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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3화 (173/257)

00173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내면 저 깊은 곳,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서 올라오는 괴물이 있었다. 꿈에서 볼까 두려울 정도로 험악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둘이 마주 보기도 전에 공간이 흔들렸다. 뒤이어 충격이 느껴졌다. 몸은 충격에 반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나는 관조자라고 할 수 있을까?

험악한 인상의 인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는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찍이 척준경도 이준경도 모두 나의 한 부분이라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남해에서 만난 영험한 심방의 지적처럼 애써 숨기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탁이 중장 보병에 비유된다면 너는 중장 기병이 되겠다고 했지. 말을 타고, 대도를 들고, 수패를 들면 이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섬전수 단정홍만 하더라도…….

-단정홍이 그러니 너도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 대저 개인의 힘은 무엇으로 평가하지?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또 다른 나는 단정적으로 답했다.

-승리.

단순명쾌한 대답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왜 이곳에 왔지?

-그건 무슨 소리지?

-이곳에서 너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최고가 될 수 있으니까! 그게 가장 빨리 너의 신념을 펼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

-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중원을 차지하는 자는 천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과거 너는 한 차례 그 길을 택한 바가 있다. 그리고 또 같은 길을 가려고 하고 있지. 곧 패망하여 장강 이남으로 내려올 송을 대신해 남조(南朝)를 세우고, 북조와 대립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치겠지. 그 결과로 과거의 율가가 되살아날 테니 한 100년은 남조의 태평성대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과거 그랬던 것처럼 그 잘난 인덕으로 주변국을 감화시켜 신뢰를 이끌어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념을 전파할 것이다.

그랬다. 확실히 나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자아를 마주하고 있으니 내 생각이 속속들이 읽히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다시 딛고 있는 축이 흔들리며 요동쳤다. 육체는 이탁과 끊임없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육체는 목숨을 걸고 절대의 상대와 겨루고 있는 와중에 이성은 양분되어 서로의 정의를 겨루고 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정치가 생물이라고 했지. 그래서 인과 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국가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제는 더 오만해졌지.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에 올랐다고 스스로 자신해버렸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들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내가 오만해졌다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는 줄곧 선의를 위해 정진(精進)한다고 생각했다. 전생을 기억했을 때부터 정체성을 고민해왔고, 숱한 정신적 방황 끝에 내가 꾸어야 할 꿈의 방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른 자아는 그것이 오만이라고 한다. 대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낮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낮은 곳에 머무른다. 도를 아는 자는 낮은 곳에 머물며 ‘어쩔 수 없이’라는 이유 대신 ‘마땅히’라는 이유를 댄다. 그것이 너의 정치였다. 힘이 강한 자가 먼저 굽히며 평화와 협력을 요청한다. 그것이 너의 정치였다. 그러기 위해 너는 강한 자가 되어야 했다. 지금의 너처럼…….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 정치, 종교, 철학…… 그 어떤 방법도 불행을 또는 분쟁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럼 너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내 손에 닿는 자를 구하겠다고. 내 손이 닿는 범위를 더 크게 만들겠다고…….

-……정복자의 논리라는 것인가?

-전쟁을 벌이기 위해 가까운 나라를 두고 먼 나라로 가는 경우는 없다. 전쟁이란 주로 이웃 나라 간의 다툼에서 시작되었지. 서로의 교류가 빈번할수록 다툼은 더 잦아졌다. 왜? 교류가 빈번하다는 것은 이익이 충돌할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쯤은 이해하고 있다.

-지식과 지혜가 다른 것처럼 너와 나의 이해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탁과 왜 싸우는 거지? 너는 내심 명성을 얻어 새로운 제국의 출발을 알리고 싶었겠지. 그 새로운 제국이란 것이 뭐지? 남조를 열고, 유구와 대만, 규슈를 얻어 일대 해상 무역을 독점하고 큰 부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부로 제국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 더불어 학문과 문화를 융숭케 만들어 타국의 모범이 된다. 더 나아가 중동으로 친히 대 선단을 몰아 십자군의 횡포를 저지하고 유럽을 자극하여 르네상스를 앞당긴다.

나도 모르게 전신이 떨렸다. 내가 이 시대에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이 또 다른 자아를 통해 낱낱이 밝혀지고 있었다.

-금을 적당히 압박하면서 고려에게 옛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를 찾아주고, 몽골의 기세가 떠오를 것을 적절하게 조율한다. 행여 수백 년 후에 있을지 모를 유럽의 식민지 쟁탈에 대비해 아시아 국가들이 위기에 대처하는 연맹을 구성한다. 시간이 된다면 아메리카까지 건너가 원주민들을 교화하고 그들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나?

-모르겠다. 그러니 겸허히 듣도록 하지.

-흥,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신념을 관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강대국들이 서로 우월한 지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도덕관념이 부족해서도 아니오, 지도자가 정말 사악하고 욕심 많은 자라 그런 것도 아니다.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것이 나라의 안전을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으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묻자. 역사상 대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그로 말미암아 나라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받았는가?

