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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55화 (155/257)

00155  (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

나는 밖으로 나갔다. 상대가 패를 내밀었으니 응해줘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제 두 분만 뵈면 되겠군요.”

고개를 갸웃하는 부혁에게 알아듣도록 다시 설명했다.

“오은의 두 분만 뵈면 삼절오은을 모두 만나게 되는 셈이지요.”

“아, 그렇다면 장군이 혹시!”

눈을 동그랗게 뜬 부혁을 보니 나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설마 단정홍과 친분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삼절은 모두 강북에 있으니 그나마 짐작이 가는 이는 태호삼기 이일민 뿐이다.

부혁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은 고려인으로 알고 있소만, 어찌하여 송까지 건너와 분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군.”

“부씨도 본래 탐라에서 건너와 일가를 이루었는데 고려인이 송에 건너와 일국을 이루는 것은 분란에 비유하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럼 중원 역사에 이민족 왕이 한 명도 없었단 말입니까?”

“듣던 대로 장군의 입심이 만만치 않군. 무슨 말이 필요 있겠소. 어디 그 실력이나 보도록 합시다.”

부홍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당에는 나와 부혁 단둘만이 존재했지만, 긴장감은 마당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득했다. 아니, 나는 긴장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그 긴장감은 오롯이 부혁의 것이었다.

“무기를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그가 적수공권으로 나를 대적하려 하자 혹시 내가 빈손인 것을 보고 맞춰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자 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은 오직 두 주먹만을 사용하오.”

과연 남권북퇴란 말인가? 나 역시 수벽타의 자세를 취했고, 그가 발걸음을 조금씩 좁혀 오자 나 역시 피하지 않고 다가갔다.

주먹이 서로 닿을 정도까지 접근하자 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내 턱을 노리고 장을 내치기 시작하는데 그 속도가 가히 프로권투 선수의 잽에 비견될만했다. 턱은 인체에서 단련이 어려운 부위여서 전문적으로 가격당하면 지렛대 효과에 의해 뇌진탕을 일으키기 쉬웠다.

그는 장이 먹히지 않으면 주먹으로 공격하기도 했는데 장이든 주먹이든 그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 팔 힘이 강해도 계속 공격하기가 어려운데 그는 허리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다.

본래 상대가 턱 공격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되면 가깝게 근접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턱 공격을 허용해주는 것은 비정상이었지만 나는 그의 손목을 일일이 쳐내며 누가 지칠지 인내력 경쟁에 들어가 있었다.

‘영춘권의 원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구나.’

현대 중국 권법의 시초가 대부분 청대에 두고 있지만, 어찌 뿌리 없이 뚝 떨어졌으랴, 이리저리 돌고 돌아 발전된 것이리라.

초 근접전을 주특기로 삼았던 영춘권처럼 그 역시 시종일관 팔 길이의 절반 이내 공간에서 쉬지 않고 공격하며 우위를 점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팔을 완전히 펴지 않고 반쯤 구부린 상태에서 허리와 팔꿈치의 스냅을 이용하여 공격하니 파괴력에서는 회전을 가한 정권 찌르기보다 떨어졌지만, 그것을 연타로 메우는 식이다. 내가 잠시 영춘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한 대를 턱에 허용했는데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뒷골이 쨍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리 파괴력이 작다고 하더라도 건장한 사내쯤은 일수에 기절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접전에 강한 영춘권은 태권도 같이 멀찍이서 발로 싸우는 유형이 가장 최악의 상성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

10분 정도는 확실히 넘은 것 같은데 손놀림은 여전했다. 영춘권은 장기전에 강한 편인데 한 기술 한 기술이 필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공을 모은 강력한 한 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이일민과 다른 유형이었다.

다시 10분이 흘렀다. 여전히 부혁은 땀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무리 장기전에 강하다지만 이건 괴물같은 체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내심 피식했다.

‘그럼 나는?’

나 역시 그의 공격을 한 번 허용한 것을 빼놓고는 모두 막아냈다. 반복되는 공방이 이어지고 지루함을 느낄 때쯤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의 발차기가 시연되었다. 영춘권에도 발차기가 있는데 태권도처럼 호쾌한 발차기는 아니고 주로 상대의 하단과 중단을 빠르게 노리는 기습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가장 노리고 있던 공격은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두 손만 사용한다고 공언했고 지루하리만치 상단 공격만 고집했다. 딱 한 번의 하단 공격을 노리기 위함일 것이다.

