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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59화 (159/257)

00159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더 덤빌 자는 없는가?”

잠시 틈을 두고 세 번을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무리로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덤벼봐야 망신만 살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하가 당한 이준마저도 가만히 있는데 괜히 나서봤자 전력만 줄을 뿐이다.

외려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는데 유일하게 손해를 입지 않은 민강의 백서를 나머지 세 패거리가 고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정산을 해볼까?”

나는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준은 장횡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후라 내가 무슨 약속을 요구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 요구는 하나다. 나를 이겨라.”

다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안석이 흠칫하며 말했다.

“우리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놈으로 만들 셈입니까? 장군을 못 이기면 평생 매여 있으란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것이겠지.”

“차라리 수하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제안입니다. 알아서 기던지, 아니면 장군을 꺾던지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너희를 대신할 자를 데리고 와도 인정해주지. 능력이 있다면 이선을 데리고 와도 좋다.”

“구름 위에서 논다는 이선을 우리가 무슨 수로 데리고 옵니까? 젠장!”

정신을 차린 매괴 역시 화를 내며 툴툴거렸다.

“이준이 형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우리 역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정으로 나를 따르려거든 이준과 같은 약속이 뒤따라야 한다. 개차반 같은 성격을 버리고 수하가 저지른 잘못까지 책임질 수 있는 자. 그런 자는 기꺼이 받아주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덤벼라.”

“다시 덤비면 죽을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 또 덤비란 말입니까? 빌어먹을…….”

“파양호를 노닐고 싶지 않은가?”

다들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오직 이준만이 껄껄 웃으며 역시 형님이란 탄성만 터트렸다.

백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강주 관아를 공격하실 요량입니까?”

“겁나나?”

“장군이 직접 나서시는 거겠지요?”

“너희 중에 먼저 나설 자가 있다면 기꺼이 공을 넘기지.”

하나같이 얼굴에는 갈망이 담겨 있었다. 파양호를 얻는 자가 장강의 지배자라고 봐도 무방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조폭으로 비유하자면 전국구라고 보기에는 낯간지러운 규모가 작은 중소 도시의 한 패거리 정도라고 할까.

“형님!”

서로 눈치를 보다가 무하의 안석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장 먼저 머리를 숙였다. 백서가 이어 고개를 숙였고, 분위기에 휩쓸려 매괴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즉, 자신들이 못하겠으니 대신 앞장을 서달라는 뜻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파양호를 얻으면 장강 본류가 열리고 장강 본류를 장악하면 곧 천하의 반을 얻음이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지류가 본류로 연결되면서 얻게 될 막대한 이득은 기꺼이 이들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하였다.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를 열 것이다.”

“장강수로채? 그건 또 뭡니까?”

“장강 지류를 장악한 모든 패거리를 하나로 묶을 생각인 겁니까?”

매괴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이준이 중간에 끼어들며 나 대신 답을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같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한 자는 있어도 실제로 포부를 밝힌 자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협에도 흔히 등장하는 장강수로채는 흑도의 세력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상인 집단은 크게 양성화된 대상인과 음성화된 밀상(密商)으로 나뉘어 있었고, 밀상은 때론 대상인의 물류를 터는 수적이 되기도 했다. 이른바 지하경제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으로 봤을 때, 지하경제를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최대한 양성화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지금까지 대상인들이 표국을 앞다퉈 만든 까닭은 원거리 상행에 너희 같은 위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이야기하니 발끈할 법도 했지만, 감히 대들 용기가 없으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비용은 모두 물건값에 반영되었다. 민 제국 시절과 비교하면 술과 소금 가격은 오늘날 10배에 달한다.”

“그 정도입니까? 민 제국 시절이 태평성대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가 대다수였다. 하긴 그 시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가 나 말고 누가 또 있으랴. 운송로의 안전은 곧 물건값의 안정을 뜻한다.

“너희가 맡은 지역을 꽉 잡고 상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한 표국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그럼 표국에게 들어가야 할 기회비용을 너희에게 주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럼 뭐로 먹고삽니까?”

“포구의 운영권.”

“포구의 운영권이라면…….”

“생각하는 대로다. 조정이 손에 쥐고 있는 권한을 너희에게 준다. 상인들을 위한 객관을 열고, 주점, 도박장을 공식으로 허용한다. 지금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왔다면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온전히 너희의 몫이지.”

계산이 빠른 자들은 그것이 결코 자신들에게 해로운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상행을 보장하면 상인이 증가할 것이고, 그들이 포구에 들르는 순간 돈으로 되돌아온다.

그때 인파들 틈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더해 몰래 감찰을 하여 적발되는 터무니없는 영업을 장군이 제재한다면 이들이 감히 딴마음을 먹지 못할 터, 오직 장군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인 것 같소.”

인파를 헤치고 유유히 걸어오는 사람은 그렇게 기다리던 장상영이었다. 누군가 장상영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외치자 삽시간에 인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장상영에게 기꺼이 두 손을 모아 공경을 나타냈다.

“오셨군요.”

“도착한 것은 일각 정도 되었소이다. 성으로 향하려는데 재미있는 구경을 보게 되어 무척 흥겹소이다.”

인파 속에서 내가 벌인 일들을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산곡(山谷, 황정견) 선생께서는…….”

