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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53화 (153/257)

00153  (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사로잡혔던 관리 중 절반 이상이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남겠다고 선언했다. 30% 정도만 남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남은 것이 내게는 다행이었다.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고, 그것을 처리할 인원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복주 인근의 평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관승 일행이 건주에 도착할 때쯤에야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그날 밤, 복주와 건주의 주요 인물들을 모두 불러다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는 마치 작은 양산박을 보는 것 같았다.

관승, 주동, 양지, 장청, 석보, 이소, 이강, 청산, 방정실, 능진, 장경에 이제는 석보의 제자로 받아들여진 두미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이소가 나에게 말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옛 민국의 영토를 거의 되찾았습니다. 천주만이 남아 있는데 그곳 역시 복건과 사정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주의 대상(大商), 유겸(劉謙)은 저와 함께 율가를 동문수학한 사이로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욱 빨리 천주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겸이라니, 내가 아는 과거의 어떤 사람과 동명이인이었다. 혹여 그의 핏줄인가 싶어 내가 묻자 이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유겸은 남한의 건국자 유엄의 후손입니다. 유엄의 아버지가 유겸이었지요. 이름이 돌고 돌아 선조의 이름을 받게 된 것인데 본인은 그 이름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습니다.”

남한은 오대십국 중 거의 유일하게 문인 정치를 지향했던 곳이다. 군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것인데 송이 남한을 공격하자 반항 한 번 못해볼 정도였다고 하니 언제고 무너질 사상누각의 체제였던 셈이다. 정치마저 개판이라 왕위 계승권을 두고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백성은 등을 돌렸다.

내가 알기로 남한의 마지막 왕 유창은 송나라의 귀빈 대우를 받으며 개봉에서 계속 거주했고, 죽어서는 남월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니 일족들이 벌인 일에 비하면 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행운아가 아닐 수 없다.

유겸은 그런 유창을 할아버지로 모신 자였다. 그는 가문이 본래 주력했던 남해 교역에 몸을 담기로 하고 일족 중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천주에 정착했다고 했다.

“동경(개봉)에 계속 거주하던 본가의 맥이 10년 전 끊어지면서 이제는 외려 유겸이 본가를 잇게 되었습니다. 허울뿐이지만 남월왕의 칭호 또한 내려받았지요. 천주뿐 아니라 광주까지 수중에 넣을 기회입니다.”

이소는 나를 계속 지켜보면서 확신을 얻은 듯싶었다. 아들 이강과 함께 정력적으로 정무에 임하고 있었다.

“광주를 손에 넣으면 해남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억울하게 유배당한 관리, 학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을 얻는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해남도라, 회한 어린 지명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소동파를 만났지만, 자매를 잃었다. 자매의 가족들은 잘살고 있을까? 언제고 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이소의 흥미로운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남한은 광주를 수도로 삼고 남방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천주나 복주가 교역항으로 유명하지만 아랍 상인들이 가장 자주 찾는 항구는 단연 광주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나 거리상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홍콩과 마카오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곳이 광주였다. 현대에서도 광주가 북경, 상해에 이어 중국의 3대 도시가 된 것도 그러한 이점에 기인한다.

“그럼 대리와도 직접 교역할 길이 생기고 촉으로 가는 길도 열립니다. 강남을 얻는 가장 마지막 과정을 항주라고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손쉬운 서남 지역을 빨리 손에 넣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핵심 지역은 뭐니뭐니해도 항주 일대였다. 항주의 경제력은 지금 내가 점령한, 혹은 점령할 모든 땅을 합쳐도 몇 배나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10만의 금군이 상시 주둔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소는 그곳을 강남 정벌의 마지막으로 꼽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이소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경제력은 사람만 있으면 충분히 올릴 수 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소 선생의 의견은 정론입니다.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방책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요. 만약 흡족한 의견이 없다면 선생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장수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표정들이라 실소가 흘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조심스럽게 장경이 의견을 내놓았다.

“흠잡을 데 없는 제안입니다. 그대로 따르심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에 병행하여 장군께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라.”