발은 공교롭게도 나의 하복부를 올려치는 형태였다. 그대로 허용하면 고자가 될 판이라 동시에 들어온 손바닥 공격을 머리를 숙이며 막고 강하게 밀어냈다.

중단 앞 발차기를 해보면 알겠지만 시도하는 와중에 상체가 밀리면 여간해서는 중심 잡기가 어렵다. 그가 노렸던 시간만큼이나 나 역시 그를 관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대처가 가능했다.

그가 주춤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앞 발차기하는 발을 손으로 잡아 길게 뒤로 당겼다. 중심을 잡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쓰러져 뒷머리를 바닥에 찧은 그는 이내 체념에 잠겼다.

솥뚜껑 같은 내 손바닥이 바로 지척에서 그의 얼굴을 검게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사가 말하길 나와 둘이 덤벼도 장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 했는데, 나는 그것을 믿지 못했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부혁은 부홍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여 패배를 사죄했다.

“형님, 이 아우의 한계입니다. 이 자는 제가 겨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자신의 힘을 다 보이지 않았는데도 겨우 한 번의 공격만이 성공했습니다. 삼절 중에 옥기린 노준의 정도나 상대가 될 듯하고, 어쩌면 일사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이 언급되지 않았다. 내가 사대 문파의 장문들보다 못하다고 본 것일까? 섭섭함을 눈치챘는지 부혁은 껄껄 웃으며 내게 설명했다.

“사대 문파의 장문들은 이선과 같이 속세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분들이오. 그리고 각자 특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그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오로지 20년에 한 번 열리는 화산논검(華山論劍)뿐이오. 그 자리는 이선도 상빈(上賓)으로 초청된다고 하는데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그저 무릉도원을 접하듯 입만 다실 뿐이라오. 그와 반면에 일사는 그 소재가 확실하고 적의 입장이니 언제고 장군과 맞대결을 벌일 수도 있겠소. 정말 기대되긴 하오.”

화산논검이라니……. 물론 일전에도 그 이야기를 접한 바가 있지만 검선과 악선까지 참가할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 꼭 한번 참가하고 싶었지만 언제 참여할 수 있을지는 요원하기만 했다.

“믿었던 아우가 전력을 다하고도 패하다니 믿기지 않지만, 그동안 듣던 장군의 풍문이 사실인 것은 분명한 것 같소. 내가 가진 패가 무너졌으니 장군의 뜻에 따르겠소. 부디 장군의 진의가 확고하길 바랄 뿐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혁의 은거지는 무이산 자락에 있다고 했다. 부홍의 차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부홍의 차원이 파락호들에게 침범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알게 모르게 부혁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홍만 관전하는 비공개 비무가 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승패를 가슴에 담아두겠다고 했고, 부홍은 내 확약에 안도했다. 부혁은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부홍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아우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부홍과의 협상까지 마무리 짓고 건성에 돌아왔다. 건성 주변은 경매를 기다리는 수많은 상인으로 북적였는데 하나같이 험상궂은 자들 천지였다.

하긴 조정을 무시하면서 이곳에 참가할 수 있는 간담을 가진 자들이 평범할 리 없었다. 대량의 물품은 모두 수운을 이용했고 각 지역의 수운을 담당하거나 대상인쯤 되면 ‘조직’을 거느렸다.

성문 주변으로 백 명 이상의 병사들이 상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바깥으로 유도한 것도 골칫거리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장경을 거느리고 임시로 차려진 주점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장경은 비상한 기억력도 가지고 있어 내가 모르는 자들의 이력을 듣기 편했기 때문이다.

