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
능진은 나에게서 호랑이가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난 것이었다.
건성의 육중한 성문이 너무나 쉽게 열렸다.
성문에 들어서자 건성의 백성은 새로운 지배자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디 이렇게 숨어 있었나 할 정도로 많은 인파였다. 어제 나의 열변이 병사들을 통해 이들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 장본인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곧장 관아로 향했다. 넓은 동헌에 자리 잡은 나는 이제 일어날 변화를 기다렸다.
능진이 여러 인물을 묶어 줄줄이 끌고 동헌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야성에서 도망친 인물들이거나 이곳 현관의 수족 같은 인물들이었다. 현관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가슴 함몰로 사망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은 나를 보자 사색이 되어 있었다. 죽을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능진에게 말했다.
“이들의 처리를 나에게 맡기겠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포승을 풀어 줄 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의 신위가 능진을 절로 공손하게 만들었다.
나는 포승에 묶인 자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백성에 비하면 하나같이 많이 배운 자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이기도 하다.”
역정을 내고 싶어도, 반발하고 싶어도, 감히 나서는 자는 없었다. 생사를 관장하는 사신이 바로 자신들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성의 일을 그대로 전해준 덕에 기병을 쉽게 물리쳤다. 그것이 그대들의 역할이었지.”
그들 중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깨닫는 자들도 있었고,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을 놔주겠다.”
“그게 정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동아줄에 화색이 도는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오히려 화를 내는 자들도 나왔다.
“지금 우리를 두고 어리석은 반간(反間)이라 하는데 다들 속도 좋소!”
키가 작고 가는 수염이 달려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학사 한 명이 소리치자, 다른 자들은 목숨을 구하는데 아무렴 어떠냐며 반박했다. 그러자 원숭이를 닮은 학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도 남의 것을 빼앗는데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장군은 한 술 더 뜨는 사람이오. 우리는 기껏해야 푼돈이지만 장군은 천하를 빼앗으려고 하니 말이오. 나라가 어찌 망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소. 나 하나 잘 먹고 잘살자고 맡은 소임을 내팽개치는 순간 이미 나라의 기둥은 썩은 것과 같다는 것을 말이오.”
그때, 방정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처리할 일이 있다며 잠시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내게 온 것이었다. 그는 포승에 묶인 자들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원숭이 학사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능진이 아직 장경(蔣敬), 그대의 참모습을 몰라 같이 포박했나 보군. 내가 미리 이야기해놓지 못하여 생긴 불찰일세.”
장경?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었다.
방정실의 말에 함께 묶여 있던 자들은 장경을 손가락질하기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했던 행태는 온데간데없고, 자신들을 밀고한 것으로 생각하는 장경이야말로 천하에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앞서 제가 현관에게 가야 할 재물을 빼돌렸다고 밝힌 바 있지 않습니까? 저 혼자 어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셈에 밝은 장 공리(公吏)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장 공리는 일대의 사정을 한눈에 꿰뚫고 있는 만큼 장군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디 겉 됨됨이로 판단하지 말아 주십시오.”
셈에 밝은 장경이라, 나는 그제야 원숭이 학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수호전의 인물로 신산자(神算子) 장경(蔣敬)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황문산 도적의 일원으로 처음 출현하는데, 과거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신산자라는 별호가 의미하듯 그가 가진 특기는 바로 계산이다. 양산박이 얻은 재물을 관리하고, 통계를 내고, 그것을 나누고 등등, 양산박의 호걸들은 하나같이 질색할만한 작업이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장경이 있었기에 호걸들은 오직 전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양산박 내부를 꾸려가는 일이니 수호전에서 활약상이 나온다거나 출연하는 빈도는 극히 낮지만 한 단체나 일국을 운영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현관에게 가야 할 재물을 빼돌려 어디에 두었는지, 어디에 썼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방정실이 설명할 것을 내가 먼저 조바심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재물의 행방을 물을 것으로 여겼는지 입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정실은 내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탄복한 얼굴로 말했다.