“원(怨)도 한(恨)도 없이 편안하게 귀천(歸天)하셨으니 장군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노직(魯直, 황정견)이 장군에게 남긴 유명(遺命)이 있으니 들려 드리리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가 더 알맞을 것 같소.”

황정견의 이름 역시 중원에 널리 알려졌었기에 그가 죽었다고 하자 아쉬워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다 나에게 전하는 유명이 있다고 하니 장상영의 음성을 놓칠세라 금세 쥐죽은 듯 변했다.

“천하의 계획을 잘 행하는 자는 반드시 장구(長久)의 정책을 세워 길상(吉祥)과 형통(亨通)의 공적을 일으킨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하에서 행하는 바를 먼저 구하지 않고 천하의 변화가 극심함을 기다리고 나서 그 변화에 따라 법도를 제정할 뿐이다. 신법(新法, 왕안석의 법)은 민 제국의 옛 제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민의 옛 제도의 유익함을 따르자는 것뿐만 아니라 제도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고, 사민(士民) 역시 마땅히 그 뜻에 따라야 함을 밝힌 것이다. 장군의 용맹함은 일찍이 인정한바, 뜻을 이루려거든 용맹에 기댈 것이 아니라 바른 인재를 구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오. 반산(半山, 왕안석)이 나에게 고언으로 남기길 대저 천하의 대중을 합하는 것은 재물(財物)이고, 재물을 다스리는 것은 법이며, 천하의 법을 지키는 것은 관리(官吏)라고 했소. 관리가 좋지 못하면 법이 있을지라도 지킬 수 없고, 법이 옳지 못하면 재물이 있을지라도 다스릴 수 없다고도 했소.”

나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받았을 것 같았다. 왕안석은 내가 민 제국을 통해 선보인 개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제도를 본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도가 품고 있는 본질을 이해하고 그 시대에 맞는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정책 입안자의 몫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장상영은 빙그레 웃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도(道)와 불(佛)은 유(儒)를 세속적인 사족(士族)으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소이다. 반산 선생이 밝힌 유의 본질은 백성에게 양육되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백성의 우환은 곧 유의 생존을 흔드는 것이라 보았소이다. 등용되지 않으면 수신(修身)을 거듭할 것이고, 등용되면 정재(正宰, 바른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나의 확고한 의지이기도 하오. 그러함으로 장군에게 묻겠소. 이런 나의 원칙을 지켜주실 수 있겠소?”

다시 웅성거림이 들렸다. 장상영이 채경 일파에게 밀려 퇴직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장상영이 나에게 임관을 요청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나의 위상은 크게 올라갈 것이고 사람들은 다시 보는 계기가 되리라.

“한때 저는 올바른 제도가 미흡한 군주를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나는 어느덧 과거를 읽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토론을 신하들과 여러 차례 겪었었다. 그것은 주로 내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한 발언, 사상에 대한 보완의 성격이었고, 진정 어린 충고가 오고 가기도 했었다. 이제 그때의 기억들은 그저 가물가물 할 뿐이었지만 가끔은 지금처럼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제갈량이 내게 물었었다.

-통치에서 법령의 장단점을 항시 고계(誥戒, 지적) 하는 것은 대관(大官)의 가르침으로 삼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엽(枝葉)에 불과하다.

-하오면 본질은 무엇입니까?

-근본을 상실하여 그 답을 지엽에서 구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경계할 뿐이다.

나는 이미 많은 답을 알고 있었다. 그 답 중 어느 것이 이 시대에 걸맞으며 앞으로의 진보를 갈음하는지의 길목에서 주춤거렸을 뿐이다.

“올바른 관리는 제도의 안정을 도모합니다. 제도의 안정은 백성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킵니다. 즉, 사회 환경의 정비가 선을 드러내는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는 제 생각과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도학(道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완수되면 도덕성명(道德性命)의 일치(一致)를 볼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저 역시 그러한 이치를 존중합니다. 그러하오니 선생께서는 제도를 바로 세우고 인재를 얻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최상의 법을 펼쳐주십시오. 저는 선생을 향해 쏟아질 모든 악의(惡意)를 베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군주의 도(道)입니다.”

“과연, 노직이 장군을 잘못 보지 않았구려.”

장상영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댔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장상영은 결연한 태도로 두 손을 모았다.

“촉주(蜀州, 사천) 신진(新津, 숭경)의 천각(天覺, 장상영의 호)이 천지신명의 이름을 받들어 삼가, 불패 장군의 말직(末職)으로 입(入)하길 원하나이다.”

나는 장상영의 두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선생을 재상으로 삼겠습니다. 그리고 선생에게 모든 내정의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밖의 일은 모두 나에게 맡기고 선생은 선생이 바라는 일만 하십시오. 그것이 내 뜻입니다.”

서로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장경이 두 손을 번쩍 올리며 크게 환호성을 울리자 삽시간에 모두의 손이 올라갔다.

이준은 피식 웃으며 애써 이곳을 외면하고 있는 목춘, 목홍, 장순 등의 팔을 일일이 들어 올렸다. 나머지 패거리들도 눈치를 보며 슬며시 팔을 들었다.

나는 모두를 향해 외쳤다.

“우리는 최고의 재상을 얻었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의 고민도 갈등도 없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오직 파죽지세로 나아간다!”

그것이 내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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