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21) 파죽지세(破竹之勢) =========================================================================
(21) 파죽지세(破竹之勢)
-하하하, 가히 파죽지세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무하 패거리들을 보며 나는 문득 두예가 떠올랐다. 두예는 두기의 아들인데, 당시 두기는 조나라에 임관해 공평무사한 태수로 이름이 높았다.
사마의가 삼공에 오르자, 그는 과거 사마의가 요동에서 벌였던 비인도적 처사를 강하게 비판하며 삼공 자격이 없다고 직언했다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두예는 그런 조나라에 실망하여 아버지, 두기를 설득하여 민 제국으로 옮기려 했으나 두기는 조조, 순욱 등과의 인연을 잊지 못했다.
두예는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며 단신으로 황하를 건넜고 뛰어난 재능을 앞세워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두예의 재능을 아껴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거만한 기색이 없고 항시 몸가짐을 정갈하게 하여 뒷소문이 들리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 두예가 내 앞에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살면서 딱 한 차례 경험했는데 중원으로 밀려온 훈족을 격퇴할 당시였다.
훈족 중 우리에 적대적인 세력은 이미 중앙아시아에서 결성된 다국적연합군에 의해 주력이 와해한 시점이었다. 남은 세력은 악에 받쳐 중원으로 진입했고, 그들의 흉흉한 기세를 늦추기 위해 지공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두예가 나섰었다.
-전국시대, 연의 악의(樂毅)는 제서(濟西) 전투에서 승리한 후 조금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 강한 제나라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저들은 제나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요. 비록 저들의 기세가 흉흉하여 우리를 앞서는 것처럼 보이나 지금 여기 모인 장수들의 눈을 한 번 보십시오. 두려움에 떠는 자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폐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훈족은 마치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습니다. 몇 마디만 쪼개지면 나머지 마디는 저절로 갈라질 것입니다.
본래 두예의 이 진언은 오를 멸하기 위해 건업으로의 속공을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나는 그날로 결단을 내렸고, 범 같은 장수들이 앞다투어 달려 단숨에 족장을 사로잡았다.
“미친놈이 더럽게 강하구나…….”
안석의 침음성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때를 회상하니 웃음이 흘렀던 모양이다. 덤비는 놈들을 족족 때려잡으면서 웃음까지 흘리니 어쩌면 내가 사디즘(sadism) 환자로 보였을 것이다.
마지막 패거리까지 모두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박이고 숨 두 번 정도를 들이마신 시간과 같았다. 고통을 호소하며 나뒹구는 패거리들의 모습을 보며 안석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이제 더는 상대할 패가 남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주변은 술렁였다.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남은 패거리들은 어찌해야 할지 우두머리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맞았으면 되돌려주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
서로 눈치를 보는 중에 심양강의 장순이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장순은 이준을 제외하면 심양강 무리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 그까지 꺾으면 실상 이곳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다 상대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우야, 나도 끼마!”
“형님, 아우를 믿으십시오. 언제 제가 싸움에서 져본 적이 있습니까?”
장순의 제지에 장횡은 멈칫했다.
장순은 내 앞에서 서자 나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냥 싸움으로는 장군을 이길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장소를 옮기지요.”
수호전에서 하얀 돌고래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수영에 능하다고 알려진 장순이었다. 어느 정도 능력자인지 이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그저 흥미로운 일이었다.
“으악, 우리가 저랬어야 하는데!”
민강의 백서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제의를 받아들여 나루로 향하자 인파는 우리를 줄줄 따르기 시작했다. 아마 입장권을 팔았어도 매진될 것 같은 열기다.
장순이 거침없이 민강에 뛰어들자 나 역시 장경이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뛰어들었다.
비교적 유순하던 장순의 표정이 흉측하게 변한 것은 이때였다.
“도박장은 항상 심양강변에 있었지. 도박하다 소피가 생각나면 강변에다 해결했지.”
“네놈한테는 돈을 따도 딴 것이 아니었겠군. 물을 먹여 위협하면 딴 돈을 죄다 돌려받았을 테니까, 아니 그 이상까지 받아 처먹었겠지. 말을 듣지 않으면 고기밥으로 만들었을 테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나에게서 흘러나오니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한 장순이었다. 그러나 물속에서만은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지 기세는 살아 있었다.
재빨리 물살을 가르며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은 일류 수영 선수 못지않은 몸놀림이었다. 순식간에 내 옷깃을 잡더니 강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내 여유 있는 모습이 꽤 눈꼴시었는지 장순은 애써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나를 자극했다.
“물에 능숙한 사람도 정말 오래 버텨봐야 반 각(7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일 각(15분)을 버틸 수 있지. 네놈이 그 정도까지 버티리라고는 나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만약 네놈이 나보다 오래 버틴다면 노비라도 되겠다.”
세계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가장 숨을 오래 참는 사람이라며 방송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세웠던 기록이 17분을 약간 넘긴 정도였으니 장순의 자신감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잡았다.
내 무예의 본류인 수벽타는 호흡을 중시한다. 10년의 넘는 유랑 세월은 그 호흡을 더 완벽하게 가다듬는 경험을 선사했다.
장순의 계획을 알면서도 받아들인 것은 그 한계를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인지도 몰랐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장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잡으려 했다. 평정을 깨트려 숨을 못 참게 할 셈인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의 팔목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물속에서는 타격기가 소용없다.’
