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2화 (172/257)

00172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예상대로라면 ‘퍽’ 소리와 함께 이탁의 안면이 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상체를 세워서 최대한 팔에 힘을 실을 수 있는 형태까지 성공했고, 그 후 팔을 바나나킥처럼 궤적을 그리며 안면 강타를 노렸다. 보통의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정면을 먼저 막기에 선택한 공격이었다.

놀랍게도 이탁은 내가 휘두른 주먹의 궤도를 정확하게 알아냈고, 주먹을 세워 막아냈다.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그의 기민한 대처에 내가 잠시 주춤한 사이 가슴이 화끈해지며 이탁의 상체에서 떨어졌다.

이탁의 무릎이 어느새 나의 가슴을 올려친 것이다.

내가 가슴을 문지르며 일어설 때쯤 그 역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소림은 모든 외가의 정통이다. 외가는 단련과 박투(搏鬪)가 필수. 네놈이 젖먹이 적부터 경험을 쌓아왔다고 해도 나의 경험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의를 찢어 벗기 시작했다.

자잘한 상처로 가득한 그의 우람한 상체보다도 복근과 팔목에 새겨진 용 그림이 유독 시선이 갔다.

“소림의 절예는 18방(坊)을 통해 완성된다. 18방의 마지막 관문은 천근통천방(千斤通天坊)이라 하지.”

천근통천방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언뜻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내가 현대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오래된 영화로 소림사 18동인(少林寺十八銅人, 1976)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봤던지 또래의 친구들과 소림사를 외치며 동네를 떠들썩하게 뛰어놀았던 일이 기억났다.

그중 17방이 천근관, 18방이 통천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천근관은 천근의 석문을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관문이고, 통천관은 뜨겁게 타오르는 청동화로를 맨손으로 잡고 이동시켜야 하는 관문이었다.

천근통천방이라 했으니 천근(600kg)이나 되는 뜨거운 청동화로를 옮겨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청동화로에는 용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드는 과정에서 몸에도 같은 용 문양이 새겨지게 된다. 즉, 이탁이 보여준 용 문양은 한 세대에 겨우 한두 사람이 나온다는 18방 통과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소림 장문이 그대보다 강할는지…….”

4문 중에 소림 장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18방 통과자가 소림 외가기공의 완성체라면 소림 장문은 어느 정도로 강할까?

이탁은 피식 웃었다.

“소림은 2개의 학통(學統)을 가지고 있다. 달마 조사의 진전인 역근(易筋)과 세수(洗隨)는 숭산에, 2대 선사인 초우 선사의 진전, 18나한수는 강덕부(降德府)에 전해졌다. 나는 강덕부 출신으로 숭산의 장문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러니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가 없지. 그리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강한들 무슨 소용인가?”

강덕부는 예전 삼국 시대로 치자면 업을 가리켰다. 창건자 초우 선사는 어릴 적부터 워낙 약골이라 숭산에서 꽤 업신여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몸을 단련하기로 마음먹고 장경각의 무경을 섭렵했다고 한다. 본인의 깨달음까지 합쳐져 놀라운 외가기공을 창시했고 결국 소림의 인정까지 받아 냈다.

두문불출하는 숭산에 비해 강덕부의 제자들은 지리적 여건상 요나라와 인접하고 있었기에 군부로의 진출이 빈번했다.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박투를 중시하는 무공은 군부와도 매우 잘 맞았다. 그중 가장 강한 자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탁이라 할 수 있었다.

“18나한수는 하나같이 다채롭고 그 위력이 강하나 수비에 약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몸을 강하게 단련시키게 된다. 다 큰 멧돼지가 전력으로 들이받아도 한점 흐트러짐 없는 것이 바로 나다.”

“그건 나에 대한 칭찬으로 알아듣겠다.”

방금 나의 태클에 넘어졌던 것을 떠올리자 이탁의 얼굴은 잠시 당황스러움이 감돌았다. 자신의 강함을 이야기하다가 뜻하지 않게 나를 추켜세워준 꼴이 되었으니 외려 위신만 깎이는 발언이었다.

“놈!”

전광석화같이 발과 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18나한수, 12로 담퇴(潭腿)로 대변되는 권각술의 정화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에서 보았을 때는 단조롭지만 호쾌한 움직임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직접 겪으면 그 변화가 상대의 의표를 찌르고, 일격, 일격이 급소를 가리켰다.

일격이라도 맞으면 치명적 상세를 입을 수밖에 없고, 어쩌다 적을 공격해도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근접전의 무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단정홍이 일찍이 이탁을 중장 보병에 비유한 것도 바로 이런 장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퍽! 퍽! 퍽!

나는 연속으로 가슴을 강타당하며 뒤로 정신없이 밀려났다.

간신히 신형을 수습하자 입가에서 가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내가 막지 못해서?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거리를 정확히 재고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런데도 마치 순간적으로 주먹이 늘어난 것처럼 가슴을 강타했고, 다시 피했음에도 주먹이 미사일처럼 따라붙는다는 생각이 들 찰나 정신없이 공격을 허용한 것이다.

나를 응원하던 무리는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송군은 있는 힘껏 함성을 질렀다.

