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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9화 (149/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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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단역기심자견리(但易其心自見理)

하루를 보냈다. 이제 남은 군량은 이틀치였다. 무릇 부대의 장이라면 걱정해야 정상이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병사를 이끌고 건성으로 나아갔다. 사로잡힌 기병과 말들을 지키느라 2천의 병사와 이소, 이강 부자를 후방에 놓고 왔으니 고작해야 2천의 병력이 다였다.

성 위를 쳐다보니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뒷짐을 쥔 자가 있었는데, 장수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대한 자였다.

“흥, 운 좋게 승리했다만 그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어찌 우리를 공격하려 하느냐? 아직 성에는 이만의 정병이 있다. 내 손가락이 까딱하면 네놈들은 모두 죽는다.”

엄포가 엄포로 들리지 않으니 자연 비웃음이 흘렀다. 잠시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네놈은 누구기에 그리도 목에 힘을 주고 자신하느냐?”

자신이 누구냐는 것을 물어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비대한 장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어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강주부윤(江州府尹)의 최측근으로 노구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겠지?”

나는 어디 거창한 배경을 두고 있나 했더니, 강주부윤이라니. 실소가 흘렀다.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강주부윤은 채구(蔡九)입니다.”

“채구?”

그제야 강주부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워낙 존재감이 없던 자라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강주는 구강시를 가리키는데 한나라 때는 시상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곳은 내가 승상으로 재임할 때, 유민을 대대로 받아들이고 농업을 장려하여 크게 번성한 곳이 되었는데, 그때의 기반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강주는 송강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송강이 유배지로 향하면서 여러 사건을 겪고, 여러 인물과 교류를 나누는 것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에 따르면 강주부윤은 채 태사, 즉 채경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그래서 그를 채씨 집안의 아홉째라 해서 채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채경은 다른 고장에 비해 곡식이 넘치고, 재물이 넉넉한 알짜배기 강주를 자신의 아들 몫으로 준 것이다. 그런 강주 역시 채구가 부임하자 학정에 신음하고 있었다. 채구 역시 아비를 닮아 교만하고, 재물에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건주에서는 대략 400km정도 떨어져 있으니 천 리 길이다. 아직 쉽게 노릴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일대가 평정되면 가장 먼저 시선을 돌려야 하는 곳이었다.

어쨌거나 배경만을 따지자면 노구라는 자가 자랑할만했다.

“그러니 나에게 항복하거라. 듣자하니 복주의 안무사를 처리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지? 나를 배경으로 두면 복주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가지고 온 재물을 모두 나에게 바치고, 무릎을 꿇어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다.”

“하하하!”

안하무인이라는 말은 내가 아니라 노구에게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이 시기는 관료 사회에서 금품을 주고받는 것이 악덕으로 치부되지 않는 시대다. 말하자면 뇌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부탁하는 것도 하나의 관례가 된 것이다.

송강이 강주 감옥에 갇히자 수형 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옥리에게 준비한 재물을 뿌린다. 협의로 칭송받던 그조차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 역시 신념을 강조하며 현실적인 재물도 제시했다.

평화조차 돈으로 산 송나라를 보면 현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다.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돈에 어떻게 라는 물음표를 달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과연 그 주인에 그 노비라, 늙은 도적의 모습이 거북을 닮았구나.”

“이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노구가 흥분하며 방방 뛰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의 이름을 놓고 비꼬았기 때문이다. 노구라는 이름을 늙은 노(老), 도적 구(寇)로 바꿔 발음하였고, 채구의 성이 거북 채(蔡)인 것에 착안해 역시 도적 구를 붙여 거북이 닮은 도적으로 발음했다. 그러니 그 뜻을 이해한 자들이 통쾌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노구를 질타했다.

“무릇 한 성의 성주이고, 전쟁 중이라면 병사가 무사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데 외려 병사들이 많이 남았음을 자랑하고 있으니, 병사들이 어찌 그대를 마음으로 따르겠는가? 아무리 많은 돈을 약속한들 그대의 약속을 누가 믿을까?”

“에잇!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자신을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노구는 얼굴이 벌게졌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당장에라도 공격 명령을 내릴 찰나, 젊은 관인 하나가 노구를 만류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했다. 그러나 노구는 화가 단단히 치밀어 올랐는지 자신의 소매를 잡는 관인의 배를 발로 찼다.

“방 압사(押司), 어리석은 네놈들 때문에 저 무뢰배가 나를 욕보이고 있지 않은가!”

압사는 아전 중 가장 말단으로 세금징수나 소송업무를 현장에서 처리하였다. 송강이 여러 사람을 알게 된 것도 압사 출신인 것이 컸다. 백성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직책이지만 승진을 기대할 수 없는 명예직에 가깝다. 약간의 녹봉을 주지만 실질적인 수입은 세금이나 소송 관련해서 오가는 금품이었다.

녹봉이 거의 없으니 위에서도 뇌물을 용인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먹고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조 아전들의 상황과도 같다.

그래서 송강의 유배 길을 따라가 보면 송강이 무척 부유하게 행세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시점으로 보자면 세무 공무원이 범죄자(양산박 등)에게 뇌물을 받고 정보를 흘리고, 도피를 도와주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격이랄까? 북송 시대는 의(義)는 이(利)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있었을까? 나름 양심을 지키며 백성을 위해 일한 사람들 역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이상한 세상이 되면서 부조리가 정상처럼 느껴지고, 정상이 외려 외면받는 세상이 되었다.

