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7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방패를 잡았다.
“장군이 방패를 잡아야 할 정도입니까?”
처음 보는 광경에 다들 집중했다.
“적설 장군이 작고하며 세상에 남긴 제자가 바로 저자다.”
“적설 장군이라면 전 하북삼절!”
모두 놀라워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저자의 이름은 동평이라고 한다. 10년 전, 나와 한 차례 무예대결을 펼친 적이 있지. 당시 그는 영재쌍창장(英才雙槍將)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10년이 흘러 영재는 풍류를 아는 호한이 되었고, 강주의 천호가 되었다.”
“이미 한 차례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고요?”
장청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전 하북삼절의 일인이자 군부의 큰 어른이었던 적설의 제자라면 대단한 무예를 지녔을 것이다. 그런 자와 내가 이미 10년 전 겨루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인가?
“설마 지지는 않았겠지요?”
산적 두목 중 유난히 수염이 덥수룩한 갈랑(葛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준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갈랑이 아파하며 이준을 노려보자 이준은 되려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형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구나. 형님이 누구에게 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느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자들을 보며 10년 전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경험이 없는 어린 잠룡에 불과했다. 이탁 보다 한 수 아래인 상대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역시 잠룡에 불과했던 노준의에게도 밀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남들이 평생 가도 겪기 어려운 10년 여정의 결과였다.
그때 고지 아래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평을 대신해 병사 하나가 고지 위로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역도(逆徒)는 들어라! 강주의 천호, 동평 님이 친히 너를 벌하기 위해 왕림하셨도다! 알량한 재주도 이제 끝이다!”
못들을 것을 염려했는지 몇 차례 같은 외침이 반복되었다.
나는 천천히 고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군 저도 가겠습니다.”
장청과 석보, 이준 등이 서로 나서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막았다. 이들이 고지를 내려가는 순간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었을 때여야만 했다.
고지 밑에서도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는지 외침을 멈추고 내가 완전히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평지에 서자 반원으로 산 아래를 감싸고 있던 병사들이 나와 동평을 중심으로 원진(圓陣)을 형성하며 벽을 만들었다. 완전히 출구가 막히자 동평은 그제야 말을 천천히 끌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려오는 데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정녕 용기는 칭찬할만한 하구나.”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나를 보며 동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10년 전 비록 기골은 장대하지만 앳된 10대 중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2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향하고 있는 나였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10년 전, 아니 11년 전이었던가? 우리는 해남도에서 만났지.”
“해남도? 너, 혹시!”
동평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모습이었다.
“준경! 불패가 준경 너였다니!”
동평은 10년 전에도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다며 선배를 자처했었다. 그의 말투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런 동평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눈에 진지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전의가 담겨 있었다.
“불패라는 거창한 명호를 대체 누가 사용하는가 싶었는데 10년 전의 잠룡이 등용문(登龍門)을 올라 불패가 되었구나. 나는 10년 전 너에게 패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강주에서 나를 이길 자는 없는바 이제야 그때의 망신살을 돌려줄 기회가 생겼다. 승부를 피하지는 않겠지?”
“피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내려오지도 않았을 터, 삼 초 내에 승부를 결할 것이오.”
동평은 내 확언(確言)에 분노보다 실소가 먼저 나왔다. 지난 세월은 그에게 참을 수 있는 여유도 주었던 듯싶었다.
“삼 초? 10년의 세월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알겠다. 너 역시 나 못지않게 광오(狂傲)하다는 것을! 누구의 자신감이 더 우위에 있는지 곧 알게 되겠지!”
예전의 대결은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동평이 말에서 내려 나와 겨루었다가 나에게 지구력이 달려 패한 후, 기마 무예로 승부를 다시 재려 했다가 일격에 끝나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쳤었다.
그 이후 절치부심했겠지만, 이번에도 그 결과는 같을 것이다.
“이압!”
그는 처음부터 말을 탄 채로 쌍창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나를 상대로 방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나 역시 말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망간 합금으로 만든 방패가 내 손에 들린 이상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금속 특유의 차가운 느낌이 예전 양규 장군의 수패를 그리워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무와 가죽이 주는 익숙하고 따뜻한 느낌은 그 어떤 병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마음의 느낌이야 어쨌든 나는 나무와 철의 차이점, 그 장단점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동평이 10년의 세월 동안 숙련에 숙련을 거듭한 두 개의 창이 쌍두사(雙頭蛇)처럼 민활하게 움직여 나의 치명적인 요혈(要穴)을 노렸지만 쉽게 막혀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의 10년 적공(積功)을 이미 뛰어넘어 있었다. 과거였다면 합금 방패로 동평이 휘두르는 창 속도만큼 따라갈 자신이 없었겠지만, 이제는 과거 가벼운 수패를 활용하여 속도의 이점을 얻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동평이 예전 노준의의 수준까지 올라왔다면 나는 그 과거를 완전히 탈피했다고 할까? 게다가 사기에 가까운 신병이기가 내 손에 들려 있다.