간단치 않은 질문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책이 있었다. 로버트 카플란의 '무정부 시대가 오는가?'라는 책이었다.

지금까지 내 생각, 그리고 행한 일들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지역을 이해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심화누적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를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한다든가, 오세아니아로 향한다든가, 남미로 떠나본다든가 하는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었다.

동아시아라는 지역만 해도 광범위했고, 그 지역에 변화를 줌으로써 나비효과처럼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기대했던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나는 다시 무정부 시대가 오는가, 라는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책에서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정치가 왜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필자는 제도가 효용을 잃고, 인간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 즉, ‘평화’를 만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하고 악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인식을 보인다. 제도와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이야말로 현실의 문제를 더욱 크게 키운다는 것이다. 전쟁, 악과의 연대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필자는 ‘투쟁’으로 치환하는데 그것을 통해 가짜 민주주의에 대한 항체(抗體)가 생기고, 진지한 고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과 나라의 발전은 하나로 갈 수가 없다. 아니 과거에는 그것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무한정하지 않은 ‘자원’의 소모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미래에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가치밖에 받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원했는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너무 과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날 더러 전 세계를 통일하여 신의 반열에라도 오르라는 것인가?

-네가 생각한 길을 그대로 가라. 나를 만났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처음엔 또 다른 자아의 험상궂은 모습에 혹시 척준경의 본령(本領)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개념까지 섞어 나를 몰아붙인 것을 보면 내 추측이 틀린 것 같았다.

또 다른 자아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는 뜻일까? 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무의식중의 기억이라도 될까?

자아가 완전히 모습이 사라질 찰나 입가가 슬며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모르느냐며 답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따라 했다.

-의심.

뇌리(腦裏)가 번쩍했다.

그리고 의심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건전한 의심은 협소한 개인 생활 너머,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두게 하고, 비폭력적인 의심은 사회의 믿음을 강화시킨다. 나는 최대한 현실적이면서 이상에 가까운 꿈을 실현한다고 마음을 정했고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이상가는 자신의 이상을 항상 의심하며 더 옳은 길은 없는지 찾아야 한다고 나를 질타하고 있다. 나는 남을 이끌고자 했으나, 과한 신념이 외려 그 신념에 대한 의심을 봉쇄해버린 셈이 되었다. 민중은 내가 그들에게 가져다줄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세계를 의심하고 비판할 자유가 있다.’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탁의 어깨 부딪치기에 제대로 걸려 두어 걸음을 밀려난 상태였다. 아까의 충격까지 더해졌는지 입가로 가는 선혈이 흘렀다.

‘왜 그랬을까? 앞으로의 대업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이 순간,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의심에게 의심을 받는 격이라니…….’

그러다 갑자기 실소가 비집고 흘렀다.

이탁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실력의 차이를 절감하니 이젠 포기한 건가?”

“아니, 그 반대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의 선혈을 닦아냈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의연한 기세로 이탁에게 다가갔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내 마음속 의심은 내가 지리라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급한 상황, 아니 급한 상황이라고 볼 수도 없겠군. 의심이 한 말은 모두가 너를 꺾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까……”

이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해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가슴이 근질거릴 것 같았다.

다들 이탁 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나를 이해하는 자도 존재했다. 세 명의 은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지은 한 줄기 은은한 미소는 내 심중을 잘 알겠다고 화답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보면 어쩌면 무도도 세상의 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인한 태도로 수벽타의 기수식을 취했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허세라도 떨어볼 요량이냐? 불행히도 나는 종장(終章)에 들어섰다.”

주먹이 다시 오가기 시작했다.

“정말 잠깐, 말과 칼과 수패가 한데 어우러지면 너를 단숨에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에게 죽는다는 결과가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

천근 거석을 단숨에 쪼갤 기세로 날아드는 주먹을 나는 손바닥을 펼쳐 가볍게 잡아끌었다. 이탁은 당황하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신형이 내게 끌려오는 형태가 되자 전광석화처럼 뒤로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열린 가슴으로 내 주먹이 강타한 것이 먼저였다.

가슴을 부여 쥐고 뒤로 이탁이 정신없이 물러나자 내 뒤에서 간만에 환호성이 울렸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하던 이탁의 얼굴에 짙은 불쾌감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이탁을 향해 검지를 까닥하며 도발했다.

“나는 말과 칼과 수패가 없어도 너를 이길 수 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잠깐 설명드리자면 카카오페이지에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혹시 제 것만 보고 싶으셨던 분들이나 이북으로 보시지 못했던 분들, 카카오페이지를 이용하시던 분들이라면 이제 그쪽을 이용해주셔도 됩니다. 고려편은 아직 이북 작업중이라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삼국지 종이책 관련해서는 총8권중 7권째 교정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빨리 원고 끝내고 연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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