“장군은 과연 범인(凡人)과 다릅니다.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장 공리는 비록 직급은 낮으나, 비상한 셈법의 소유자라 재화의 출입이 그를 거쳤습니다. 장부를 조금만 조작해도 막대한 이문이 우리 손에 떨어졌지요. 저희는 이 일대 일천 곳이 넘는 다원 중 후미진 곳에 자리한 다원을 하나 사들였습니다. 그 이유를 짐작하시겠습니까?”
부정축재를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번거롭게 일 처리를 할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원 그 자체가 필요해서 돈을 모았다는 말이 된다.
“고아들이 오갈 곳이 없었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관은 구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이 맡은 세입을 완수하여 조정에 인정받는 것만을 바랐다. 축재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덤이나 다름없었는데, 만약 현관이 조금이라도 민생을 생각했다면 방정실이나 장경은 축재 정도는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다원을 마련하면 고아들에게 밥과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일을 벌이다 보니 고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에서 장애를 입고 돌아온 퇴역병, 지아비를 잃은 미망인, 홀로 남은 노모……. 이런 이들이 이 땅에 너무나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현관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며 구호 건의를 번번이 무시했지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재능으로 그들을 돕자. 물론 그것이 불법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이란 무엇입니까? 살 수 있음에도 죽는 것을 빤히 내버려두는 것이 불법이라면 저는 기꺼이 범법자가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공감했다. 법이란 것은 사회 규약이다. 결국, 사회 조류를 쫓지 못하는 법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맞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대의민주주의가 현대에서 최선이라고 꼽히지만, 그조차도 민의를 완벽하게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법을 만드는 자가 스스로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면서 생기는 괴리감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은 약자를 억누르기 위한 강자의 무기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성이 아니라 평등함인데도 불구하고 법의 절대성을 외치는 자들은 대부분 독재자였다.
장경은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 드러나는 사실에 장경을 비난하던 자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염치가 없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누가 장경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방 압사.”
나는 방정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대는 범법자가 아니다. 내 치하에서는 오히려 상을 받아 마땅한 행위다. 내가 구하는 법은 오직 하나 인본(人本)이다. 인의도, 예절도, 법도, 모두가 그 하나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장군…….”
방정실은 감격에 겨운지 신형을 떨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이제야 만났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시선을 돌려 묶여 있는 자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그대들보다 아는 것도 별로 없다. 할 줄 아는 것은 아까 보았다시피 그저 힘쓰는 재주뿐이지. 나보다 많이 아는 그대들에게 진실로 묻겠다. 그대들은 자식을 사랑하고, 내자를 아끼고, 부모를 효심으로 대하는가?”
“축생(畜生)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륜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한 명이 대답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내가 바라는 나라는 그대들이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다. 그대들이 욕심을 부려 배불리 먹고, 마음껏 뛰놀고, 항시 웃을 수 있는 넉넉한 가족들의 행복을 구했다면, 그대들에게 빼앗긴 자들은 불행을 얻었다.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적자생존이라고 변명하지 마라. 애초에 모두가 잘사는 방법 따위는 현실에 없다며 스스로 공인(公人)이기를 포기한 순간, 이미 누군가에게는 불행의 시작이다. 공인에 오르기 위해 공부한 서적에는 하나같이 좋은 말만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이 초심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도 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되돌릴 기회를 주겠다. 이곳에 남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행정에 임할 것인가? 아니면 어디로든 떠나 내가 그곳을 점령하는 광경을 다시 한 번 지켜보고 포승에 묶이던가. 설사 그렇다 한들 나는 그대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가는 곳마다 분란이 일어날 것이고 민심은 악화할 것이니 나로서는 그대들이야말로 천군만마인 셈이다.”
