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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63화 (163/257)

00163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갑작스러운 공격에 기병들은 당황했다. 게다가 지휘관마저 사망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며 갈팡질팡하다가 공격을 받고 한 명씩 말에서 떨어졌다.

한 식경이 지나고 그들은 포승에 묶여 경매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후회할 것이다.”

선임으로 보이는 자는 표정부터 독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이런 수모를 처음 당해봤다는 뜻이리라. 북방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대명부의 기병들이라면 몰라도 남부의 기병들은 채구의 사병에 가까운 자들이라 탐관오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남창의 금군 3만과 강주 수군 2만이 수륙(水陸) 양면으로 남하하고 있다. 있던 병력마저도 해산하여 겨우 1만에 불과한 너희가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지. 우리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개심의 여지가 없다 판단하여 건성의 기왓장 하나, 개새끼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불사르고 파괴할 것이다. 설사 네놈이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동조한 무지렁이들을 가만히 둘 성싶으냐. 복건에 피바람이 일 것이다. 그것은 모두 네놈의 죄다!”

건성을 얻은 지 한 달이 넘었다. 관리 중에는 내 밑에 있기를 거부하고 떠난 자도 있다. 상인들이 오가며 이런저런 정보도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출병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두 달은 넘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일부러 1만의 병력을 고집한 것은 그들이 쉽게 원정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수만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이 결정을 내린다고 금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 두 달이라 여겼는데 내가 거병한 지 한 달 만에 5만의 토벌군을 출병시켰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복건의 일 년 치 조세가 어중이떠중이에게 넘어가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너희를 먼저 보내 경매를 지연시키려 했고…….”

주머니 속의 재물이라 여겼던 것을 남이 가져갔다고 생각하면 열불이 날 것은 당연지사였다. 어서 빨리 회수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어용차원까지 끼어 있다.

이 기회에 복건을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명분과 황실의 어려움을 해결했다는 명예까지 생긴다. 게다가 전력은 압도적으로 자신들이 위다.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만 있다.

송의 토벌군이 밀려온다는 말에 상인들을 분분히 흩어졌다. 경매도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오래 남아 보았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성도 동요하고 있었다.

내가 건성을 공격했을 때 백성은 거의 손해를 입지 않았지만 송의 기병은 완전한 말살을 천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성과 병사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리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곁이 있던 이소에게 명령했다.

“이 선생은 재상을 도와 민심을 안정시키십시오. 외려 잘되었습니다. 지금 저들의 전력을 단숨에 붕괴시키면 당분간 복건으로 투사(投射)할 수 있는 전력이 없습니다. 시간을 벌기 위한 사신이 오겠지요.”

다섯 배의 병력 차를 어찌 이길 것이냐며 궁금할 법도 했지만 이소는 그저 손을 모아 따르겠다고 답했다. 유염이 옆에서 나직하게 ‘말은 참 쉽구먼…….’이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있었다.

할 수 없는 일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임을 이소와 장상영은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준, 매괴, 백서, 안석.”

인근 4대강의 수령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건성에 다다르기 전에 수륙 5만의 병력이 모일 수 있는 적당한 평지가 있는가?”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순창(?昌)입니다. 여기서 서북으로 대략 150리쯤 됩니다. 곧장 가면 80리쯤 되지만 병력이 많으면 구불구불한 강변을 따라 행군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안석이 먼저 아는 척하며 나서자 질 수 없다는 듯 매괴가 끼어들었다.

“순창은 민강의 상류 하천인 금계(金溪)와 부둔계(富屯溪)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식수도 풍부하고 야영하기에도 더할 나위가 없는 곳이지요.”

민강을 가장 잘 아는 자는 넷 중 백서라고 봐야 했다. 백서는 먼저 발언한 두 사람을 보며 살짝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그 정도냐는 투였다. 두 사람은 울컥했지만 내가 있는 자리라 눈을 부라리는 선에서 끝이 났다.

“남창에서 이곳까지 병사들의 행군로는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무이 산맥이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지요. 남창의 금군은 필시 보산(?山) 방면에서 순창으로 진입할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가장 자주 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강주 수군이 배를 댈 장소입니다.”

“배를 댈 장소?”

“폭이 좁아 전선 다섯 척이 동시에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2만의 수군이 몰려온다니 그 근방에 어찌어찌 정박시킨다고 해도 출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내 머릿속에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네 명은 서로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다며 아옹다옹했다. 바닥에 그림까지 그리는 정성을 보여준 덕에 밑그림은 더욱 자세해졌다.

나는 성으로 급히 향하여 석보와 능진을 만났다. 경매 중에 장상영을 보필하라는 임무가 끝난 탓인지 장청은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내일 나는 순창으로 향할 것이다. 화포가 필요하여 모두 동원할 예정이다. 4대강 패거리들이 도울 것이다. 석보, 능진, 장청 모두 나와 함께 간다.”

“순창이라니요? 그곳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병사를 훈련하느라 한창인 석보였다. 그는 자신을 대동하겠다는 나의 말에 화색을 보였다.

“순창에서 강주 수군 2만과 남창 금군 3만이 합류할 예정이다. 그곳은 강폭이 좁고 인근에 산이 있다고 들었다.”

“설마 화포가 필요하다는 것이……!”

“선두의 전선들을 격침하면 뒤의 전선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이 된다. 전선이 엉키면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3만의 금군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그런 지형에 수군만 들이밀지 않습니다. 금군이 먼저 진영을 구축하고 수군을 불러들이겠지요.”

“3만의 금군은 나와 석보, 장청이 상대한다. 우리가 버티는 사이 수군이 민강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면 그들은 보급할 길이 막막해진다.”

“흠, 그렇군요.”

석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능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석보의 옆구리를 쳤다.

“지금 뭐가 ‘그렇군요.’입니까! 장군이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3명이 3만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이건 보산의 제천대성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능진의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순창이 제천대성의 발원지라는 것이 떠올랐다. 서유기의 모태가 되는 셈이다. 그런 곳으로 내가 간다.

석보는 능진의 핀잔을 받았지만 무덤덤했다.

“뭐 제천대성도 가능하다면 장군도 가능할 것 같은데…….”

“허, 거참…….”

석보가 내게 보여주는 과도한 믿음에 능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천과 평야가 훤히 보이는 고지를 먼저 선점한다. 명중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그냥 쏘기만 해도 뭐든 맞을 테니까.”

고지 선점의 중요성은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화포가 있다. 소수로 방어하기에 좋은 고지를 고른다면 큰 피해 없이 적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남북전쟁의 향방을 가른 게티즈버그 전투가 그러했고, 가까운 6·25전쟁 때만 하더라도 산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고지 전투가 벌어졌다.

능진은 나와 석보를 못 말리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타협안을 제시했다.

“정 그렇다면 하루만 출발을 더 늦추십시오. 병사 중에 순천 지리를 잘 아는 자들이 많습니다. 먼저 출발하여 요지를 점하는 것보다 미리 알고 가는 것이 시간을 버는 길입니다. 그리고 남는 배가 있으면 길목에 미리 자침을 시켜 혹시 모를 강행돌파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옳았다. 내가 원하는 장소는 촉도(蜀道, 촉으로 가는 길)처럼 한 사람이 능히 일만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직 그 길이 아니면 절대 고지로 오를 수 없는 장소는 아무리 산이 많은 순천이라고 해도 흔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침 능진의 요구에 맞는 배들이 있었다. 안남과 대리의 상인들이 두고 간 다섯 척의 배가 있지 않은가?

“구름이 걸려 있는 산이라면 좋겠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제천대성 놀이를 하려면 그쯤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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