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0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수도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 중원인들이 아닌 듯 보였는데 아마도 대리나 안남의 상인들은 아닐까 싶었다.
어쨌거나 내정의 전권을 장상영에게 모두 부여하기로 한 마당이다. 나는 앞으로 닥쳐올 토벌군을 상대할 생각에 몰두하기로 했다.
본래 내 실력을 이 자리에 모인 상인들에게 과시하고 몇 마디 자극적인 발언들로 천하를 도발하려 했으나, 장상영의 등장으로 훨씬 긍정적인 광고 효과가 나왔다.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기에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상영의 등장은 불철주야 관내의 자료를 정리하고 그 자료를 토대로 체제를 바로 세우던 관리들에게 한 줄기 소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떠올랐다.
이틀 정도가 흘러 정식으로 경매가 열렸고 야성 주변으로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인파가 몰려들었다. 상인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들을 상대로 물건을 끼워 팔기 위한 자들이나 인부로 고용되길 원하는 자들, 구경을 위해 온 자들이 뒤섞이며 경매는 성황이었다.
경매가 열리기 전, 이틀 동안 나는 장상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백성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장상영에게 털어놓았고, 이후 장상영이 벌일 개혁의 기초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장상영은 내가 생각지 못한 세밀한 행정들을 논하며 나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장상영 밑에서 이강이 제대로 자라준다면 최소한 몇십 년은 따로 재상을 구할 필요가 없기에 더 좋았다.
첫 경매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경매였기에 장상영은 본인이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휘하의 문관들이 모두 매달려 경매로 벌어들일 수익을 계산하고 쓰일 곳을 정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초나라의 총사였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외치를 나갈 때면 노숙, 진군, 화흠, 한호 등은 저렇게 머리를 싸매며 밤새도록 일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때보다 지금이 더 편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장상영이 말하자 그 말을 그대로 장천이 중인들에게 외쳤다. 연로한 사람을 대신해 목청이 큰 사람이 대신 외치는 경우는 흔하게 있어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나는 단상에 몰린 중인들을 피해 거의 뒤편에 서 있었는데 이미 나의 얼굴을 다들 아는지 옆으로 붙는 자가 한 명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 한 명은 이준이었다.
“먼저 차 경매에 들어가겠소. 거래 물량은 5만 대근(大斤).”
처음엔 자잘한 물품들이 나오다가 차는 거의 막바지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중인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운신하고 있는 간강, 무하, 안석, 심양강 패거리들도 있었다.
이준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5만 대근이면 작년 서하에 세폐(歲幣, 조공)로 내놓은 물량과 같군요. 엄청난 양입니다.”
이 당시 무게를 잴 때 쓰는 단위를 근(斤)이라 하는 것은 오늘날과 비슷하다. 국가 간의 무역쯤 되면 근의 규모가 커져서 장부에 기록하기 어렵자 대근이라는 큰 단위를 만들어 사용했다. 대근은 그때그때 조정되었는데 지금 시기는 대략 6근을 1대근이라고 셈하고 있었다. 즉 5만 대근이면 30만근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제 그에게 미리 들었던 승부수가 나올 차례였다. 그가 생각한 결과대로 과연 될까?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경매의 최저 단가는 10문.”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고,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 큰 소리로 장상영을 향해 외쳤다.
“정말 10문부터 시작한단 말입니까?”
“본관은 지금껏 허튼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장상영의 단호한 대답에 이준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다.”
“설마 지금 복건차가 얼마에 팔리는지는 알고 계획하신 거겠지요?”
“평균치를 따져보니 152문이더구나.”
“그러는 분이 지금 경매 최저가를 저리 시작하셨습니까? 다들 눈치를 보면서 가격을 더디게 올릴 것입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좋다고 재상과 내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조금만 더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입을 꾹 닫자 이준은 의문을 없애지 못하고 단상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이준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확인했지만, 장상영은 틀림없다는 말을 다시 반복하고 다음 조건을 말했다.
