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나는 주먹을 쥐고 그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 이준경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친 손이었다. 투박한 손이지만 이 손은 내게 힘을 주었다. 과거의 나에게 힘까지 주어졌다면 나는 다른 행보를 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준경이 되겠다. 아니 이준경을 뛰어넘겠다.”
과거의 업적을 뛰어넘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보가 아닐까? 승상으로서의 경험과 황제로서의 경험, 그리고 군 지휘관으로서의 경험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과거보다 못하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유염은 빙그레 웃었다.
“포부가 매우 듣기 좋습니다. 율학자들은 하나같이 이준경을 닮길 원했는데 장군은 이준경을 뛰어넘겠다고 하니 과연 그 배포가 천하제일입니다. 저 또한 그 배포에 걸맞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소문을 내는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방면으로 일가견이 있으니 한 달 이내에 천하는 장군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유염과의 대화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저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이렇게 끝맺을 줄 누가 알았을까? 경매에 참가한 상인 대다수는 우리에게 신경을 쓰기보다 유염이 외친 100문의 가격을 웃돌아 입찰할 것인가? 무엇을 담보로 낙찰을 받아야 하는가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이준경이 되라고 권한 유염이나 그것을 받아들인 나나 차후 사서에서 뭐라고 기재할까 생각해보니 참으로 재미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젠장 관자가 안된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으니 우리는 몸으로라도 때우겠소. 원하는 물량은 2만 근, 근당 101문. 그 금액에 해당하는 만큼 우리를 부리시오. 먼저 1/3을 챙기고 나머지는 후불로 받겠수다.”
심양강 패거리 중 일인인 장횡이 자신들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하자, 현물이 없어 구경만 하던 간강과 민강, 무하 패거리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게 받아들여진다면 자신들도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받아들이겠다.”
장상영은 고민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앞다투어 같은 방법을 제시한 자들이 나왔다.
나는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지었다.
“형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것 아니었습니까? 형님이 신위를 떨치시긴 했지만, 사람이란 역시 오래 부대껴봐야 참모습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릉이고 강주고 배와 사람이 있어야 비벼볼 텐데 이들은 하나같이 노련한 뱃사공들입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장상영의 외침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전쟁을 치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대들이 이런 제의를 한 것은 기꺼이 참가하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물류를 대신해줌으로써 값을 치르려던 상인들은 날벼락을 맞은 인상이었다.
“정말 독한 놈들만 남겠군. 반란군으로 수배령이 떨어져도 눈 깜짝하지 않을 놈들만 말이야.”
“거친 놈들이지만 형님이라면 충분히 다스릴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준은 당황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며 재미있는지 히죽 웃었다.
“무슨 이런 경매가 다 있소? 관자도 받지 않고, 교인도 받지 않으며, 물건을 얻기 위해 반란군에 들라고 대놓고 선동하다니……. 이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요! 망조(亡兆)다, 망조야!”
“그렇게 불만이면 떠나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대들이 남아 있는 이유를 말해볼까?”
장상영은 노련했다. 그는 장거정이나 사마광만큼 문학이 깊지 않을지언정 현실 정치는 둘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필시 이곳에는 남창과 강주에서 온 상인들이 있으렷다. 그중에는 관부의 간자도 있을 터,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캐기 위해서는 끝까지 버텨야겠지.”
동요하는 자들이 나왔다. 급히 빠져나가려는 자들도 있었다. 혹시나 관부의 간자에게 찍혀 수배령에 오르면 어쩌나 걱정하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상인들도 존재했다. 안남과 대리의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의견 일치를 보았는지 동요 속에서도 담담히 자신들의 제안을 밝혔다.
“차 5만 근에 101문, 싣고 온 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금, 은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양입니다. 우리는 다른 품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차에만 관심이 있으니 쌀을 내리고 차를 실으면 배가 5척 정도 남을 것 같습니다. 배 다섯 척을 내놓고 차 1만 근을 더 해준다면 그쪽도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좋다. 그 제안을 수락한다.”
장상영은 시원시원했다. 어차피 계속 가지고 있어봐야 제대로 된 판로를 구하기 전에는 자리만 차지하는 잉여 물산이었기에 어느 정도 선에서 빨리빨리 처분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안남, 대리 상인들이 합쳐서 6만 근, 심양강 패거리가 2만 근, 무하, 간강, 민강 패거리가 각 1만 근을 낙찰받아 이제 남은 것은 19만근 정도였다.
유염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보아하니 더 살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나머지는 제가 다 사는 것으로 하시지요. 대량 구매이니 가격은 아까 말한 100문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계약금으로 소지하고 있는 은 1천 민을 내놓고 한 달 이내에 필요한 물품 또는 은전으로 완납하겠습니다.”
19만 근이면 개인이 다 사기에는 엄청난 물량이기는 하다.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야 하지만 유염 같은 거상은 사놓기만 하면 어떻게든 다 팔고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천주는 아랍 배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 말이다. 경매를 빌미로 실제로는 내게 군자금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다른 상인들은 입맛만 다셨다.
장상영은 다음 품목으로 복건의 또 다른 특산품인 종이를 꺼내 들었다. 차보다 이문은 떨어지지만, 판매는 오히려 더 수월한 품목이었다.
값이 차보다 싸니 자신들이 소지한 현물을 대입하며 슬금슬금 찔러보는 자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가지고 갈 수 있으면 무조건 이문이 보장되니 욕심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끌고 온 배를 맡기는 자가 더러 생겨났고, 온갖 패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상영은 관자나 교인을 받지 않는 대신 싼값에 서슴없이 넘겼으므로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났을 때, 포구가 아닌 북쪽 소로에서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수십의 기병이 있었다. 선두에는 채(蔡)라는 글자가 선명했는데, 그 깃발을 보자마자 놀라며 주변으로 숨는 상인들이 있었다.
