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내 말을 듣고 군관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미련없이 그를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관은 나와 떨어지자 뒤로 화급히 물러나며 외쳤다.
“저놈은 혼자다! 저놈을 잡아라!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무시하고 외죽부 고지로 발길을 향했다. 섣불리 덤벼드는 자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포위망을 풀지도 않았다. 명령이 내려졌으니 쫓는 시늉이라고 해야 할 것임을 이해했다.
구릉으로 오르는 초입까지 다다르자 정면을 막고 있는 기병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전혀 공격할 기색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덤비는 나를 보며 당황하던 기병은 이내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내 칼을 막기 위해 창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창대와 머리칼이 한꺼번에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과연 망간 합금의 절삭력은 남달랐다.
“다시 막으면 그다음은 네놈 목이다.”
나는 그를 지나쳐 고지로 올라갔다. 뒤에서 군관이 공격을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저 말 고삐만 잡아당기며 서로 눈치만 볼뿐 쫓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외죽부 고지에서 바라보니 어제보다 더 많은 인원이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제처럼 기병만이 아닌 보병도 포함된 선발대였다. 일부는 개활지에 임시로 나무 벽을 쌓아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려고 했고, 나머지 병력은 인근 지역이 이상 없음을 확인하자 곧장 내가 사라졌던 외죽부로 몰려들었다.
“그냥 봐도 일천이 넘어 보입니다.”
석보는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나를 따라 자신도 활약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여 있기를 한 시진이 지나자 결단을 내렸는지 기병을 제외한 병력 중 600명이 세 방향에서 고지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옵니다! 온다고요!”
장청 역시 신이 났다. 그는 비황석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어서 빨리 저들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궁병이 있다. 각자 눈먼 화살 맞지 않도록 조심해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쏘는 화살에 맞으면 그야말로 웃음거리지요. 더구나 빽빽한 대나무숲을 모두 제거하지 않는 이상 1/10의 화살이나 날아오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화살을 쏘는 것은 우리를 살상하려는 목적보다 고지 가까이 보병을 전진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함성이 점차 커질수록 주위를 가득 메운 병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칼을 뽑아 독려하는 군관들도 사이사이에 있었다.
“석보, 입구를 지켜라.”
나를 대신해서 수적과 산적을 통제하는 것은 석보의 몫이었다. 내가 그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튀어 나가자 뒤에서 석보의 외침이 들려왔다.
“으악, 저도 데려가야지요!”
4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단숨에 오르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든다. 중간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휴식을 취하며 올랐을 테고 고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정렬할 기회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그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50m 정도의 거리를 거침없이 내려가며 함성을 지르자 기세가 넘치던 병사들의 전진은 주춤했다.
“저놈이다! 저놈을 잡아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군관을 보니 이틀 전에 봤던 그 군관이었다.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자였기에 후속 부대에 함께 딸려 보냈으리라.
“저놈을 죽이는 자, 은자 100냥을 내릴 것이다! 어서 공격하라! 적은 혼자다!”
나는 그 군관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은자 100냥이란 말에 좌우에서 창칼이 날아들었지만, 무엇도 나를 상해할 수 없었다. 고지에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으면서 나를 찌르려고 하면 이미 나는 밑으로 전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면에서 나를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내려가는 속도 그대로 칼을 휘두르거나 주먹과 발로 후려치면 마치 낙석을 보는 것 마냥 비탈길 아래로 굴렀다.
“으힉!”
삽시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군관은 뒷걸음칠 치다가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내게 뒷덜미를 잡히자 발이 허공에 떴다 싶다가 주저앉았다.
“은자 100냥이라……. 어디까지 몸값이 올라가는지 그것도 재미있겠구나.”
“네놈이 이러고도 정녕 무사할 것 같으냐!”
악이 바친 군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군관은 현실로 돌아왔는지 눈에 두려움을 담았다.
“이번엔 두 놈이다.”
나는 그의 뒷목을 잡고 근처에서 주춤하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칼은 인정사정없이 허공을 그었다.
“으허헉!”
두 개의 목이 비탈 아래로 굴러 내려갔고, 목 없는 시체 두 구가 뜨거운 피를 흘리며 쓰려졌다. 그 피를 뒤집어쓴 인근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젖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군관의 뒷목을 놓았다. 미처 몸을 가눌 준비도 없이 해방되자 군관은 비틀거리며 밑으로 내려가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러면서 군관이 나를 보는 눈빛은 마치 불구대천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금화 100냥이다! 저놈은 혼자다! 저놈을 죽여!”
나는 다시 움직였다.
금화 100냥은 정말 큰돈이어서 두려움을 참고 덤비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려에도 자신 쪽으로 올까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마치 적군이 나를 토끼몰이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 토끼몰이를 하는 사람은 나인 셈이다.
금화 100냥을 외친 군관은 자신이 다시 목표가 되자 황급히 산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그를 쫓을 마음이 없었다. 아직 군관은 여러 명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한 명을 지목했다.
“가로막으면 다 죽인다!”