노구는 곁에 있던 군관의 허리춤에서 거칠게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칼을 방 압사라는 젊은 공리(公吏)에게 던졌다.

“나를 그렇게 걱정하니, 나의 우환을 덜어다오.”

“현관(縣官) 나으리, 제가 어찌 저런 무뢰한을 상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더러 불구덩이로 뛰어들라는 말씀이십니까?”

“평소에 네놈이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뒷구멍으로 하는 수작을 모를 줄 알았더냐? 이번에도 나에게 돌아올 공물을 가로챘다지?”

“그, 그건!”

저희끼리 일어난 소요에 나는 지루함마저 들었다. 이젠 이런 이야기가 물려 그냥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듣기 싫다. 여봐라, 이놈을 성문 밖으로 끄집어내라!”

병사들이 강제로 방 압사를 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고, 곧 성문이 살짝 열리더니, 칼 한 자루와 방 압사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복주 야성에서 내가 성문을 갈랐다는 소문은 들었는지 성문을 열고 닫는 속도가 전광석화 같았다.

방 압사는 낑낑거리며 겨우 일어나더니 칼을 잡았다. 그리고는 성문 근처를 벗어나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노구는 밉살맞았다.

체념했는지 터덜터덜 내 쪽으로 걷기 시작하던 방 압사의 표정은 점점 진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성벽을 등지고 있는지라 노구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나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전의가 없는 진지함이라니?

그가 나와 열 보를 앞에 두고 섰다. 그리고 칼을 곧추세웠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나를 공격하려는 자세로 보일 것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천하사당천하공(天下事當天下共).”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대답을 듣기를 원하는 것일까?

“비인주소가득사(非人主所可得私).”

군주가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 압사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러면서 연결된 문구를 천천히 음미했다.

“천하사당천하공지(天下事當天下共之), 비인주소가득사야(非人主所可得私也).”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 군주가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북송 초, 유불(劉?)이란 유학자가 남긴 말이었다. 황제에게는 대역무도한 발언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유학 자신도 모르게 율가의 사상을 받아들인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전생은 ‘군주가 올바른 도로 천하를 이끈다.’라는 이상적인 절대왕정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앞서 가는 학자들은 ‘공천하(公天下)’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천하는 천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천자, 신하, 백성을 아우르는 모두의 것이라는 개념이다. 현대인에게도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개념을 정치에 제대로 결합했느냐 하는 것이다. 유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유학을 통치의 선전 도구로만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문제는 또 하나로 귀결된다. 이미 도덕과 예의, 선진적인 개념까지 갖춰졌으나, 그것을 도입해야 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이다. 현대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원한다고 해서 국회의원들이 법률을 통과시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철인 정치로 회귀해야 하느냐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타파해보고자 송은 재상 정치를 내세우게 된다. 조선 초, 정도전이 그리도 원하던 이상 정치인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뽑은 재상이 천자 못지않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한다면? 조선 말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보려고 일부러 나선 건가?”

“그렇습니다.”

압사는 백성과 접촉이 많은 아전이다. 개중에는 타락한 자도 있겠으나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제 도망친 병사들이 압사를 설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를 시험할 수 있다. 문득,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예전의 황제 시절로 돌아감을 느낀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공평해야 한다.

방 압사의 칼끝이 흔들렸다. 그리고 미소가 감돌았다. 성벽 위의 노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왜 공격을 하지 않느냐며 성화였다.

“공치천하(公治天下)”

모두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

방 압사는 칼을 던졌다. 노구가 뭐라고 소리치든 이제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여몄다. 그는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내게 질문했다.

“당신은 난세가 어디서 생기는지 아십니까?”

“보아하니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구나. 나는 똑똑히 알고 있다.”

“어떻게 압니까?”

“이해하고 있다면 애써 추론하고 물을 이유가 있겠느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론을 통해 답을 얻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방 압사는 놀랐다. 그 놀람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내 발언이 그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럼 당신은 난세가 어떻게 일어난다고 봅니까?”

“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방 압사는 잠시 어떤 움직임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가 할 말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이 시기, 생각 있는 학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필시, 이 젊은 관인은 내가 아는 역사 속 인물일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마음속에 담고 있지만 정리하지 못한 것을 구체화해 말했다.

“난세는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난다. 일어나는 곳과 일어나는 것, 그것은 곧 군군(君君), 신신(臣臣)과 같다. 이 이상을 논하는 것은 무용(無用)이다.”

즉, 난세가 일어나기까지의 구체적인 과정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었다. 그것이 과정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본연의 상태에서 인간 내면에 있는 규범의 확실성이 떨어졌다면 이미 그것 자체로 난세인데 구구절절하게 떠들어서 과거만 논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유자(儒者)는 무엇보다 ‘인사(人事)를 말해야 한다.’가 바로 그 뜻이겠군요. 장군의 위명을 들은 지 몇 차례 되지 않았으나 만난 사람마다 하나같이 감복하여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반신반의했습니다. 오늘 참으로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압사 방정실(方廷實)이라 합니다. 미력하나마 장군을 돕고자 합니다.”

방정실? 남송 초기, 혼란스런 국정 속에서 공명정대함으로 이강을 보좌했던 명 어사(御使)였다. 이강과 방정실이 모두 내 품에 안겼다.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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