“일천 곳에 이르는 차원의 주인들이 하나같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언제 자신들을 내쫓고 차원을 차지할까 걱정되는 것이지요.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을 달래고 있지만, 관리의 숫자가 적어 이제 겨우 백여 곳을 탐방했을 뿐입니다.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우려를 해결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차원을 빼앗지 않겠다고 확약하라는 말이겠지?”

내가 묻자 장경은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따를 수가 없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알다시피 어용차원은 관리자들을 내쫓고 우리가 차지했다. 그래서 사설차원의 주인들은 고심이 심했겠지. 차원은 땅 그 자체라 누군가에게 매매하지 않는 이상 어디론가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맞는가?”

“맞습니다. 매매하면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복건의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면 불안해서 차원을 사려는 상인이 있겠습니까?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 이치를 안다면 그들은 민심을 다독일 줄 알아야 했다.”

“노동력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대지주였으니 그들이 모두 망해야 한다는 논리입니까? 장군의 생각은 이상적이지만 그들을 벌하면 전국의 지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이야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백성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라를 이룰 ‘재물’을, ‘위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의 유방도 평민이었지만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민국의 이준경은 일개 부장의 아들이었지만 역시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방보다 항우를 따르는 귀족은 더 많았다. 이준경을 따른 귀족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자들이 많았지. 지금의 예시와 맞지 않다. 그러나 나 역시 그들을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사설차원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열 곳의 주인을 선별하여 내게 그 명단을 넘겨라. 내일부터 직접 내가 그 주인들을 만나겠다.”

“가장 큰 규모의 사설차원 열 곳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직접 나서신다니 윽박지르실까 걱정도 되기도 하고 저희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기대도 되고 합니다. 아무쪼록 장군께서 너른 혜안을 보여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장경은 자신의 생각을 더 강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 청산이 또 다른 의견을 냈는데 내가 타고 온 전선 80척 중 일부는 교역용으로 활용하고, 일부는 복주와 건주를 연결하는 조운선이 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전선은 충분히 강을 거스를 튼튼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도 검토한 바였다. 대략 30척 정도를 전투용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나머지는 청산의 재량에 맡겼다. 그와 더불어 야성의 성주도 겸하도록 했다.

그러자 졸지에 승진했다며 여기저기서 축하주가 쏟아졌고, 술이 약한 청산은 졸도하고 말았다.

이왕 직위를 결정하는 김에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모두 털어 놓기로 했다.

“나는 화포 대대를 만들 것이다. 화포장으로 능진을 임명하겠다.”

“저를 따르는 장인들과 병사가 있습니다. 지금도 열 문의 화포를 운용 중인데 더 늘리라는 말씀이십니까?”

화포의 뛰어남은 잘 알지만, 아직 화포를 이용한 전투 교리는 정립되지 않은 시기다. 먼저 시작하는 자가 선구자가 되는 셈이다.

“정예병을 천명한 이상 그 중심은 화포가 자리할 것이다. 먼저 건성을 철저하게 수비할 수 있는 화포가 충분하게 필요하고, 그 화포가 개량되어 이동마저 쉬워진다면 우리가 흘려야 할 피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내가 직접 나서는 전장에서 승리하더라도 우리의 후방이 공격받는다면 그것만큼 난처한 일이 없다. 즉, 화포는 나를 대신하는 셈이다.”

능진은 아무 대답없이 술잔을 비웠다.

“화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장군처럼 멋들어지게 요구하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장군을 대신해야 하는 화포라니……. 도성에서 폭죽 한 번 쏘아 보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과제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능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군요.”

화포를 만들기 싫어하는 능진을 어찌 설득할까, 며칠을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화포 만들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포가 가져올 위험함을 위정자들이 멋대로 이용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내 빈자리를 대신한 수성 병기라면 충분히 명분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능진은 그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능진이 화포장의 자리를 받아들이자 그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들은 무슨 자리를 주냐며 눈을 빛내는 장수들이었다.

“관승은 일찍이 순검 출신이었으니 퇴역병을 순검으로 배치하고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당분간 맡아주었으면 한다. 불만이 있을 것을 안다.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강직한 관승이 순검의 장으로는 제격이었다. 또 전쟁에 나가지 못한다며 투덜거리는 관승을 양지와 주동이 합심하여 놀려댔다. 그러나 그들도 저리 편히 있지는 못할 것이다.

