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갈팡질팡했던 원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힘을 얻었다고 힘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힘을 써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제는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역대 모든 전쟁 영웅들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본다. 그중에 덕을 내세우는 자가 있었던가? 나는 그것을 역으로 뒤집으려 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을 오롯이 관리할 수 있는 명분과 인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덕목은 대체 무엇인가? 경외인가 동경인가, 그도 아니라면 두려움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지금에 이르렀다.
시오노 나나미는 축구 칼럼을 쓰면서 일류 선수와 초일류 선수의 구분을 ‘카티베리아(Cattiveria)’라는 개념으로 구분했었다. 지금 그것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마도 지금의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카티베리아는 직역하면 ‘악의’라는 뜻이 있다. 부정적인 뜻으로 들리지만, ‘팀을 위한 궁극의 자기중심주의’라는 뜻으로 그녀는 해석했다. 경기로 치자면 상대를 강력하게 제압하여 팀이 원하는 경기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카리스마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기적인 투쟁심, 또는 성공을 향한 열의가 궁극적으로 팀의 목표와도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가 될 수 있다.
“보자 보자 하니! 우리가 바지저고리로 보이느냐!”
이곳에 모인 패거리 중 가장 젊은 우두머리, 안석은 부채를 접고 내게 다가왔다. 그 뒤로 열 명이 넘게 따라붙었다. 장경이 ‘위험합니다. 장군!’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니 살벌한 분위기는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동요하는 장경과 병사들에게 손을 내밀어 괜찮음을 알렸다. 오히려 반항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줄 심산이었다.
내가 외려 병사들을 만류하자 안석의 준수한 용모가 비틀렸다. 나의 담대한 행동에 심사가 꼬인 모양이었다.
“쳐라!”
나를 중심으로 모인 세력이니 오직 나만 죽이면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석의 명령에 열 명의 장한이 덤벼들었다. 안석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애초에 싸움을 즐기지 않거나 숫자를 믿고 까부는 부류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장 먼저 덤벼든 놈의 면상을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전쟁은 결과다!”
정치는 결과다.
나의 전생은 그것을 과정으로 돌리기 위한 대장정이었다. 올바른 과정이 올바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 사회를 성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마르크스의 이상을 좇았다고 후회했던 과거를 다시 돌이켜보아도 결국은 급진적인 이상 추구냐 점진적인 이상추구냐의 차이였지 현대 사회로 보자면 존재하기 어려운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율가의 적용부터가 그랬다. 독일식 법치주의를 가미했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사정을 보살펴 법관이 법률을 차등적용하는 관용의 법치주의가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정책인가? 결국은 법관의 주관적인 잣대에 법률이 오락가락하게 되고, 이는 조선의 실상과도 별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민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된 지방자치제 또한 어떠한가? 선진적인 실험 같지만, 당이 절도사를 두었던 것과 별반 차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민 제국과 당의 실패를 교훈 삼아 송이 지방 권력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 또 다른 부작용이 나왔다. 수령들이 지방 유지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그들의 전횡에 동조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결국, 대규모 반란 세력이 창궐하기 좋은 구조가 된 것이다.
의도는 좋았다. 그런데 그 의도와 다르게 결과가 나온다면 이것은 정치가가 그 시대의 판세를 잘못 읽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누군가는 나의 정치가 400년을 지속했다며 그것이 쉬운 일이냐며 편을 들어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따지자면 천 년의 신라는 엘도라도라도 되는가?
한 명이 나가떨어지는 사이 양팔을 벌려 내 허리를 잡으려는 장한이 있었다. 나는 그의 등을 팔꿈치로 강하게 내리쳤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구는 사이 또 다른 한 명이 내 뒤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겨드랑이 사이로 양팔을 집어넣어 나를 꽉 붙잡았다고 생각하자 지켜보던 안석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잠시 흘렀다.
나 역시 비웃음으로 맞대응했다.
“전쟁은 옳음과 그름의 싸움이 아니다!”
정치는 옳음과 그름의 싸움이 아니다.
흔히 정치판을 보면 이념적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진보적인 의원들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그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나라 또는 국민을 상대로 어떠한 일을 펼쳐보고 싶다는 욕구, 책임감 등이 작용해서이다. 그러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중적 지지에 기반을 둔 정당한 권력의 획득이다. 현대로 치자면 선거가 될 것이다.
나는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가 강하게 뒤로 젖혔다. 비명과 함께 나를 감고 있던 팔이 풀렸다. 그 사이 내 양팔까지 제압하기 위해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 팔을 맡긴 상태에서 나는 하반신만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 상태에서 완벽하게 일자로 뻗은 다리는 내 양팔을 잡았다고 생각한 두 명을 삽시간에 나자빠지게 하였다.
한 명을 미끼로 던져두고 네 명이 사방에서 내 전신을 옭아맨다는 계획이 시간차 공격에 차례로 무너지자 안석의 미소는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전쟁은 도덕성을 겨루는 경연 대회가 아니란 말이다!”
