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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68화 (168/257)

00168  (22) 출곡천교(出谷遷喬)  =========================================================================

(22) 출곡천교(出谷遷喬)

마음을 굳히자 동평의 행동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일어서자마자 가장 가까운 병사의 창을 빼앗았다. 설마 이렇게 빨리 변심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병사들이었고, 동평의 명성을 아는 자들은 섣불리 반항할 생각도 못했기에 순순히 창 2자루를 헌납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 사이 내가 말에 올라탔고, 달리기 시작했다. 동평에게 손을 뻗쳐 그를 내 뒤에 태우는 데 성공하자 나는 외죽부 고지가 아니라 외려 강변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적은 단둘이다. 적을 죽이거나 잡는 자에게 큰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고래고래 독려하는 군관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이들은 화살도 쏘고 싶었겠지만, 병사들을 종횡무진으로 가르는 우리를 아군이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말을 달리며 간간이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길이 열렸다. 뒷자리에 탄 동평이 두 자루의 창을 마음껏 휘두르자 연방 비명과 함께 우수수 적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계속 둘이 함께 탈 수만은 없었다. 말이 점차 지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병을 노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기병을 삽시간에 베어버리고 말에 옮겨탔다. 동평 역시 지쳐버린 말에서 새로운 말로 옮겨타는 데 성공했다.

“준경, 어디까지 갈 참이냐, 채구는 아직 이곳에 없다!”

내가 점점 금군의 심장부로 향하자 혹시 채구를 노리는 것인가 싶어 동평이 조바심을 냈다. 어찌어찌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배와 재회한 선물로 불놀이를 해볼 참입니다.”

“불놀이? 하하하, 정말 네놈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군량고를 노릴 셈이구나!”

칠만에 이르는 대 병력이 머무르기 위해서 진영 공사는 한창이었다. 수군 일부가 수송선이 되겠지만, 이곳에 머무는 금군을 먹이기 위해서 일정량 이상의 군량은 쌓여 있어야 했기에 제대로 된 군량고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군량고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죽부 고지에서 그 현장을 낱낱이 본 터였다.

진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군량고를 공격받으리라 적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허술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달리면서 동평에게 외쳤따.

“군량고의 불을 끄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막는 것이 먼저일까요?”

“군량고의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아무리 수군이 보급을 책임진다고 해도 단숨에 나를 수 있는 군량은 제한적이다. 그럼 당분간은 군대를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되지.”

“사기도 떨어지겠지요.”

“이를 말인가!”

신이 나는지 동평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금군은 깨알처럼 쏟아졌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뚫고 왔는데도 군량고까지 대략 200m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가 군량고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후방의 금군은 죄다 군량고 앞으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군관들은 저마다 소지를 지르며 반드시 군량고를 사수해야 한다고 소리쳤고, 포상을 노리는 병사들은 계속해서 출현해 나와 동평을 끈덕지게 괴롭혔다.

“방비가 너무 단단하다. 저들 모두를 베지 않는 이상 군량고에 접근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왜 우리가 꼭 군량고에 근접해야 합니까?”

“뭐?”

나는 품 속에서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노란 기운이 감도는 돌이었다.

“그게 뭔가?”

“사금석(砂金石)이라고 합니다. 약간의 금을 품고 있어 이렇게 햇빛을 받으면 노란색이 감돌며 반짝이는 것이 특징이지요.”

내가 이리저리 돌려 보여주자 마치 햇빛이 거울에 반사된 것을 내가 보면 눈부신 것처럼 반짝였다.

“사금석은 햇빛이 강한 날에는 대략 4리 밖에서도 그 빛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제 재미있는 구경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군량고를 향해 사금석을 힘껏 던졌다. 멀리서도 빛이 잘 보이도록 고르고 고른 사금석이라 그런지 마치 한줄기 유성처럼 반짝였다.