한 차례 맹렬한 공세를 펼쳤지만, 망간 합금 방패의 반탄력에 창은 빠름을 잊어버렸고 그 사이 허공을 가른 망간 합금 대도가 쌍창을 모두 잘라버렸다. 모두가 ‘어어!’ 하는 사이에 동평의 목 끝에 대도가 닿아 있었다.
“말도 안 돼!”
동평은 삽시간에 승부가 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10년 전에는 패하고도 여유를 가졌지만, 지금은 수치심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강주에 머문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맞춰 볼까?”
동평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어찌 그것을 내가 아느냐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과거 적설 장군이나 포면 대인은 자부심이 강할수록 강해지는 종자가 따로 있다며 그대가 허세를 부리는 것은 그 허세 자체가 자신 스스로 나아가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셨다. 그러나 과신과 허세는 자칫 길을 잘못 들면 파멸로 이를 수 있기에 적정한 수준의 겸양과 인내를 겸비하길 바라셨다. 그대가 나와의 대결에서 패하자 적설 장군은 대명부로 그대를 끌고 가 수련에 매진시키겠다고 했지만, 그 당시 그대의 답변은 무엇이었던가?”
“동평부로 가겠다고 했다. 양산박의 수괴들을 상대하며 수련을 하겠다고 말했지.”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지 동평의 눈빛은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동평부로 가려는 목적은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지 않은가? 동평부 태수의 딸이 예쁘다는 것을 알고 엮어볼 작정이 더 컸었지.”
“아니 그걸 어찌 알지!”
동평은 매우 놀랐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 이곳에는 일천 쌍 이상의 눈이 우리 둘을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각성하기 전이라 동평부로 가겠다는 것을 그저 무심코 넘겼지만 수호전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적설 장군이 죽고 그대는 동평부가 아닌 강주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 스스로 강주풍류천호라 칭했으니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면서 10년의 세월을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의 10년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의 나날이었다. 강주에서 채구의 위세를 등에 업고 골목대장 흉내를 낸 자가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모독하지 마라!”
동평은 반만 남은 2개의 창대로 목에 겨눈 대도를 비켜내고 말 고삐를 잡아당겨 나를 스쳐 지나갔다. 병사들 앞까지 가서야 창 2개를 새로 받아들고 나를 마주했다. 그의 눈에 귀화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진짜 실력이 나올 것이다. 대도로 목을 내려칠 수 있음에도 일부러 틈을 내주고 격동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적설 장군이 구천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경사에 있을 포면 대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놈이 뭘 알아!”
동평이 질주를 시작했다.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바로 이런 것이란 것을 보여주듯 그의 기마술과 쌍창의 현란한 움직임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러나 병기의 유불리에서 차이가 났다. 평범한 병기였다면 족히 반 각 이상은 겨루었을 것이나 일 수에 창대가 싹둑 잘리니 그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나는 동평이 삽시간에 창대가 잘려 당황한 사이 안장과 등자를 연결한 가죽끈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발이 고정되지 못하고 허공을 헛디뎠고 중심이 한쪽으로 기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평은 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포면 대인은 강주 감옥에 있다.”
“뭣이?”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포청천의 후인이자 명성이 쟁쟁한 귀족, 포면이 강주 감옥에 갇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었기 때문이다.
“이제 너와 나의 인연이 여기 있는 모든 병사에게 알려졌으니 나는 더는 강주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포면 대인을 구하고자 채구에게 의탁하여 더러운 일을 자처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튼, 모든 것을 떠나 준경 너에게 감탄했다. 파죽지세란 너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부디 기회가 된다면 포면 대인을 구해주길 간청할 뿐이다.”
나는 동평을 재빨리 부축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과연 적설 장군과 포면 대인이 선배를 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같이 포면 대인을 구합시다.”
“이제야 선배라고 불러주는구나.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주변의 병사들이 누구의 명령을 받았는지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히며 우리 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곳에 나만 있었겠느냐? 내가 패한다면 너 역시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제 나의 목적까지 밝혀졌으니 더더욱 우리 둘은 죽어야 하는 셈이다.”
나는 웃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나름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동평에게 곁에 있던 동평의 말과 내 손에 들린 대도, 그리고 방패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말에 얹은 안장을 치워버렸다.
“호한쌍창장과 불패가 파죽지세로 달리는 한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동평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절망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