“이 미친놈아, 싸우는 중에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안석은 부하가 더 쓰러져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았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정치는 도덕성을 겨루는 경연 대회가 아니다. 권력을 놓고 다투는 치열한 전쟁터다. 이념에 사로잡혀 대중의 욕구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나 혼자 잘났다는 자위에 불과하다.
결국은 또 사람이다. 철인 정치를 그토록 멀리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나라고 단정 짓지 말라고 끊임없이 고뇌하면서도 권력의 실체를 알기에 그것을 섣불리 다른 이에게 넘기기를 주저하게 된다.
내가 과거 천자가 아닌 군자로 살겠다고 천명했을 때, 나는 신념 윤리를 신봉했다. 내가 이 시대에서 이루고자 하는 동기, 고결한 이념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가 구성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다. 그리고 정치란 그 합법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다.
신념 윤리의 맹점은 고결한 이상을 앞세워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급격한 변화에 따른 예상 가능한 폐해를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후대에 맡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 폐해를 내가 만들었고, 결국 민 제국이 망했으니 경험까지 한 셈이 되었다.
이상에 맞춰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은 그런 나를 보며 참 팔자 좋고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냉소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말로 싸울 셈이냐! 내 평생 싸우면서 이리 말이 많은 놈은 처음 보았다.”
안석의 부챗살은 송곳 같은 날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머지 장한들이 나의 움직임을 제한하면 그것으로 끝장을 내려고 했겠지만, 번번이 한 끗 차이로 무산되자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도와줄 부하가 모두 쓰러져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자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신념이, 이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가후가 정치는 백성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라고 했던 진의를 이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현실적으로 예측 가능한 한도 내에서 내가 행한 일이 가져오는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다. 정치란 예측하지 못할 폭력을 관리하고, 이익집단의 관계를 조정하며, 공익을 추구한다. 만약 그 결과가 다수의 행복과 직결되는데 나의 신념과 배치된다고 하여 포기한다면 나는 옳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는 덕을 언급하면서 동양의 윤리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국가를 유지하고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군주의 기량이고 그것이 덕이라 칭했다.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국가에 안정을 가져오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실용을 꼽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결과만을 위해 비윤리적인 일을 서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토머스 홉스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실용이라는 문장을 사용했을 것이고, 칸트는 ‘정직’이 가장 좋은 정치라는 견해를 비췄다.
윤리를 딱히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한 이치를 깨닫고 있는 자들은 보편적인 윤리를 과정에 집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까지 배제하며 선인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과는 다른 사고이다.
왕조의 건국자들은 그런 과정의 장단점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선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가다머(Gadamer)가 논한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합의에 기초한다.’가 딱 들어맞을 것이고, 건국자들의 선택에 의해 국가는 타국과 차별화되는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어떤 색깔을 원하는가? 과거로 회귀하기를 원하는가?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믿었고, 그 최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니 한점의 후회도 없다.
그 결과의 흐름을 나는 지금 겪고 있다. 이 역사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똑같이 흘러서 내가 한 일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던가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때의 결과로 지금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미 바뀐 역사를 현대의 내가 지식으로 습득했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이 시대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칵!”
주먹이 안석의 면상을 후려쳤다. 주먹 한 방에 늘씬한 코가 주저앉자 안석은 손을 휘저으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장군, 얼굴만은, 얼굴만은!”
지는 것보다 준수한 얼굴이 망가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모양이었다. 얼굴을 이리저리 피하며 내 주먹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처량하게 보였다.
“좋다. 선택해라.”
나는 눈을 위아래로 훑었다.
안석의 낯빛은 이제 백지장이 되었다. 내가 가리킨 곳이 얼굴과 자신의 소중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력을 믿고 여자를 멋대로 농락하며 살아가던 안석에게 그곳은 얼굴만큼 중요한 곳이다.
“장군!”
안석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도저히 선택할 수 없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외침이었다.
“셋까지만 센다. 선택하지 못하면 둘 다 날아간다. 하나…….”
“장군!”
화들짝 놀라며 눈물 콧물 다 흘리는 안석의 비참함에 지켜보던 일부 상인들은 꼴좋다며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무하 패거리들은 안석을 구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안석이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할까 몰라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
한 번의 주먹, 한 번의 발차기가 이어졌고, 두 번의 비명이 들렸다. 안석은 한동안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통이 적응될 때쯤 안석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는지 악에 받쳐 길길이 날뛰었다.
“네놈이 사람이냐! 이 개새끼야!”
“억울한가?”
“이 새끼야, 네놈이 한 짓을 모르고 하는 말이냐!”
안석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아 모두 다 덤벼! 이 개새끼를 죽이는 놈이 무하의 주인이다!”
무하 패거리들은 무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전의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어리석은 자들이 욕망에 휩싸여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을 비웃지만 따져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안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석은 내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자 다시 공포감이 밀려드는지 기세가 죽어 있었다.
“잘했다. 어차피 지금의 너희는 ‘국민’이 아니다.”
“……뭔 개소리냐.”
내 정치에 너희는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