곧 군량고 근처에 사금석이 떨어졌고, 근처의 병사들은 금덩어리라도 발견한 듯한 횡재에 서로 주우려고 혼란이 일어났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동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행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펑! 펑펑!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굉음(轟音)에 우리를 상대하던 기병의 말들이 놀랐고, 보병 역시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찍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몇 초 후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군량고와 그 인근에 떨어진 화탄이 불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화탄은 포탄 자체의 강력한 힘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굉음과 연소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물론 능진이 나를 공격했을 때 포탄을 발사하기는 했지만, 원체 구경(口徑)이 작은지라 포탄의 힘이 크게 발휘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시기의 기술력으로 구경이 큰 대포를 개발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면 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것을 능진에게 제의했었다. 성문을 뚫지 못할 포탄보다 차라리 성 내부에 화재를 불러일으키는 화탄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진영은 모두 천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량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임시로 방책을 만들고 그 안에 쌓았으니 불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삽시간에 타올랐다.

“불을 꺼라!”

군량고 인근을 빽빽이 채우던 병력은 혼란에 빠졌다. 강변으로 뛰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혼란에 밀려 화마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다. 도망을 치고 싶어도 워낙 병력이 밀집해 있다 보니 화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은 화를 면치 못한 것이다.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력 노출을 막기 위해 쏜 화탄은 서너 발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너무나 지대했다. 능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 이제 진짜 우리가 할 일을 해보지요.”

“우리가 할 일? 어떤 것이냐.”

화광이 충천하자 동평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내가 이런 준비를 한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여기는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에 군관들이나 몇 놈 사로잡으렵니다.”

“아니 군관을 사로잡아 무엇하려고?”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자 동평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얼마나 병사들의 정서를 뒤흔들지 이해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외죽부 고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당도할 금군을 먹이기 위해서라도 당면 과제는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가로막는 자들도 당연히 있었다. 아까까지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며 중심으로 달렸다면 이제는 그들이 목표였다.

“한 놈!”

말에 탄 군관을 빠르게 스치며 목덜미를 낚아채자 군관은 한동안 허공에 매달린 격이 되었다.

“살려줄까?”

사색이 된 군관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그대로 던져 버렸고,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차례대로 베기 시작했다. 8명을 베기까지 숨 쉴 틈도 없이 도륙이 이어지자 병사들은 잔뜩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아직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군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느냐? 저놈의 목숨 값이다. 만약 저놈이 죽기를 각오했다면 너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논리도 이성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불안한 심리를 건드리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말이기도 했다. 사실 군관이 죽는다고 해도 내 앞길을 가로막으면 병사들을 베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이 마비된 전장에서 나의 말은 병사들을 깊숙이 후벼 팠다.

그때 동평도 군관 하나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반항이 심했는지 군관의 다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동평 역시 나와 같은 물음을 군관에게 던졌고, 군관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평이 씩 웃었다.

“그럼 난 16명인가?”

두 자루의 창이 허공에서 난무하자 내가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목숨을 취하기 시작했다. 마치 양 떼에 난입한 늑대를 보는 것처럼 송군의 군기는 형편없이 떨어졌고, 진형도 완전히 무너졌다.

“이번엔 누구를 노려볼까.”

동평이 내미는 창끝과 내 대도에 지목될까 두려워 군관들은 저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도망쳤고, 그런 군관들 곁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을까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지휘관을 피해 멀찍이 벗어나기 시작했다.

용감한 자들은 병사를 독려하며 두려워하지 말 것을 주문했지만 내가 한 녀석을 지목하여 잡은 다음, 병사들을 노려 보자 아예 병장기를 버리고 우르르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와 동평 주위로 적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대신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먼저 산을 오르십시오. 뒤는 제가 맡지요.”

외죽부 고지는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기에 동평은 말에서 내려 먼저 뛰기 시작했다. 우리라고 무한한 초인은 아니었기에 이제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 때였다.

나는 방패를 들었다. 화살은 조금의 위협도 주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 나갔다. 화살이 전혀 쓸모가 없음을 깨닫고 적 지휘관이 중지를 외쳤을 무렵, 나는 당장에라도 다시 돌진을 시도할 것처럼 자세를 취하자 저 멀리서 적군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새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나오면 자신이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나는 웃었다.

“나는 이제 골짜기에서 갓 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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