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50화 (150/257)

00150  (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

내 감상과는 별개로 갑자기 칼을 집어던지고 나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그것을 지켜보던 현관은 뒷목을 잡을 지경이 되었다.

“저, 저, 배은망덕한 놈을 보았나!”

그럼에도, 방정실은 웃고 있었다.

“이 몸이 홀몸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제가 왜 현관에게 가야 할 뇌물을 가로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긴 내가 올 때를 맞춰 횡령을 저지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미 그전부터 꾸준히 현관의 뇌물을 빼돌렸고, 그것을 지금에야 보이도록 드러냈을 것이다.

“당을 멸망으로 몰고 간 황소의 난은 곧, 염상(鹽商)의 난이기도 했습니다. 소금 밀매를 금지한 당에 맞서 상인들은 무장하고 궐기했지요. 장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강력한 통일 정권이 들어서면 명령은 구석구석까지 하달된다. 당 말기나 오대십국 시절은 예전의 강력한 왕조들과 비교하면 지방 통제력이 취약하기 그지없었지. 통제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반대로 백성에 대한 억압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활력과 의지가 강해진다. 황소의 난은 당의 통제력이 염상을 억누르는 데 실패했다는 방증이고, 교훈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력한 통일 정권을 지향하기 위해 모두를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월주요(越州窯, 저장성 소흥에 자리한 가마터)의 발전을 본으로 삼고자 한다.”

“월주요라면…….”

방정실은 월주요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는 듯했다. 도자기는 예부터 귀족들의 사치품이었으나, 오대십국에 이르러 전통적인 귀족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토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문화나 예법으로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시대가 당 말 이전까지였다면, 오랜 혼란으로 이제는 뚜렷한 경계선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즉, 문화나 예법이 토호나 평민이나 별다를 바가 없이 그저 돈 많고 땅이 많은 것을 기준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현대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희미해진 경계선을 붙잡고 있는 자들도 물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남긴 유산의 폐해 일부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귀족과 평민을 완전히 하나로 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고, 특권을 인정했었다. 단, 그 특권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로마가 보여주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해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내가 간과한 것은 인간의 욕심이었다. 절대 권력은 더 쉽게 부패한다는 말처럼 한 번 특권을 잡으면 그것을 내려놓길 거부했다. 물론 내 사후에 벌어진 일들이긴 하지만 애초에 나는 인간의 자정 능력을 너무 쉽게 믿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을 하곤 한다. 그 당시 신하들이 나에게 끊임없이 지적했던 것들이 나에 빗대어 남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역지사지라고는 하지만 남은 내가 될 수 없고, 나 역시 남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내가 군자가 되어 타인을 보듬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다 하더라도, 타인은 군자가 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가후가 유언으로 정치의 이상을 멀리 보지 말고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라는 것도 바로 그런 충고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럼 이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나? 답은 쉽다. 백성의 눈높이가 올라가면 이상도 올라간다.

“월주요는 월나라가 지역의 정권을 잡으며 번성했습니다. 월나라가 월주요에 지원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하나였지요. 무엇을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정해진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장인들은 마음껏 예술혼을 펼쳤습니다. 획화(劃花, 도자기의 겉면에 주걱칼로 그림.)가 생겨났고, 그전까지 보지 못했던 참신한 부조기법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장인들의 의욕은 어디서 생겨났던 것일까요? 장군의 뜻 확실히 알아들었습니다.”

방정실은 나를 등지고 섰다. 성 위를 바라보자 현관은 화살을 쏘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전혀 상황판단이 서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송나라 군제가 가진 문제점의 총합이라 할 수 있었다.

연운 16주를 요나라에게 빼앗기며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한 송나라는 신무기를 도입하여 대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와 별개로 모병제로 전환하고, 보수를 후하게 책정하면서 몸집을 급속히 늘린다. 일견 맞는 정책이다.

그러나 한 가지가 부족했다. 당 말기 절도사의 반란을 경험한 송나라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군에게 군의 통수권을 맡기지 않았다. 장군은 전술적인 대응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고, 전략은 문신이 맡았다. 군을 모르는 자가 군을 운용하고, 강대한 세력을 가질까 봐 또 그것을 잘게 쪼갰다.

