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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65화 (165/257)

00165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선발대가 순천에 진입했습니다.”

그 사이 외죽부 정상은 150명의 인원이 북적이는 작은 산성으로 변해 있었다. 화포를 다루기 위한 필수 병력 30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4대강 패거리의 수뇌들과 몇몇 수하, 인근 산채에서 갖은 협박과 회유 끝에 끌려온 산적 수뇌들과 그 일행들이었다. 산적들은 이곳에 와서야 속은 것을 알고 펄펄 뛰었지만 나와 겨루고 난 다음에는 모두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내려준 창칼을 받고 더욱 조아리게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능진이 제련한 창칼을 받고 무슨 신병이기라도 되는 양 감격에 겨워했으니 말이다. 나에게 대들다 맞고 신병을 얻었으니 의도치 않은 어르고 달랜 격이었다.

나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제련된 대도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방패도 있었다. 방패는 내가 필요하다고 하여서 하나만 급히 만든 것이었으나 송군의 진군이 늦어지면서 일백 개 정도가 완성되었다. 급히 만든 탓에 내 것보다는 조금 질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살로부터 몸을 방어하는 데는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복건 일대의 산지는 각종 광석의 보고였고, 그것을 다루는 이는 수호전에서 천하에서 가장 화포를 잘 만든다고 공인한 능진이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솔직히 그가 쇠를 다루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놀랐었다. 새삼 역사책에서만 배우던 송의 과학기술을 유감없이 보게 된 것이다.

송은 요, 금, 서하 등과 계속 분쟁을 겪다 보니 한 해 철 생산량이 1천만 근에 달할 정도였다. 자연히 철을 다루는 기술 또한 발전하여 해탄(骸炭, 코크스)으로 선철(銑鐵, 무쇠)을 녹이고 상자형 풀무 안에 밸브(Valve)의 원리를 적용하여 하나의 피스톤(piston)을 교대로 밀고 당겨서 공기를 계속 주입하는 용광로를 만들어 사용했다.

뛰어난 장인들은 그렇게 나온 쇠를 몇 번이고 제련하여 녹이 슬지 않고 더욱 단단해지는 비법을 발견했다.

능진이 바로 그런 장인이었다. 선철과 단철(單鐵, 무쇠를 여러 번 단련한 쇠)을 함께 녹인 후 산소를 주입하여 탄소를 제거하고 냉각시키는 방법으로 강철을 생산한 것이다.

송에서 이러한 강철 제련법은 40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널리 퍼진 것은 앞으로 20년은 더 흘러야 한다. 재미있게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사람이 바로 이소의 아들, 이강이다.

강철은 열처리와 담금질 기법에 따라 능력 있는 장인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내가 능진에게 놀랐던 것은 그가 그냥 강철을 뽑는 것이 아니라 망간 강철(manganese steel)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놀라서 어떻게 알았느냐며 물었을 때, 능진 역시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며 크게 놀라워했었다.

보통 자연 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연망가니즈석(이산화망가니즈, MnO2)으로, 고대 이집트 때부터 쓰이던 천연물감이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원시인들이 동굴 벽화를 그릴 때 사용하던 물질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라스코 동굴 벽화에 쓰인 물감에 망간 성분이 섞여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로마나 그리스인들은 유리를 투명하게 제조하기 위해 투입하는 약품으로 쓰기도 했다.

현대 중국에서 망간의 매장량을 4억 톤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치가 있으니 발에 채도록 흔하디흔한 광석인 셈이다.

“화포를 주조하면서 이것저것 넣어 보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맹석(?石, 망간)을 넣었을 때 쇠가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래서 맹석을 따로 숯에 가열한 후 다시 넣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무릎을 쳤었다. 고순도의 망간은 전기분해로 얻을 수 있지만, 저순도의 망간은 숯과 함께 가열하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었다.

