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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70화 (170/257)

00170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최소한 칼과 창이 난무하는 비인간적인 전장은 아니지 않은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나의 마음은 차분하기만 했다.

“이 의원, 정치 그만하고 싶나?”

국회의장이 근처까지 다가와 근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던졌다.

“정치는 타협의 산물입니까? 투쟁의 산물입니까?”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것인가?”

국회의장 곁에 바짝 붙은 여당 대표를 향해서도 나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치 신인이 선배에게 꼭 묻고 싶은 질문이었습니다. 정치는 타협의 산물입니까? 투쟁의 산물입니까?”

“지금 이 의원 자네의 행동이 존중받을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면 의장석에서 내려오게.”

그때, 여당의 의원 중 유난히 덩치가 큰 한 사람이 윗도리를 벗고 나섰다. 주변에서 환호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그가 틀림없을 것이다.

‘2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레슬링 영웅, 하태권.’

국민적인 인기와 여당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된 초선 의원이었다.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마추어들 싸움에 프로가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편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계속 의장석을 점거하면서 여권은 그 외에 다른 카드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 내려오지.”

“하 의원님은 무엇 때문에 정치를 시작하셨습니까? 제 시작은 절차의 민주주의가 실종된 이 땅의 정치 지형에서 누구나 예측 가능한 수준의 책임과 신뢰가 담긴 정치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절차의 민주주의가 지켜지고 있습니까?”

마흔 중반이었지만 여전히 탄탄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는 하태권의 얼굴에 살짝 부끄러움이 감돌았다. 그러나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다수당이다. 다수당의 책임이란 것이 있지. 설사 개인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과를 위해 하나로 합쳐야 한다. 정치는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세력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의 힘은 국민이 행하는 선거를 통해 나온다. 정 억울하다면 세력을 만들어서 선거에서 이겨라. 다수당이 되어라. 내 설명은 여기까지다.”

하태권이 움직이자 단상을 인간띠로 묶어 육탄방어하던 야당 의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악력이 센 것은 방송을 통해서 종종 접했던 지라 매우 놀랍지는 않았다.

지켜보던 여당 의원들은 저지선이 무너질 때마다 환호를 질렀다. 이제 곧 자신들의 뜻대로 되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마침내 하태권과 나, 둘만이 단상에 남았다. 하태권은 내 손목을 잡았다. 단숨에 끌어당길 셈이었는지 그 기세가 사나웠다.

그러다 하태권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생겼다. 내가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다.

1분 정도가 지났을까? 하태권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여당 의원들도 환호를 멈춘 채 표정이 굳어졌다.

기자들 사이에서만 간간이 재미있는 특종이라는 말만 흘러나왔다. 레슬링 국민 영웅과 수십 명의 조폭을 때려잡으며 유명세를 탄 나와의 대치가 무척 흥미롭게 여겨졌을 것이다.

“자네 동영상을 봤었지. 자네처럼 날렵한 몸놀림은 나에게 불가능하지만,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라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군. 자네의 근력은 전성기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아까 말했지 정치는 세력이 한다고.”

잡은 손목을 내려놓더니 그는 태클 자세를 취하며 나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며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놓고 진흙탕 공방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정치는 세력이 한다……. 맞습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저 역시 세력입니다.”

불의의 태클을 당했다면 넘어져야 정상이었겠지만 나는 여전히 굳건히 단상에 딛고 있었다. 마치 태클을 걸기 전의 정지 영상인 것처럼 하태권과 나는 그 자세에서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여당의 사무총장은 그 상황이 답답한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막말을 쏟아 부었다.

“저, 저 무식한 깡패 새끼! 어떻게 저런 놈이 국회에 들어올 수 있었지. 꼴통 강의식을 내쳐서 시원하다 생각했는데 이젠 깡패 새끼까지……. 이런 놈들을 뽑아주는 지역 수준을 알겠다.”

“김 의원!”

당 대표가 사무총장의 발언을 황급히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기자들의 플래시는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었다. 사무총장도 자신의 발언이 너무 과했다고 여겼는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사이 야당 의원들이 조금 전의 발언을 놓고 공세로 돌변했다. 그때 기자들 뒤로 수십 명의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선두에 선 자는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인상이 결코 그의 본모습과 같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했다. 수십 년간 정치판을 뒹군 내공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제1야당인 국민당의 대표였다.

“이것 참, 소식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못들을 것을 들었군요.”

여당 대표와 사무총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천은 강의식 의원 전까지만 해도 줄곧 여당의 텃밭이었던 곳인데 이제 겨우 2번 내줬기로서니 지역 수준 운운이라니요. 내일 신문 일면 감입니다.”