“단, 외상 거래는 없다. 관자도 받지 않는다. 동전도 받지 않는다. 오직 순도 높은 금과 은, 비단, 말, 쌀, 또는 그에 상응하는 현물로만 받겠다.”
“조정의 차 거래는 신용으로 구매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덩치가 커서 현물로 값을 치르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그리하겠다고도 포고(布告)하지 않아 다들 관자를 소지하거나 교인(交引, 정부 채권)을 들고 왔을 것인데 인제 와서 현물로 값을 치르라는 말은 경매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상인 하나가 거세게 항의하자 여기저기서 ‘옳소!’를 외쳤다.
장상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왔던 길을 돌아가도 좋다.”
“지금 우리를 우롱하는 것입니까?”
“아니, 자네들이야말로 본관을 우롱하는 것이다. 대저 관자와 교인이란 무엇인가? 관자도, 교인도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없으면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관자를 현물로 바꾸기 위해서는 촉으로 가야 하고, 교인은 동경으로 가야 한다. 각 주의 지점으로 가라고? 설마 여기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자가 있다면 경매에 참가할 자격도 없다.”
장상영의 지적에 상인들은 동요했다.
반란군이나 다름없는 우리가 송의 교인을 받아보았자, 송 조정에서 지급 정지를 내려버리면 쓸모가 없어진다. 촉의 관자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본관은 일찍이 교인포(交引鋪)의 폐해를 겪었다. 예를 들어 미곡상들이 많은 북상(北商)이 쌀을 동경으로 가지고 와 교인포에서 교인을 받고 납품을 한다. 교인은 각화무(?貨務, 전매를 담당하는 기관. 재정 충당과 국방비 조달도 담당.)에서 환전하거나 다른 물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데 그 처리 시간이 뇌물에 따라 달라지니 돈이 몹시 급한 북상은 여유 있는 거상에게 교인을 할인하여 넘겼다. 차라리 그게 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거상들은 제값보다 교인을 싸게 사들인 후, 쌀, 소금, 차가 싼 시기를 골라 각화무에서 현물로 교환했고, 그 현물을 쟁여두었다가 가격이 높게 올랐을 때 다른 상인에게 팔았다. 지금 그대들이 들고 있는 교인 대부분은 그렇게 할인된 교인일 것이다. 그런 교인을 우리가 받아보아야 조정에다 뇌물을 주고 환전이나 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뒷거래를 통해 거상에게 상당한 할인을 약속한 다음에야 대가를 지불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개민(開?)을 자처한 우리가 어찌 그러할 수 있겠는가?”
이틀 전에 나의 신위를 보지 않았다면 무슨 개소리냐며 당장에 나설 만한 자들이 많아 보였다. 그들 중에는 천하 거상들의 대리인으로 나선 자들도 많았는데 바로 장상영이 지적한 것을 이용하려 하는 자들이었다. 할인받은 교인을 더욱 할인하여 사들이고, 물건마저 싼값에 얻을 수 있다면 큰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끼리 여기 오기 전에 밀약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장상영은 그들이 동요하든 말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경매를 시작한다!”
관자와 교인을 빼면 누가 여기서 살만한 상인이 있겠느냐며 유찰이 되고 상품 값어치가 떨어지리라고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손을 들고 가격을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20문.”
“25문.”
상인들이 놀라 소리가 나온 곳을 보니 하나같이 이국적인 용모들이었다. 두 무리 중 하나는 중원인과 생김새가 거의 비슷했지만 한 무리는 동남아계통이라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서로 경쟁자인지 하나가 외치면 재빨리 뒤를 쫓았다.
누군가 그들의 정체를 알았는지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대리와 안남 놈들이잖아.”
둘 다 관자나 교인을 거의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왔기에 상당수의 선박을 끌고 왔을 것이다. 애초에 나나 장상영이 진정으로 경매하고자 하는 부류가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아직 매차장을 만들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나 이번 경매를 통해 그 뜻을 이들에게 전달하는 목적도 있었다.