장경의 호위를 위해 열 명의 병사가 붙었기에 주점 주변은 뭔가 싶어 나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장경이 윗사람이고 내가 아랫사람처럼 보였을 것이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간파하며 내가 심상치 않은 사람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장경은 한 명 한 명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노천 주점 끝자락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열 명이 간강(?江) 일대에서 꽤 유명한 염상입니다. 우두머리는 저기 오른쪽에 보이는 대머리로 매괴(梅傀)라고 합니다. 간강의 지류인 매강(梅江)의 수운은 모두 저자의 손을 거칩니다. 성격이 폭급해서 누가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두 눈을 뽑아버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자 기분이 나쁜지 매괴는 흉포한 시선을 보냈다. 장경이 찔끔하자 내가 시선을 가로막아 보호했다. 그러자 매괴는 먹던 국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괴라는 이름이 어울리게 그의 덩치는 나와 비슷했다.

간강이라면 장강의 지류로 강서성을 관통하는 최대 하천이었다. 그런 곳의 우두머리가 시시할 리 없을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두려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두 곳이나 있었다. 하나같이 칼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면 이들의 이력 역시 만만치 않은 듯했다.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장경이 재빠르게 설명했다.

“저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리에 다섯 명이 앉아 있지요? 저들은 복건의 젖줄인 민강(?江)과 그 지류의 수운을 책임지는 자들입니다. 그중 가장 돈벌이가 되는 곳이 백룡강(白龍江)으로 저기 길쭉하게 생기고 칼자국이 교차한 중년인이 주인입니다. 백룡강의 이름을 따서 백룡이라 자신을 칭하는데 행동은 용이 아니라 쥐 같아서 뒤에서는 백서(白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백룡, 아니 백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장경,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이곳 출신이라서 그런지 장경과도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저러면서 석보 장군 앞에서는 맥도 못 추지요.”

“이익, 백주 거리라고 내가 네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백서는 품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백서를 뒤에서 밀치며 앞에 나서는 자가 있었다. 백서의 얼굴에 살의가 돌았다. 그런 살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괴가 무심히 말했다.

“하얀쥐, 내가 먼저다.”

“네놈도 오늘 죽고 싶으냐?”

백서의 인상은 마치 쥐를 닮아 누가 그걸 지적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뒷이야기라도 들리면 잔인하게 보복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자신 앞에서 그런 말을 떠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연달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분노는 커졌다.

매괴 뒤로 아홉 명이 서고, 백서 뒤로 네 명이 서자 단숨에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장경은 그 틈에 나머지 한 무리를 가리켰다.

“저들은 무하(?河) 패거리입니다. 간강이 남창에서 파양호로 흐른다면 무하는 무주(?州)에서 파양호로 흐릅니다. 파양호는 채구의 손아귀에 있기에 제대로 활동하는 세력이 없다고 보면 이 둘이 파양호 지류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지요. 일곱 명 중 가운데에 앉아 있는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보이십니까? 그는 고향의 자랑인 전 승상, 왕안석을 매우 존경하여 이름도 안석(安石)이라 바꿨는데, 심심하면 지나가는 사람을 돌로 맞히는 못된 기벽이 있어 투석(投石)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자도 어찌나 밝히고 질투심이 심한지 그와 한 번 잔 기녀는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디서 그런 쓸데없는 요설로 본 공자의 위명을 깎아내리는가!”

풍류 공자 행세를 하는 것인지 부채를 들고 일어나는 모습이 꽤 재수 없어 보였다. 내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날리자 자존심이 상하는지 인상을 구기며 내게 다가왔다.

“어디서 새치기를!”

매괴와 백서는 한창 긴장감을 고조하며 투닥거리는 사이에도 주변을 소홀히 보지 않았다. 그들은 안석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이구동성으로 외쳤는데 안석은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며 모르는 체 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장경에게 물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무리 중 가장 강한 자들인가?”

“아닙니다. 아직 심양강 패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이권에는 목숨 걸고 달려드는 자들이니 반드시 경매에 참가할 것입니다.”

“젠장 우리가 심양강 패거리보다 못하다고!”

이번에는 세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참으로 재미난 광경이었다.

‘심양강 패거리라……. 어쩌면 그를 다시 만나게 되겠군.’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심양강 패거리들이다! 그들이 포구에 도착했다!”

인파가 썰물처럼 물러나며 흉흉한 안색을 가진 6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혹시 그가 있을까 살폈지만, 그는 없었다. 다른 일로 바빴던 것일까? 어쨌거나 인근에서 수운을 독점하고 있는 4대 세력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셈이 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내게는 재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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