인근에서 채라는 글자를 쓸 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강주의 채구였다. 겨우 수십 기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전령의 의도가 강한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질주를 멈추지 않던 그들을 피해 사람들은 썰물처럼 갈라졌다. 마침내 장상영이 있는 단상 근처까지 다다르자 선두에 선 장수가 거만한 표정으로 창끝을 장상영에게 향했다.
“당장 이 경매를 멈춰라!”
장청이 즉각 장상영 앞으로 나서며 비황석을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선두에 선 장수는 영문도 모르고 비명횡사할 것이다. 나름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장상영은 느긋했다. 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아느냐?”
“본관이 너 같은 늙은이를 알 까닭이 있겠느냐?”
강주가 건성에서 570Km, 그나마 가까운 남창에서 출발한다고 쳐도 대략 430Km 정도다. 장상영이 합류한 것이 이제 삼 일 정도이니 이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장상영이라는 사람이다.”
“장상영? 네놈이 장상영이면 나는 왕안석이다!”
장상영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군관이 거침없이 폭언을 일삼는 것을 보니 평상시에 백성을 어찌 대할지 눈에 보였다. 용건이야 들어보았자 뻔한 것이니 나는 이들에게 기꺼이 교훈을 내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나보다도 한발 먼저 나서는 자가 있었다.
“이 개새끼야, 네놈이 뭔데 반산(半山) 선생을 들먹이며 욕보이느냐! 비루한 네놈이 함부로 올릴 그런 이름이 아니다!”
무하의 안석이었다. 패거리들이 말리는데도 그냥 뛰쳐나간 것을 보면 정말 왕안석을 존경했던 모양이다. 현대도 고향에서 유명인이 나오면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주변에서 장상영을 가리키며 ‘진짜 천각 선생이 맞는데…….’라며 수군거리기까지 하자 군관은 말을 돌려 중인을 향해 창을 크게 휘둘렀다. 안석이 그 위세에 잠시 주춤한 사이 군관이 소리쳤다.
“설사 장상영이 저자가 맞다 한들, 불충한 죄인에 불과하다! 잘 들어라! 너희는 도당을 결성하고 감히 국가의 조세를 빼돌렸다! 강주 지부(知府, 채구)께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접하시고 즉시 우리를 보내 반란 도당에게 엄한 문책을 경고하라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곱게 죽을 방법은 오직 하나, 빼돌린 조세를 모두 원위치시키고 스스로 포승을 묶는 길뿐이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고, 반산 선생을 욕보인 것을 사죄해라.”
안석이 다시 달려들려고 했지만, 철벽에 가로막힌 듯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내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안석을 눌러두고 앞으로 나서자 주변에서 환호를 지르는 자들이 있었다. 재미있는 구경을 다시 볼 것 같다는 기대감이라고 할까?
군관은 나를 향해 창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살기를 뿜었다.
“거참 반란 수괴를 만나 지부의 경고를 전해야 하건만 어찌 이리도 엉기는 놈들이 많은 것이냐!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경고 잘 들었다.”
군관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내 말뜻을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는 내 가슴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네놈의 경고가 여기에 그리 와 닿지 않으니 말이다.”
“네, 네놈이 반란 수괴인가!”
“그렇다면.”
“당장 경매를 중단하고 전매품을 모두 거둬들여라!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앞에 수괴 전원이 무릎을 꿇고 포승을 한 후……. 으헉!”
다 듣기 괴로울 정도의 유치한 협박이라 나는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말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뒤틀자 군관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군관을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기병들이 내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전에 군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잘 들어라.”
“허헉!”
머리채를 강하게 낚아채니 군관은 머리가 순간 꺾이며 일시에 숨쉬기 괴로운 상태가 되었다. 수십 개의 창이 사방에서 나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들 주위는 건성의 병사들과 패거리들이 다시 둘러싼 형국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곱게 죽는 것과 지저분하게 죽는 것의 차이가 대체 뭐냐? 어디 말해봐라. 네놈이 선택한 방식으로 죽여주지. 구천에서 그 차이를 어디 나에게 설명해봐라.”
“나는……. 사자(使者)다. 고래로 사자를 죽이는 법은……. 컥!”
머리채를 다시 강하게 잡아당기자 군관은 괴로운지 눈물이 쏙 빠졌다.
“법 조문에 사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나라가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봐라.”
“그, 그게…….”
군관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법이 아니라 그냥 관례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너희가 원하는 답은 포승을 묶고 무릎 꿇고 목을 길게 늘어트려라. 이건가? 그럼 너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지. 이 자리에서 당장 포승을 묶고 무릎을 꿇고 목을 길게 늘어트려라. 적이지만 곱게 죽여주마.”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나.”
“그럼 우리는 왜 너희의 말을 따라야 하나.”
“그거야 네놈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느냐!”
“참으로 대단한 셈법이군.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들지 않느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네놈들을 그냥 죽여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군관은 고통과 함께 몸을 허우적거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에 떠오르는 것은 굉장한 두려움을 수반한다.
내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군관의 전신이 햇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네놈이 사자가 맞긴 했구나.”
“그래, 나는 사자다.”
군관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말하는 사자(死者)는 처음 보았군. 구천에서 나머지를 들어라.”
나는 창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군관을 휙 던졌다. 기병들이 창을 회수하려 했지만, 반응이 그리 기민하지 못했다. 다섯 개의 창에 등을 찔린 군관이 비명을 질렀고, 나는 남은 기병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작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