명목상으로는 황제가 총사령관이었지만 이 당시 통신과 교통 수준을 고려했을 때, 실질적으로는 당나라의 절도사급 1명이 한 지역에 10명으로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모병한 병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제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제대해서 고향으로 귀향하는 경우는 불구가 되는 것뿐이었다.

“고한다! 압사 방정실은 불패 장군과 불패군을 건성으로 맞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현관 곁에서 개죽음당하지 않으려면 당장 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번 권하지 않는다!”

“이 미친놈아!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내가 건성의 현관이다. 그런데 감히 누가 이곳에서 나를 벌할 수 있는가!”

“내가 벌한다!”

소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물건과 사람이 성벽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 물건의 정체를 입에 올렸다.

“화포?”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시대가 화포를 사용하는 것은 잘 알고 있던 바다. 그러나 큰 폭발력은 없어 단지 불을 지르거나, 연기를 생성하거나, 폭음을 이용해 적을 놀라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일견 제대로 된 화포로 보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 문이었다. 만약 저 화포들이 우리를 향한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언정 엄청난 피해를 볼 뻔했다. 현관이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가 방금 가졌던 오싹한 기분을 현관 역시 맛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능진(凌振), 감히 반역할 셈이냐! 어서 금륜포(金輪砲)를 저리로 돌리지 못할까!”

‘능진? 굉천뢰(轟天雷) 능진(凌振)?’

금륜포라는 이름을 들으니 그가 확실할 것이다. 신화장군 위정국이 무예에 화약의 위력을 결합하여 개인적인 무력을 높였다면, 능진은 수호전 소개 상으로만 보자면 송 최고의 화약기술자이자 포수다. 그 외에 대포나 화약 기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는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 바가 적지 않았다. 같은 것을 만들어도 실력 차에 따라 화포의 사거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수호전에서 양산박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약장사였지. 만날 이름 모를 재료를 주워다 엉터리 약만 만들었지만, 아들만은 끔찍이 위해주시는 분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배운 솜씨로 나는 명절용 폭죽(爆竹)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지.”

“그래서 내가 너의 솜씨를 귀히 여겨 항상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았느냐? 내가 너에게 섭섭하게 대해준 적이 있느냐?”

“아버지는 아들의 폭죽 제작 실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언젠가 황제가 머무는 동경에서 내가 만든 폭죽을 직접 피어 올리는 광경을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말씀하셨었지. 나는 네놈과 거래했다. 금륜포 다섯 문을 완성하면 동경으로 전출시켜주겠다고 했지?”

“동경으로의 전출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그것도 다 연줄을 통해서…….”

“그래서 그 연줄을 채경과 동관으로 잡았나? 금륜포의 성능을 보고하여 너는 상찬(賞讚)을 받았다. 그리고 금륜포를 더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지. 요나라를 상대하려면 꼭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네놈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없느냐! 나라가 너를 필요로 하니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냉큼 그 명령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연운 16주를 되찾고, 요나라를 벌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 아닌가!”

능진은 남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비쩍 마른 체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얼굴은 잔주름이 많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예민한 화약을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지 동경에서 폭죽을 피워올리고 싶었을 뿐이다.”

“동경에서 폭죽을 피워올리는 것 따위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 내가 약속하마, 건성을 굽어보고 있는 저 반란군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금륜포를 마저 완성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살살 달래는 현관의 모습은 오만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진지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정말 충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지사(志士)를 보는 것 같았다.

능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펑!

어떻게 손을 썼는지도 모르게 금륜포 한 기에서 굉음과 함께 갈색 빛 도는 구체가 튀어나오더니 현관의 가슴을 그대로 때렸다. 그 충격으로 여러 사람의 비명이 함께 어우러졌다. 현관을 따르던 무리가 일거에 뒤로 나자빠진 것이다.

“나라가 나에게 해준 것이 대체 뭐지? 연운 16주를 되찾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다. 무엇보다 네놈의 약속을 이제 더는 못 믿겠다.”