여전히 하태권과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는 내 곁으로 박영출이 달라붙었다. 힘 싸움을 하는 와중에 대화까지 나누는 것을 보며 하태권은 치욕스러운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너구리 양반, 줄곧 이곳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겠지. 이대로는 직권상정이 어려울 것 같으니 슬쩍 공을 나누려고 온 모양새 보세.”

아무리 여당과 야당의 교감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한 것이고, 상황이 급변하면 약속은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다.

만약 내가 폭력을 휘두르기라도 했다면 끼어들 명분이나 실익이 적었겠지만, 여당의 말실수까지 더해지면서 야당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여당은 더 큰 양보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여라도 오늘 속기록을 수정하거나 없앨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이미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봤으니 건드리지도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느물거리는 야당 대표와 달리 여당 대표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사무총장의 말실수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자신들과 가까운 언론사를 포섭하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지만, 야당 성향의 언론은 사무총장의 실언을 꼬투리 삼아 연일 맹공을 퍼부을 것이 예상될 것이다. 그것까지 무마하자면 야당에 상당한 양보를 해야만 한다. 결국, 이번 직권상정은 악수(惡手)로 돌아온 것이다.

여당 대표는 나를 죽일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 모두가 내가 단상을 점거하면서 벌어진 일이기에 악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힘이 다 빠져 헉헉거리는 하태권을 밀치고 여당 대표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앞으로 자네……. 정치하기 어려울 걸세. 이건 내가 확실히 보장하지.”

“야권이 연대투쟁 할 때, 대표께서 하신 말씀이 잘 기억납니다. 낡은 정치이자 상투적 수법이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 그대로 돌려 드리지요.”

대표를 비롯한 여당 수뇌부가 불쾌한 표정으로 빠르게 원내를 빠져나갔다.

“이야 내일 신문 볼만하겠는데, 사천 지역 민심이 확 달아오르겠어. 그리고 레슬링 영웅을 땀나게 한 자네의 무용담까지……. 하하하, 이거 미리부터 김칫국 먹는 것은 그렇지만, 재선은 떼놓은 당상일세.”

긴장감이 사라지자 박영출은 껄껄 웃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의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국민당의 대표가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의원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유구의 자치의원이 오늘 첫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우리 당과는 정책적 노선이 같아 항상 도움을 받고 있어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아마도 여당은 그 시점을 노렸던 것이겠지요. 아, 이번 기회에 이 의원에게도 소개해 드리리다. 유구의 순텐(舜天) 자치의원입니다.”

“순텐입니다. 이 의원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형적인 남방계의 중년인이 악수를 청했다. 아마도 국민당 대표는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실패했을 때 자치의원을 방패로 쓰려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치의원만이 가진 독특한 권한 때문이었다.

“이준경입니다.”

나 역시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했다.

*

근래 잠을 잘 때마다 나는 꿈을 꾸곤 했다.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일상을 살고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꿈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려 그 꿈을 더 오래도록 꾸고 싶었다. 최소한 내게는 신이 나는 꿈이었다.

그사이 열흘이 빠르게 흘러갔다. 송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진영을 튼실히 하는 데 집중하는 듯 마치 성이라도 쌓을 기세로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지금껏 보지 못한 규모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대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7만의 병력이 모두 합류하자 일대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채구의 깃발이다.”

나와 나란히 선 동평이 한 곳을 가리켰다. 척 보기에도 호화로운 행렬이었다. 그들을 세심히 지켜보던 동평의 안색이 어느 순간 급변했다.

“저, 저!”

나는 동평의 놀라운 반응을 이해했다. 나 역시 그를 보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철대인 이탁. 그자가 왔다.”

“저자가 이탁이란 말입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말하자 다들 몰려들었다. 개미같이 보이는 송군 무리에서 그의 체구와 기도는 눈에 확 뛸 정도였기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연이었을까?

문득 이탁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숲에 가려 그곳에서 이곳이 보일까 싶었는데 정확하게 시선이 향한 것을 보면 우연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무인의 감일까?

“동관이 자신의 양자보다도 아낀다는 철대인 이탁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겠지.”

동평은 나를 보았다.

“자신 있나?”

“제가 질 것 같습니까?”

“너와 나는 해남도의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 그 당시의 너는 어린 야생마였고, 이탁은 이미 완성된 무인이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이탁의 수하를 상대로 절절매던 시기였지요. 저자를 이길 날이 올까? 그런 고민도 했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린 야생마는 다 자랐습니다. 어떻게 자랐는지 그것이 너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모인 자 중 너와 이탁의 대결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천하가 주목할 것이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나는 칼과 방패를 단단히 잡았다. 그러자 동평은 급한 어조로 나를 말렸다.

“설마 지금 내려갈 생각인가?”

“맛있는 것을 가장 늦게 먹는 사람도 있지만 가장 빨리 먹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후자지요.”

할 말을 잃은 동평을 뒤로하고 나는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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