장순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치명적인 무기가 없다면 잡기 싸움에서 결정이 난다. 내가 유도 기술을 조금 안다고 해서 물속에서 오래도록 굴러먹은 장순과의 잡기 싸움에서 앞설 수는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장순의 손이 내 목줄을 잡았다. 이제 다 이겼다는 장순의 희희낙락함을 보며 나 역시 웃었다. 그는 내 목줄을 잡았지만 나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
상식적으로 목줄을 잡은 사람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의 악력이 먼저 고통을 전달할 것인가 내기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자신이 있었다.
일반 성인 남자의 평균 악력은 40~50kg, 경찰채용시험의 악력 만점은 61kg이다. 그렇다면 차돌도 부수는 현재 나의 악력은 얼마나 될까? 동물 중에서는 침팬지가 129kg, 오랑우탄이 193kg, 고릴라는 326kg의 악력을 가지고 있다 전해진다.
장순의 손목에 힘을 주자 장순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 역시 내 목줄에 힘을 주고 있음에도 그 힘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아 그저 모기가 무는 수준에 그쳤다.
‘인간의 대퇴골은 4.3t의 무게를 견딘다고 하지. 상완골(위팔뼈)은 2.1t의 무게까지 견뎌낸다고도 하고, 하지만 그건 세로 압력의 경우…….’
흔히 힘자랑할 때 위에서 짓누르는 것보다 옆으로 치는 것이 더 강한 압박을 줄 수 있다. 가로 방향으로 주어지는 힘에 대해서는 대퇴골은 250kg, 상완골은 136kg이 한계다.
가장 단단하다는 부위가 이 정도다. 그럼 손목뼈는?
침팬지 수준만 되어도 뼈가 부러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내가 그 수준을 넘어섰음을 장순의 반응으로 깨달았다.
물 속이라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그 표정만으로도 고통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으니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장순은 헐떡거리며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숨을 들이켤 찰나 나는 그의 바지를 잡고 끌어 내렸다.
‘어푸’ 하는 소리와 함께 장순이 다시 물속으로 끌려 들어왔고 숨을 쉴려고 했던 찰나였는지라 물을 제대로 먹었다. 장순은 악착같이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손목이 하나 성하지를 못하니 내 추격을 뿌리치질 못했다.
다섯 번 정도를 반복하자 아예 눈을 까뒤집고 기절을 해버렸다. 나는 그런 장순을 질질 끌고 나루로 올라왔다.
심양강 패거리들은 하나같이 나를 귀신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장횡마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란 눈만 뜨고 있었다.
나는 장순을 그들 앞에 던졌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장횡이 서둘러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그들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나는 유일하게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은 민강 패거리를 바라보았다. 백서는 딴청을 피우며 도전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남은 세력이 크게 당한 것을 보니 감히 나설 간담이 없었던 것이리라. 과연 ‘쥐’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아, 젠장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나루에 정박한 배 중 눈에 띄는 큰 배가 있었다. 그 배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둘을 보자 심양강 패거리들이 크게 반색하며 앞다투어 달려갔다.
“이 염주(鹽主),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염주가 나서야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다 큰 놈들이 우는 소리야! 나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며!”
그들의 앵앵거리는 소리가 귀찮다는 듯이 귀를 후비던 인물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비호처럼 배에서 뛰어내려 나에게 달려왔다.
“이준이다! 혼강룡 이준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분분히 자리를 비켰다. 다시 큰 싸움이 일어나리라 예측했을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뛰기 시작했으니 패거리들 역시 잔뜩 기대하고 부지런히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형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이름이 비슷하다고 여겼으나 형님이 설마 고려를 떠나 이곳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를 보자마자 오체투지하는 이준의 모습이 세인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다시 놀랐다.
“나는 너에게 임무를 내렸다. 언젠가 중원으로 건너오겠다는 약속이나 마찬가지였지.”
“양산박을 파악하라고 하셨지요. 아마 형님은 만족하실 겁니다. 양산박은 현재 아우 손안에 있으니까요.”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양산박은 수호전의 인물들이 웅거하기 전으로 왕륜이란 자가 다스리는 전형적인 도적 집단에 불과했다. 임충이 양산박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니, 못해도 10년은 남은 시기다.
이준은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며 내가 저지른 일에 감탄했다.
“소제가 이립(李立)과 함께 대취하는 바람에 형님의 활약상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치 임꺽정이 살아 있다면 이런 얼굴일까 하는 장한이 이준 뒤로 다가와 나에게 읍을 했다. 주막을 열고 손님을 인육으로 만들어 파는 그야말로 막장의 끝이 이립이다. 자연 좋게 보이지 않았다.
“개차반 같은 자들을 수하랍시고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는가?”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소제가 책임을 지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후 그런 일을 목격하신다면 사람을 잘못 본 죄로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
“대형께서 그렇게까지 숙일 상대입니까?”
나이가 어려도 이준은 심양강 패거리의 대형이었다. 그런 대형이 소제를 자처하며 무릎을 꿇으니 이립은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태사부께서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형님이다. 그러니 너희도 소홀히 여기지 마라.”
사부가 태호삼기로 알려졌지만, 엄밀히 따지면 태사부가 된다. 이준은 염상 주송을 스승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스승이란 개념이 상단의 후계자 같은 형식이라 세인들은 이일민을 무예 스승으로 보았다.
스승의 위명을 지키기 위해 비등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이준의 겸양을 알아챘다. 새로운 소식을 알았다며 들뜬 사람들도 있었고, 겁을 먹는 자들도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자리를 뜨지 못하는 간강, 무하, 민강의 패거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