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1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어수선한 고지 위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이탁은 손을 움직여 넓게 원을 만들었다. 몇 명이 내려와도 홀로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 뒤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동평의 목소리도 들렸다.
“무뢰한들의 싸움판에도 방수(防守)는 항상 있다. 그냥 구경꾼이 아니다. 기세를 더해주는 첨병(尖兵)이지. 준경, 네가 온전히 이탁과 겨룰 수 있도록 우리가 송군의 기세를 누르겠다.”
그동안 활약할 기회가 없다며 투덜거리던 자들은 모두 가세한 것 같았다. 정말 고지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인원만 남은 셈이다.
대략 100명 정도의 인원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 내려가니 그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장면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지금의 시대는 수호전의 무대였고, 호협(豪俠)의 장(場)이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흔한 무협 소재로 치자면 관과 강호의 충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들이라 송군은 숫자가 많음에도 잔뜩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래 전쟁에서 사망하면 유족들에게 상당한 연금을 주는 것이 송군의 전통이었지만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국방비와 황제들의 사치가 더해지면서 제도는 있으나 실질적으로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이 심화하였다.
그러니 돈을 주는 귀족에게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동관과 채경이 그토록 재물을 끌어들이려 애쓰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국가 재정으로 쓰여야 할 돈이 몇몇 개인의 손에 들어가니 국가 재정은 더욱 황폐화하여 사병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의 시대다.
이탁과 10보 정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되자,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과 비웃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며칠 두고 보고자 했거늘…….”
며칠 더 살 수 있는 목숨을 왜 굳이 버리려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언제나 승자에 서 있던 자였으니 그 반응은 이해할법했다.
“당신은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당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이탁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소고와 갈송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이탁의 얼굴이 대번에 변했다. 소고와 갈송을 언급할 수 있는 인물은 그의 기억에도 딱 한 명밖에 없었으리라.
이탁의 기세가 강렬해졌다. 그 주변으로 작은 회오리가 감돌 정도였으니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할 뻔했다.
“네놈이로구나. 단정홍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벌써 귀신이 되었을 놈. 다행이고, 다행이다. 네놈의 행방이 묘연하여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걸어 와주다니…….”
주먹을 불끈 쥐고 한발씩 천천히 내딛는 그의 모습은 마치 태산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에 형언하지 못할 무거움이 실려 있었고, 주먹은 그 어떤 것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평조차도 그 기세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지지 않기 위해 한 발을 내디뎠다. 이탁의 기세(氣勢)를 기파(氣波)로 끊자, 막힌 숨을 내쉬는 자들이 느껴졌다.
“그대를 비롯하여 소고와 갈송은 삼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인물들이지만 어쨌거나 두 명이 고인이 된 마당이니 사이좋게 전(前) 삼협으로 남게 하여 드리지.”
“애송이가 많이 컸구나.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갔다. 무지몽매한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죄는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죄다. 죽어도 고이 죽지는 못할 것이다. 나, 철대인 이탁이 약속하지.”
“백성의 무지몽매는 누가 만드는가? 그리고 백성은 선동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인가? 이탁, 네가 대역죄를 들먹이니 참으로 우습지만, 하늘을 대신해 내가 똑똑히 대답해주마.”
나는 근처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저 나라는 무엇인가? 백성은 각자의 삶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자생적 합의로 질서를 만들었고, 그 질서를 다루는 자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송의 탄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현실은 어떠한가? ‘백성의 뜻’이라는 미명은 곧 권력자의 내심에 불과하다. 옳은 것이 정말 옳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결정된다. 그러면서 모두의 뜻이라고 말한다. 대답하라!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의 안위가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세상은 옳은 것인가? 아닌가? 과거 민 제국이 민심을 천심으로 받들었다면 지금 백성의 가치는 그저 나라를 유지하는 이용물인 터!”
“현실을 모르는 잔납(원숭이)이 여기에 있었군. 설사 네놈 말이 백 보 옳다고 하자. 네놈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서도 과연 지금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헛소리 집어치워라. 지금껏 역대 왕조 중 어느 한 곳도 지상천국을 말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나? 아니, 단지 왕조만 바뀌었을 뿐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네놈이 꾸는 꿈은 그저 개꿈에 불과하다.”
이탁은 놀랍도록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일반론으로 보자면 그리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것이 설령 완전한 현실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민 제국의 이름도 함께 넣어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이건 결코 의미 없는 결과가 아니었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그 이름이 오랜 세월 지속한다는 것은 역사에 남았다는 것이고 옳고 그름을 떠나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자학이 태동할 이 시기에 다시금 나는 새로운 사상의 조류를 과거의 예를 들어 태동시킬 기회를 얻었다.