“주동은 청산을 보좌하여 야성을 방비하게. 양지에게 맡기고 싶지만, 성격이 화급하여 오히려 일을 늘릴 소지가 있으니 침착한 그대가 적격일세.”

삽시간에 주동의 안색이 누렇게 떴다. 양지는 성격이 화급하다는 지적을 받았음에도 껄껄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자신은 내 곁에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양지는 이소를 따라 천주에 다녀와라. 이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두 네 탓으로 돌릴 테다.”

양지는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렸다. 관승과 주동은 그 꼴이 우스운지 자신들에게 닥친 일은 잊고 양지를 놀려대기에 바빴다.

“장청은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좋다. 당분간 능진을 도우며 화포의 정확성을 올릴 방법을 연구해보아라. 성과가 나온다면 시위(侍衛)를 맡기겠다.”

화포장을 도우라는 말에 흠칫했던 장청은 뒷말을 끝까지 듣고 화색이 돌았다. 양지는 툴툴대며 ‘어찌하여 이런 비리비리한 놈을 시위로 둔단 말입니까? 혹시 시종이 필요한 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장청과 주먹다짐이 일뻔했지만 어디까지나 투정 섞인 장난에 불과해서 좌중은 그저 웃기에 바빴다.

“장경은 셈에 능하니 세관(稅官)을 내리겠다. 복건의 모든 세입, 세출은 그대가 관리하라. 그리고 방정실은 총관이 되어 세세한 부분을 살피게.”

다들 옳은 인선이라고 생각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방정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장군께 꼭 여쭙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어디 말해보라.”

“장군께서는 언제쯤 장군의 자리에서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이들은 그 말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장군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다. 개국 선언이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개국 공신이 될 기회였으니 하나같이 궁금했을 법하다.

“천주를 손에 넣고, 남창과 강주에서 몰려올 관군을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둔 뒤로 하자.”

내 대답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방정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니 방정실뿐만 아니라 다들 듣고 싶은 대답을 들어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소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그냥 여담입니다만 장군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재상에 해당하는 총관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 육부를 설치하고 재상을 두어야겠지요. 명망이 있는 선비들의 가세가 필요한데 혹여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재상은 이미 구해놓았습니다.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쏟아지는 축하주에 졸도했다가 조금 전에 정신을 차린 청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 대인을 기다리고 계시는군요.”

그제야 이소가 이마를 쳤다.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장상영이 나와 한 약조를 아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옆 사람에게 설명을 시작하자 잠시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장경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진정으로 장천각께서 오신다면 그건 그야말로 장군의 큰 복입니다. 장천각의 위명은 사해를 덮고 있으니 따르는 선비가 부지기수입니다.”

그 정도로 장상영의 이름값은 대단했다. 장상영의 곁에서 이강이 자란다면 이강을 써먹을 날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나로서는 흡족한 일이었다.

“저는 할 일이 없습니까?”

아직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석보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석보의 제자로 들어선 두미도 자신에게도 일을 맡겨달라는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이 중에서 가장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가 석보였으니 나는 응당 그에게 맡겨야 할 직책을 내렸다.

“야성을 주동에게 맡겼으니 건성의 대장은 그대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석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건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기에 건성의 대장은 곧 그런 전쟁을 총괄하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도와 싸워야 하니 관승 등이 그토록 원하던 자리였다.

양지는 석보와 몇 차례 겨뤄봤던 전적이 있는지 투덜거리면서도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우기지는 않았다. 관승이나 주동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한 번씩은 실력을 검증했던 모양이다.

다들 목표와 자리가 정해지자 열심히 해보자며 잔을 들고 의기투합했다. 하루 내내 열린 연회가 파할 때쯤 다들 기절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미소가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어제 올렸어야 하는데 일이 있어 못올렸습니다.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내일도 한 편 올릴 예정입니다.

까페 주소는 http://cafe.naver.com/haveasamedrea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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