텅스텐과 강철을 섞는다면 더욱 단단해지겠지만, 텅스텐의 녹는 점이 4천도가 넘는 것을 고려하면 1200도에서 녹는 망간은 이 시대 강철과 접목할 수 있는 가장 첨단의 합금이라 할 수 있었다. 능진은 화포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 만드는데 그토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던 것이다. 자신만의 기술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망간과 강철을 혼합하는 작업은 직접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저망간 강철로 만들어진 병기가 150명에게 지급되었다. 화포를 만들려고 미리 작업해둔 저망간 강철이 모두 쓰인 것이다.

고망간 강철쯤 되면 핵융합로, 터빈 발전기, 철도 레일, 전차의 무한궤도에 쓰인다. 저망간 강철은 흔히 듀콜강(ducol steel)이라 부르며, 철골, 교량, 함선용 부품, 공구 등에 쓰인다.

현대의 저망간 강철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시험해본 바로는 병사들의 창날을 단숨에 자를 정도였다. 그러니 산적 수괴들이 자신들이 들고 있던 도를 냉큼 버리고 신줏단지 모시듯 귀히 여길 법했다.

“한참을 기다린 손님인데 인사를 하고 와야겠지.”

나는 대도를 어깨에 걸머지고 천천히 내려갔다. 선발대라고 하니 본대는 최소 하루 이틀은 있어야 올 터, 그전에 약이나 올릴 생각이었다.

“장군, 저도 갑니다!”

장청이 재빨리 쫓으려고 하자 나는 손을 저었다.

“너는 능진을 도와 염초를 모으는데 매진하라 하지 않았느냐? 조금만 있으면 싫다고 해도 실컷 싸우게 될 것이다.”

“장군, 오줌 냄새가 지긋지긋합니다. 저도 시원한 강바람 좀 쏘이고 싶습니다.”

이준도 있었지만 석보와 장청은 혹시 모를 패거리와 산적들의 예기치 못한 행패를 막을 수 있는 보루였다. 특히 장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그의 돌팔매질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쓸모 있는 재주였기 때문이다.

“화약의 양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일은 더욱 수월해진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면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아라.”

대나무로 빽빽하여 낮에도 어두운 숲은 염초를 얻는 데 최적지였다. 물기가 있고, 응달이 졌으며, 동식물이 썩으며 소금기를 머금고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흙을 모아 오줌과 재를 섞는다. 그런 이유로 오줌마저 허투루 버릴 수 없으니 고지는 온통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찼다. 그렇게 섞은 흙에 동물의 변을 덮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 두 마리를 건성에서 일부러 끌고 왔다. 지금은 애지중지하며 변을 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면 안줏감이 될 운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변이 마르면 거기에 불을 붙여 태우고 그 흙을 다시 잘 섞어 준비해둔 통에 넣어 물을 붓는다. 그렇게 흙과 물이 뒤섞여 나온 용액을 가마 속에 넣고 끓이기를 세 번 거듭하고 식혀서 결정으로 만들면서 그제야 염초를 볼 수 있다.

정말 지루한 과정이었다. 나라면 저 방법을 알아도 붙어서 계속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건 4대강 패거리나 산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작업을 할만한 사람들은 장청과 화표병이었다.

걸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진지 한쪽에서 염초를 만들고, 배합한 흑색화약을 종이로 밀봉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이지만 밀봉한 이유가 화탄의 장전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밀봉했을 때, 화약의 연소 속도가 빨라진다는 말이었다.

진지를 빠져나가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적마다 주변을 배회하며 지리를 충분히 익혀두었던지라 헤매는 일은 없었다.

200m를 단숨에 내려가 동쪽을 바라보니 내가 일부러 찾을 것도 없이 200명의 기병이 일직선으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주둔한 고지가 이 일대 평야의 서쪽 끝자락이 되니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있는 자리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선두에 선 군관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당연히 이상했을 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송군의 군관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다만, 다른 것은 가슴의 하얀 장식이었다. 병사들의 복장을 한꺼번에 바꿀 수가 없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바꾸지 않기를 무척 잘한 일이었다.

이번 전쟁의 전략은 옛 전쟁을 모태로 하고 있었지만, 전술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군관을 향해 단숨에 도약했다.