율가가 400년을 지속했듯, 주자학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은 고려나 왜로도 전파될 것이고 주자학만큼이나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하나로 만드는 것보다 더 크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이상향이라고만 여겨지던 요순시대를 시대상에 맡게 재탄생했다고 평가받는 민 제국 시대는 하나의 본으로 새로운 사상에 편입하게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주자학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은 애초에 없던 이질적인 사상이 아니라 설득력이 있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각 왕조가 실패를 거듭했던 것은 외려 지상천국을 외쳤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적임자라고 외치며 혼란의 와중에 전 왕조를 일거에 뒤집었다. 이른바 혁명이었지. 혁명은 사회를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는 백성이란 자원을 합(合)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백성을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었다. 위정자가 백성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들끼리의 평등, 그들끼리의 경쟁.’……. 변명해볼 텐가?”
“10년 동안 말발만 늘었구나. 이제 이 정도 들어주었으면 보시(普施)도 충분할 터!”
이탁의 일격이 날아들었다. 나는 방패를 들어 일격을 막았다. 그럼에도, 외려 내가 뒤로 두 걸음을 밀려났다. 분명히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는 것은 이탁의 평가가 절대 박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능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준 칼을 휘둘렀다.
소림 외공의 정수(精髓)답게 이탁은 웬만한 칼날은 수도나 팔꿈치로 날려 버린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지금도 그는 수도로 칼날을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수의 감이라는 것은 확실히 남다른 것이 있었다. 거의 근접할 찰나 안색이 변하더니 수도의 방향을 틀며 뒤로 반 발자국 재빠르게 물러났다.
칼날은 손바닥 볼의 끝 부분을 살짝 스쳤는데 곧 선혈이 흘렸다. 이탁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병(神兵)을 믿고 이리 설쳤구나.”
이탁이 손을 올리자 뒤에서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검은색 장갑을 전달했다. 그가 손에 끼면서 쇳소리가 들린 것을 보면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장갑이 분명했다.
“영광으로 알아라. 곽약사(郭藥師)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묵철 장갑의 첫 상대가 너라는 것을…….”
곽약사의 이름은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은 바가 있었다. 요나라 최고의 무예인이자 발해 유민으로 이루어진 상승군을 이끄는 장군이기도 했다.
동관이 요나라 정벌을 위해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이탁 역시 언제고 곽약사와 승부를 낼 것을 대비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생각했던 이탁을 뛰어넘어 능력의 최대치를 볼 수 있는 셈이다.
능진이 망간 합금으로 나에게 진귀한 칼을 만들어주었지만 중원에도 이 정도 기술을 가진 자는 소수 존재한다고 봐야 했다. 특히나 황실 소속이라면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대장장이들이 집결해있다. 그들이 만든 물건이라면 충분히 내 칼과 맞상대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해볼까?”
이탁은 저돌적인 불곰이었다. 모든 공격이 단조로웠지만 한 번만 제대로 가격당하면 그 즉시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팽팽함을 유지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로 공세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30합이 흘렀다. 방어랄 것도 없이 둘 다 공격에 치중하면서 허공에서 묵철 장갑과 내 칼이 부딪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자 계속 단단할 것 같던 칼날에도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묵철 장갑도 온전하지 못했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불퉁하게 튀어나온 묵철들이 잘려 있었다.
폭풍 같은 공세 끝에 잠시 평온을 되찾자 이탁은 자신의 묵철 장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전의 대장장이들이 엉터리였구나. 어떤 병장기를 만나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이라더니…….”
“복주의 대장장이도 그 못지않게 뛰어나단 사실을 몰랐던 것이겠지.”
나는 칼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몇 대 치면 곧 부러질 것 같은 형상인지라 미련없이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자 뒤에선 몇몇이 자신의 칼을 주기 위해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나는 방패마저 던졌다. 이제 적수공권이었다.
이탁은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너덜너덜해진 묵철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뒤로 미련없이 던져 버렸다.
“후회할 텐데.”
나는 피식 웃었다.
“후회(後悔)는 이전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나는 땅을 박차며 이탁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이탁은 나와 엉켜 뒤로 쓰러졌다. 아무리 힘이 강한 이탁이라도 나 역시 그에 못지않음을 이전까지의 겨룸을 통해 확인했기에 과감한 태클이 가능했다.
넘어진 우리 둘 주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가장 원시적이고 태곳적의 싸움으로 회귀한 셈이었다.
“내 결정이 옳다.”
한 손으로 멱살을 잡는 데 성공하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이탁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 작품 후기 ============================
먼저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글을 쓰는게 참 어렵다는 생각을 받았습니다. 슬럼프일 수도 있겠지요. 일단 짧게나마 글의 실타래를 풀고 다시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