현관을 따르던 자들은 겁에 질렸다. 그중에는 금륜포의 시연을 본 것이 처음인 자들도 있어 특히 더했다. 야성에서 도망친 자들이었다.

순식간에 능진 한 사람이 성벽을 장악한 것이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능진 주위의 병사들이 반대파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능진은 포구를 돌렸다. 바로 나였다.

“들리는 말은 그럴싸해. 그런데 그대가 건성의 현관과 야성의 안무사와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아직 모르겠어. 단지, 불패, 불패란 이름만 들리더군. 나를 동경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 시험을 해봐야겠다.”

방정실의 표정이 급변했다. 전혀 예상에 없던 돌발 행동이란 뜻이었다. 방정실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자, 나는 그런 방정실의 어깨를 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이 자리가 나의 실력을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능진의 포술 실력은 마치 화살을 쏘는 것처럼 정확했다고 하지. 그래서 난전 중에 적장만 따로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관승이 나에게 썼던 위정국의 화약이 약간의 충격을 주면 섬광과 함께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면 능진의 금륜포는 화약의 힘으로 철구를 밀어내 파괴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철구의 무게 때문에라도 태극권 같은 흉내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섰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 불패의 의미를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설명했지만, 남자로서 그것뿐일까?

“야성의 성문을 갈랐다고 들었다. 곧이 믿는다면 이까짓 포환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달리 말하면 금륜포로 야성의 성문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표정만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설마 인간이 이것을 막을 수 있으랴 생각했을 것이다.

불신자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광신자가 된다.

펑!

금륜포에 포연이 솟아오르며 갈색 구체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낙차까지 더해진 포환은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는 눈을 감거나 안타까운 탄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옷을 벗었다. 갑주라고는 하지만 면 성분이 많이 들어가 제법 부드러웠다. 나는 갑주의 소매를 양 손목에 감고 마치 장풍을 하려는 자세처럼 손바닥을 위아래로 느슨하게 벌렸다. 그때 포환이 날아들었다.

"큭!"

몇 걸음을 그대로 물러났는지 몰랐다. 입가에는 가는 핏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손바닥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허벅지는 경련이 이는지 꿈틀거렸다.

포탄의 정면을 받아낸 갑주는 마치 그물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내가 손을 내리면서 팽팽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안겨 있던 포탄은 자욱한 연기를 풍겼다. 면이 타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펑!

내가 받아낸 것을 보며 탄성이 다 터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금륜포가 포연을 내뿜자 방정실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능진을 바라보았다. 능진의 표정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털썩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포에 불을 댕긴 것은 그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포환의 무게로 축 늘어진 양팔과 갑주는 마치 팔에 무거운 수갑을 찬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서는 막아낸 보람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뿐이다.

“네가 강한지, 내가 강한지 어디 한 번 해보자!”

나는 야구에서 타석에 들어선 타자처럼 자세를 취했다. 몸을 회전시키며 힘을 받을 수도 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려면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들숨과 날숨이 충분하게 내 심장을 오고 갔다. 허벅지의 경련은 숨을 멈춤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멈췄다. 팔은 약동하는 말의 다리처럼 근육이 솟았고, 손목엔 핏줄이 곤두섰다.

“이야 앗!”

여포가, 관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들이 낭패당할 것 같은 표정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누구보다 강하다!

왜!

“나는 척준경이다!”

허리가 빠르게 회전하자 내 손목 역시 같이 회전을 시작했다. 갑주에 안겨 있던 포환은 반원을 그리며 대각선 상단으로 날아올랐다. 그곳에는 나를 향해 떨어지는 또 하나의 포환이 있었다.

쾅!

최소한 내 귓가로는 천지를 개벽할 정도의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파가 손목과 허벅지와 허리에 전달되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버텼다.

“사람이 맞아?”

너무 놀라 탄성을 지를 생각도 못하고 수군거렸다. 사람이 외려 사람 같지 않으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부딪친 포환 둘이 완전히 부서지며 쇳가루가 흩날리자 마치 검은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쇳가루를 흠뻑 썼지만 개의치 않고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서 당장에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능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척준경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