장경을 제외하고 다들 얼굴색이 급변했다. 모르긴 몰라도 매서운 꼬집음이었을 것이다. 장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는데, 솔직히 우리라고 매양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학문을 공부하며 부정축재하고 백성을 괴롭히라는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그냥 자위하지요. 체념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두근거리며 손 떨리는 타락한 짓도 ‘다들 그러는데…….’라는 체념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게 합니다. 하나만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동료 공리들 역시 저와 같은 불안감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주십시오.”
“말해보라.”
장경은 주변을 천천히 둘렀다. 잡힌 이들의 평이 상상 이상으로 나빴는지 동헌 주변은 백성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멀리 떨어져 제대로 듣지 못한 자들은 손가락질하며 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뜻을 세우려면 최소한 그 뜻이 당대에 지속하여야 합니다. 장군은 개민왕의 예를 드셨으니 민국의 후계자가 되시고자 천명하신 것입니다. 민국은 50년을 갔습니다. 그 중 개민왕이 생존하며 치세한 20년은 태평, 개민왕 사후 30년은 악정의 연속이었지요. 더 많이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장군께서 개민왕을 뛰어넘어 30년의 태평을 보장해주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초심을 찾을 것이고, 열렬히 뛸 것입니다.”
쉽다면 쉬울 수도 있고, 어렵다면 어려울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건주와 복주가 반란군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송 조정에서 아는 순간, 관군의 파견은 필연이다. 이기고 또 이겨서 송 조정이 협상에 나서게 하는 것이 민국의 선결과제다.
일반적이라면 그렇다.
나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폈다.
“50년을 약속하겠다는 것입니까?”
“500년.”
나의 호언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나는 쫙 편 손바닥을 태양을 잡아 삼킬 듯 비스듬히 위로 뻗었다.
“격문을 걸겠다. 위를 바라보고 아래를 굽어보고, 폭정을 벌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 따위는 적지 않겠다. 이미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제국이 내세웠던 명분이다. 나는 오직 하나를 적겠다.”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굴(不屈), 욕위제(欲爲帝).”
“그것은…….”
너무나 대담한 발언이었는지 다들 오싹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창한 대의명분, 쓰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내 솔직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도덕을, 예의를, 격식을, 법률을, 병사를 무기로 삼아 정치가 아닌 전횡을 정당화하는 강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꺾이지 않는 한 나는 황제가 되겠다.”
나를 막아서는 자들을 모두 이기면 당연한 말이지만 천하가 내 손에 들어온다. 가진 자들은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이겨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모두를 둘러보았다.
“누군가는 동경에서 폭죽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고아를 돌볼 수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편하게 외국과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가롭게 낚시를 즐길 여유를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것을 원하지 않는 자! 떠나라! 그리고 전하라! 나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를 꺾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널리 말하라! 나는 내가 꺾이지 않음으로 내 옮음을 증명할 것이고, 또 증명할 것이다.”
나는 포승을 풀 것을 명했다. 능진은 머뭇거리면서도 내 명령을 따랐다. 이들이 떠나 이곳의 사정을 발설한다고 해도 나는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자신의 화포를 받아냄으로써 증명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리도 오만하게 나가는 것은 나에게 모든 화살이 쏠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분노를 한몸에 받는 어그로 종자쯤 되는 셈인가?’
내심 실소가 흘렀다. 병력도 재원도 일국을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모든 것이 갖춰질 때까지 내가 감내해야 한다. 나는 모진 풍파를 묵묵히 견디는 태산처럼 우뚝 서야 한다.
나는 동헌을 뒤흔들 정도의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무적(無敵)이다!”
욕망이 가득한 자여! 누구든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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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먼저 드립니다. 삼국지편 전자책 원고나 종이책 원고가 밀려 있어서 한동안 교정에 바빴습니다. 전자책 원고는 이제 마지막 23권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게 끝나면 고려편도 출시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까페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불꽃처럼도 지금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내로 한편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