. 이것은 무예에도 해당하오이다. 무예의 본질을 모르는 자가 어찌 무예로 천하제일에 오를 수 있겠소이까?”

이탁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향한 혹독한 비난이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 반드시 다 죽여준다!”

이탁의 공세에 방어가 아주 없어졌다. 오로지 공격 일변도였다. 나는 계속해서 공격을 쳐냈다. 공격하고 싶었지만, 이탁은 전력을 다하는지 도무지 손을 뻗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공격이 먹히든지 그전에 제풀에 지치든지 둘 중 한 가지 상황만이 남게 되었다.

계속된 격전으로 내 몸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탁의 얼굴에도 땀이 맺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도 한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오늘 한 마디씩 다 남기기로 작정한 것인지 마지막으로 동산고와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고우들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는 항시 참됨을 갈구하며 준비된 자뿐일 터, 비전이라 불리지만 비전이 아닌 까닭이 여기 있소.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왔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지요. 그런 기회가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을 보면 매양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안 오느냐며 불평만 늘어놓지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소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우리가 한 말은 잠시 술자리에서 회자할 것이고, 곧 자신들과 맞지 않는 뜬구름이라며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겠지요. ……부이수련지사(夫以修鍊之士) 부지수화현묘지리(不知水火玄妙之理) 오행생화지도(五行生化之道) 칙도시장점아희이(則徒是粧點兒?耳), 심약부동(心若不動) 우수방임(又須放任) 여차칙관급득소(如此則寬急得所) 자항조적(自恒調適) 제이부착(制而不着) 방이부동(放而不動) 처훤무오(處喧無惡)  섭사무뇌자차시진정(涉事無惱者此是眞定)  부이섭사무뇌(不以涉事無惱)…….”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극한 대립 속에서 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은자들의 충고는 귀에 쏙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었고,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수련하는 자는 수화의 현묘한 이치와 오행의 변화로 생기는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낱 아이의 놀이와 같다.

마치 노래에 맞춰 몸이 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동산고와의 문구에 몸과 호흡이 일체가 되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바닥이 이탁의 한쪽의 어깨를 밀었고 그 반동으로 반대쪽 어깨가 내 쪽으로 쏠리자 나는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이제부터 보여줄 기술은 아무리 많은 경험이 있어도 이탁이 절대 보지 못했을 기술이었다. 만약 다수와 겨루는 것이었다면 전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오로지 이탁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갑자기 떠오른 기술이기도 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놓아두어라. 마음은 너그럽고 급함을 얻어 스스로 맞추니, 마음을 제재하면 멀어지고, 방심하면 움직이지 않으며, 번잡함에도 고요를 유지한다.

단단하게 팔을 엮자 이탁은 뿌리치려 했다. 나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무릎 차기를 시도했다. 그러자 이탁은 배를 외려 내 무릎 쪽으로 붙여 버렸다. 타격할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내 무릎이 그의 배에 딱 달라붙은 형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까지가 내 노림수였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이 흔들려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이치다.

나는 무릎을 축으로 삼고 엮인 팔을 지렛대로 삼아 몸을 위아래로 회전시켰다. 이탁은 전혀 달라진 공격 양상에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제부터 잠시의 판단 지연이 그에게 지옥을 보여줄 것이다.

오른발이 이탁의 목을 삽시간에 휘감았고 그와 동시에 그의 남은 팔을 내 가슴으로 잡아끌었다. 회전력과 몸무게가 동시에 가해지자 이탁은 휘청거리며 나와 함께 넘어졌다. 그 사이 나는 양 무릎으로 가슴과 목을 조이고 눌렀다.

이탁은 얽힌 자세를 풀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사이 나는 잡고 있던 이탁의 오른팔을 꺾어 버렸다.

“크윽!”

이탁의 눈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고통을 호소했다. 그의 오른팔은 인간이라면 취할 수 없는 기괴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게 ‘플라잉암바’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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