그리고 달려갔다. 용감하게 가로막는 자들도 있었지만 단칼에 허리를 자르고, 수급을 날려버리자 서로 눈치만 보며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앞을 가로막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군관은 끊임없이 독려하다가 전면에 오직 나만이 보이자 당황하면서도 칼을 들고 공격을 해왔다.
“그래도 네놈은 아까 그놈보다 좀 낫구나.”
격식도 없이 그저 의욕만으로 휘두르는 칼을 단숨에 저만치 날려버리고 그의 한쪽 허벅지를 절단했다.
“크악!”
대번에 무게 중심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군관의 가슴을 발로 밟아 제압하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놈과 달리 허벅지를 잘려서 억울한가? 칭찬으로 알아라. 베는 부위가 심각할수록 적으로 상대하기 싫어서다. 용감하거나 유능하다는 뜻이다. 너 같은 놈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다 보면 종국에는 나만 보면 꽁지 빠지라 도망치는 비겁한 놈들만 남게 되겠지.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으으으……!”
군관은 허벅지를 감싸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고통이 극심해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눈빛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4명이다. 네놈의 목숨 값이다. 다음 놈은 8명이다.”
군관의 가슴에 얹고 있던 발을 떼고 다시 쾌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4번의 비명이 들렸고, 4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괴물이다!”
병사들은 기가 눌려 독려도 더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니 제대로 전투가 될 리 없었다. 몇 남지 않은 군관들은 내가 자신을 가리키지 않을까 두려움에 차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후퇴가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후퇴를 외치며 산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 나는 여유롭게 고지의 진영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니 다들 입구에 나와 있었다.
“와, 진짜 장군의 신위(神威)는 천하제일입니다. 다들 놀라는 거 보이십니까?”
석보가 껄껄 웃으며 산적과 수적 패거리들을 가리키자 그들은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내 밑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새였다. 어차피 그런 것도 노린 것이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직 더 좋은 구경거리가 남아 있다.”
“더 좋은 구경거리라니요. 설마 강변에서 금군 본대를 상대로 한바탕 하시렵니까? 금군 4만에 둘러싸인 채구를 사로잡는다면 저는 그냥 장군을 신으로 여기렵니다.”
“글쎄 필요하다면 그리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벌어질 일은 예상된다.”
천하에 내 명성을 빠르게 높일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유염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무엇보다 누구나 인정할만한 공적을 쌓는 것이 우선이다.
“이 정도 되면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무예가 뛰어난 자를 보내 나를 꺾으려고 할 것이다. 과연 누구를 내세울까?”
“장군은 누가 올 것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송 군부의 최강자는 하북삼절의 일인이자 대명부의 자랑, 옥기린 노준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요나라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니 쉽사리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송 군부에서 이곳으로 파견할 만한 인물은 오직 하나만 남는 셈이지요.”
장청의 유추에 능진의 눈이 반짝였다.
“철대인 이탁? 장군께서는 설마 그자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위는 야단법석이었다. 이준조차도 흥분되는지 그게 정말인가를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내 바람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정녕 그와 다시 겨루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이탁은 소림승에게서 외가기공을 익혔다. 그의 몸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고 그가 휘두르는 도는 어떤 것도 일격에 조각을 내버리지. 그는 자신의 거리에 들어온 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근접으로 붙어 이탁을 이긴다고? 더 나은 기량으로 난자(亂刺)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노준의가 아직 잠룡에 불과하다면 이탁은 현실적으로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자이다.
10년 전, 단정홍이 나에게 이탁을 설명했던 것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에 이르러 하북삼절의 수좌를 노준의가 차지했다지만 둘이 붙어서 순위가 결정 난 것이 아니라 노준의가 요나라를 상대로 눈부신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5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송군은 속속 강 양변의 개활지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파다한 듯 외죽부 고지 밑에서 철저하게 내려오는 것을 막을 뿐 진영을 제대로 구축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한 번쯤 흔들 시기도 보였지만 나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나를 상대하기 위해 누군가를 불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숨에 부술 작정이었다.
그리고 6일째가 되던 날, 한 떼의 인마가 먼지를 휘날리며 개활지를 횡단하고 고지 아래까지 다다랐다.
다들 올 것이 왔다며 얼굴을 내밀고 누가 왔는지 지켜보는 모습은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전혀 자각한 모양새들이 아니라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가장 시력이 좋은 장청이 뚫어지게 인마를 바라보다가 선두에 선 장수의 뒤에 꽂힌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는지 읽어 내려갔다.
“강주풍류천호(江州風流千戶) 호한쌍창장(好漢雙槍將)? 뭐 이런 군기(軍旗)가 다 있습니까?”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별호와 다르지만, 별호를 스스로 만들어 자랑스럽게 내거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 작품 후기 ============================
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은 매일 글을 쓸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필명이 바뀌어서 이상타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 같은데 제 이름을 걸고 글을 제대로 쓰겠다는 다짐으로 받아들여주십시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삼국지 편의 저작권 등록도 이미 실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삼국지편과 마찬가지로 고려편, 불꽃처럼도 노블레스 일반으로 낮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