이탁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이것이 격기(隔氣)다. 18나한수의 비전, 격기를 쓴 이상 너를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생소한 단어였지만 한문 그대로 풀이하자면 내가 당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흔히 우리가 주먹이나 손바닥을 앞으로 밀면 바람이 일게 된다. 속도가 빠를수록 바람은 더욱 강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바람이라고 여겨지겠지만 이탁 정도의 고수가 오랜 수련과 비전을 통해 얻어낸 바람이라면 이미 바람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일종의 내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소림사에 관련된 무협 소설을 읽다 보면 백보신권이란 가상의 절예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적용 거리가 주먹 한 개 간격 정도로 극히 짧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놀라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촌경이나 발경같은 기술과도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자면 필수적으로 진각을 밟아 몸에 힘을 끌어 올려야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탁은 그 과정이 지극히 짧았다.

기술은 간파했으니 그에 맞춰 대응하면 그뿐이었다. 나와 이탁은 다시금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응원하던 무리 뒤편에서 노회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고우의 말을 무시했다면 아직도 믿지 못했을 터, 어허, 지난 영명(英名)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이준은 자신들 뒤에 누군가 있을 거로 생각지 못했던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모두 3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내가 이미 만나본 인물이었다.

“동산고와(東山高臥)…….”

오은 중 일인인 동산고와 부혁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줄 누가 알았을까? 내 입에서 절로 그 명호가 흘러나오자 이탁의 눈빛이 변했다. 반응으로 미루어 그 역시 새롭게 나타난 삼 인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름한 무복 차림인 동산고와가 나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던졌다. 그리고 옆에 학사 차림의 선풍도골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청담불출(淸談不出)이라 하오.”

그러자 다들 어수선하기 시작했다. 그건 이탁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산고와와 함께 출현한 것만으로도 내심 정체가 짐작되었지만 실제로 자신을 밝히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무꾼 차림의 중년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세한송백(歲寒松柏)이오.”

하나같이 오은의 일원이었다. 섬전수 단정홍, 태호삼기 이일민이 그나마 세속적인 인물에 속한다면 동산고와, 청담불출, 세한송백은 어지간해서는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인물들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늙은 퇴물들이 몰려나온 것을 보니 필시 나를 노리고 왔으렷다.”

하북삼절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백성에게 악명도 자자한 이가 이탁이었다. 두문불출하던 3명의 은거기인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탁을 처단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우군이 생겼다고 좋아할 수도 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이제 제대로 실력을 판가름해보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산고와는 이탁의 추측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의 뜻을 나타냈다. 동산고와는 나를 보았다.

“나는 장군과 대련을 벌인 후, 집안의 도움을 얻어 장군을 여러모로 살폈소이다. 먼저 그 점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소이다.”

동산고와가 정말로 미안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깊숙하게 머리를 숙였다. 만약 내가 곁에 있었다면 그의 그런 행동을 막고 싶을 정도로 깍듯했다.

“장군이 왜 불패를 외쳤는지 그리고 복주와 건주에서 어떠한 일을 벌였는지 잘 알게 되었소이다. 게다가 장군은 일찍이 섬전수, 태호삼기와 인연을 맺은 바가 있지요.”

스승인 태호삼기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동산고와의 표정은 반대로 씁쓸함이 가득했다.

“세인들은 삼절오은이라며 추켜세웠지만 사실 우리는 삼절이 더 뛰어남을 잘 알고 있었소이다. 무예의 본산은 하북에 몰려 있고, 강남의 은자들은 대부분 경쟁을 피해 은거한 자들이었지요. 그럼에도, 허명을 계속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강남에 사는 백성의 믿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지 않는 싸움만을 벌였고, 나머지 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은거를 고집했소이다. 단정홍이 강남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오은에 속하기는 했으나 그는 본래 관부의 인물이라 성향이 다릅니다. 우리는 오매불망하며 우리의 짐을 덜어줄 신진을 기다렸소이다.”

그 신진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기껏 골랐다는 것이 썩은 가지였군. 이제 곧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이탁은 한껏 비웃었다.

동산고와는 그런 이탁의 비웃음을 덤덤한 미소로 받아쳤다.

“우리는 오욕을 두려워해 밖으로 나가기를 꺼렸고, 그저 동산 높은 곳에 누워 풀피리를 불며 한순간의 안온만 추구했습니다. 추운 시절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본받고자 했으나 그저 마음에만 담았을 뿐 세월만 무상하게 흘려보냈지요. 그렇게 나이를 먹어 어느덧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되니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고개를 들더군요. 오늘날의 혼란은 우리 같은 어른들의 책임이 있을진 데 그 책임을 아무 부채도 없는 신진이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나서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너희의 절기를 이놈에게 전수라도 해줄 요량인가? 흥, 꽤 재미있는 생각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최소한 몇 년 정도의 목숨을 유예해줄 수 있을 만큼의 유희가 되겠지만, 날을 잘못 잡았다.”

동산고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대인, 당신이 당세에 무적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오이다. 그러나 무적은 아니지요. 그대가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인정하는 한 말입니다. 현실에 얽매인 자는 꿈을 가진 자를 이기지 못하오이다. 그것이 그대가 화산논검에 초청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화산논검이란 말이 동산고와에게서 흘러나오자 이탁의 안면이 옭으락 붉으락 해졌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화산논검에 참가하여 자신의 무위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뽐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신에 폭풍 같은 기세가 다시 피어올랐다.

“불패! 오은! 오늘 그 하잘 것 없는 명호들 다 떼어주마! 이 몸이 왜 천하제일인지 보여주마!”

이탁이 달아오른 만큼 나 역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모든 상황을 잊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척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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