“100문.”
내 뒤에서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천주로 떠났던 이소 부자, 양지가 있었고, 그들 뒤로 수십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일행들은 대부분 중원인으로 보였지만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뛴 금액에 대리와 안남의 상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무리를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장상영의 제안 때문에 자신들이 낙찰자로 가장 유력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가격을 올린 자는 이소와 비슷한 연배의 중년인이었는데 그의 외모는 마치 아랍계 혼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오대십국 중 남한의 후예이자, 현재는 천주의 대상, 유염일 것이다.
“하하하, 촉차가 평균 50문, 회남차가 63문, 복건차가 152문에 달한다는 것은 다들 알 터, 찔끔 가격만 올리다가는 오늘 내로 다른 품목은 구경도 못하겠소.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금액을 모두 제시했으니 이보다 높게 부를 수 있다면 기꺼이 내어 드리리다.”
참으로 절묘한 개입이었다.
대리와 안남 상인들은 저희끼리 숙고에 들어갔다. 100문이란 금액은 여전히 원가보다 저렴하기는 했지만, 우리와 거래했다는 위험부담과 운송비 등을 고려하면 큰 이익을 보았다고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숙고하는 사이 이소의 중재로 유염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장군의 믿기 어려운 행적들을 들었소이다. 나는 유염이오.”
유염은 화통하고 거침이 없어 보였다. 이소가 존대를 해달라고 부탁해도 무시하는 것을 보면 자존심도 굉장히 센 인물 같았다. 오대십국 중 남한의 후예라는 것과 남월왕이라는 명예스러운 호칭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천주의 값어치를 얼마나 쳐주시겠소? 나는 그 값어치로 경매 대금을 치르려 하오.”
그저 웃음이 나왔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값어치가 적으면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여길 것이며 값어치를 크게 말하면 그는 천주를 넘긴 대가로 오늘 이곳에 준비된 모든 현물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천주를 얻게 되지만 계획했던 모든 재정 지출이 수포로 돌아간다.
“능히 동전 300만관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300만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는지 유염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곧 자제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경매 물품이 얼마나 많이 준비되었는지 몰라도 300만 관이면 다 사고도 남지. 장군의 통이 그 정도까지일 줄 몰랐구려. 그러나 그 통이 너무 지나쳤소. 현실 감각이 부족하단 말이오.”
“아니 천주의 값어치로 충분하다. 그것보다…….”
나는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나의 몸값이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유염의 눈이 흔들렸다.
“한 달 전 나는 무일푼이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복주와 건주를 손에 넣었다. 앞으로 한 달 뒤, 나는 강주에서 파양호를 내려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나면……. 내가 어디까지 가 있을지 나조차도 짐작되지 않는다.”
“그, 그런, 궤변이 어디 있소!”
자신의 계산과 동떨어지게 변하자 유염은 당황했다. 아니 당황하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나는 많은 시험을 당했다.
나는 양지를 보며 물었다.
“너는 나의 몸값이 얼마라고 생각하느냐?”
“장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억만금도 벌 수 있는데 그걸 어찌 제가 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이소에게 고개를 돌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소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웃으며 양지와 같은 대답을 남겼다.
나는 유염을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천주를 공격할 마음을 먹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은 이 선생의 만류 때문이다. 그대가 거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는 다 짐작한 듯했다. 더는 상대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못해도 은전(銀錢) 1만 민(緡)은 족히 넘을 것이오.”
민(緡)은 동전 1,000닢을 줄에 꿴 꾸러미의 단위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동전을 줄에 꿴 다발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과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천주를 힘으로 차지했다면 천주를 팔겠다는 생각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 그리고 1만 민이 넘는다는 재산조차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외려 나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닌가?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그대는 천주로 돌아가라.”
나를 믿지 못해 시험하겠다면, 나 역시 기꺼이 너희를 시험해주마.
“내 증명은 몹시 비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