군관이 놀라는 사이, 착지와 동시에 칼등으로 말의 다리를 후려쳤다.

말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자, 군관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몸은 계속 바닥으로 쏠렸다.

나는 버티는 그의 발을 잡고 그대로 끌어내렸다.

그가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자 나는 재빨리 말로 뛰어올랐다.

기병들이 동요하며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적군이다!”

떨어진 군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사이 나는 곁에 있던 두 놈을 다시 칼등으로 떨어트리고 말의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말이 허공을 날자 착지 지점에 있던 기병들은 당황하며 옆으로 고삐를 틀었다.

나는 대도를 휘둘러 다시 두 명의 허벅지를 벴다. 고통스러워 하는 그들을 발로 차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렇게 10명을 쓰러트린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한 명이라고 너무 얕잡아 봤던 탓이기도 하고, 동료가 당하고 있음에도 말을 뒤로 빼는 기병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송군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칼등에 맞고 급한 기동을 펼친 탓에 절룩거리는 말에서 나는 내렸다.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음에도 기병은 주위를 포위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우 몸을 추스르려던 군관에게 다가가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군관은 허공에 떴다 싶더니 바닥에 나뒹굴었다.

끙끙거리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이 상황이 정말 의외인 듯 내가 묻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반란군인가?”

“아직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보군. 다행으로 생각해라. 너를 통해 채구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 너를 살려 줄 생각이다.”

살려주겠다는 말에 군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나도 남는 것은 있어야겠지. 너를 대신해 죽어야 할 놈이 있다면 한 명만 꼽아라.”

“뭣이?”

“목숨 값치고는 싼 게 아닌가? 원래 죽었어야 할 목숨, 다른 이의 목숨으로 살려주겠다는데 말이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쓰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10명의 병사를 가리켰다.

“자, 이 중에서 하나 골라라.”

병사들은 이미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하나같이 눈빛이 경악에 차 있었다. 군관의 시선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을 휘저었다.

군관이 머뭇거리자 나는 다시 손가락을 포위하는 기병 쪽으로 돌렸다. 손가락이 향하는 곳마다 기병들은 사색이 되어 애써 피하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느새 포위망이 무너져 있었지만, 이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놈인가? 아니면 저놈인가?”

내 손가락이 여기저기를 가리킬수록 병사들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군관이 계속 망설이자 나는 마치 영화 속의 비열한 악당처럼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열을 셀 동안 한 명을 찍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살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기꺼이 죽여주마. 어차피 내 말을 전달할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법 빠르게 숫자를 헤아렸다. 여덟이 나왔을 때, 군관은 땀을 비 오듯이 쏟아내며 쓰러진 자 중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목을 당한 병사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으나, 곧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내가 군관의 멱살을 잡고 그 병사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포와 체념, 절망이 감돌면서 손가락으로 군관을 크게 욕하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욕을 계속 들으니 군관도 화가 났다.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읊으며 ‘일개 미천한 병사 따위가!’라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칼을 들어 말없이 병사의 목을 잘랐다.

‘미안하오. 전쟁에서 군인은 온 힘을 다해 적을 상대하는 것. 변명 따위는 하지 않겠소. 다만, 그대의 죽음으로 이 전쟁은 더 적은 피로 끝날 수 있을 것이오.’

단숨에 병사의 목이 잘리자 군관은 호통을 치다가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네놈이 듣기 싫어하는 것 같아 빨리 끝냈다. 그편이 너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약속대로 네놈을 보내주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채구에게 똑바로 전하도록 해라.”

군관은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을까? 그를 지켜보는 기병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험악하다는 것을…….

“오늘은 1명이었지만 다음 놈은 2명이다. 그다음 놈은 4명이다. 그 다음다음 놈은 8명이다.”

“그게 무슨…….”

나는 군관의 멱살을 당겼다. 얼굴이 나와 닿을 듯하자 그는 잔뜩 겁먹으며 긴장했다.

“그게 채구와 네놈들의 목숨 값이다. 좋겠구나. 목숨이 아홉 개라는 고양이보다도 오래 살게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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