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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8화 (148/257)

00148  (19) 이세동조(異世同調)  =========================================================================

이소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멈칫했던 건성 병사들은 믿을 수 없는 약속이라며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려 했다.

“장군은 따르는 복주병들에게도 건성의 재물을 나눌 것을 제의했었습니다. 그런데 적병까지 포함해 재물을 나눈다는 것이 온당키나 합니까?”

“관호(官戶)!”

나는 쩌렁쩌렁 외쳤다. 가까이서 불만을 토로하던 이소가 그 음량에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형세호(形勢戶)!”

도망치던 병사들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하나같이 눈빛이 사나웠는데, 그들이 가장 증오할만한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당 중기 이후 균전제가 붕괴하자 대지주와 소작민의 고착화가 심각해졌다. 호족, 토호라고 불리는 이들, 즉, 형세호는 지방 관리들과 결탁하여 주, 현에서 부과하는 역(役)을 피하고, 각종 혜택을 누렸다. 그러다 송 대에 이르러 이들은 앞선 정보를 발판으로 과거를 치른다. 이렇게 형세호의 자제가 관료가 되면 관호라고 불렀다. 형세호와 관호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각종 이권에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들은 권력까지 잡자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면역, 면제, 면세 혜택을 고스란히 받으며 승승장구하자 황제들은 그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관호와 형세호는 거대한 장원(莊園)을 운영하기 위해 다수의 전호(佃戶, 소작인), 노복(奴僕, 노비)을 부렸는데, 노동력에 대한 값을 제대로 치렀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관호와 형세호는 이런 전호와 노복이 들고일어날 것이 두려워 법까지 고쳤다. 전호가 지주를 상대로 벌이는 범죄는 어떤 중범죄보다 무겁게 만들었고, 지주가 전호를 상대로 벌이는 범죄는 가볍게 처벌되었다.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실현된 것이다. 게다가 수전전객(隨田佃客)이라 하여, 대지주 간에 토지를 사고팔면 거기에 속한 전호까지 옮겨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들의 토지를 너희에게 나눠주겠다!”

“장군!”

이소가 다급히 내 소매를 잡았다.

“말씀하신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건주 일대의 관호, 형세호를 싹 잡아들이면 능히 십만 대군도 일시에 조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대부(士大夫)입니다. 만약 사대부를 탄압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면 개국의 명분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대부도 장군의 관리가 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대부? 유학을 배워서 한다는 짓이 고작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기 위한 수단이라면 나는 필요치 않다. 그들만이 관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가장 어리석은 생각 중 하나가 어떤 일을 함에 ‘대체할 것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대는 사대부를 포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외려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생각해보아라, 인종은 관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을 시행했으나, 강력한 반대에 휘말려 무산되었다. 신종은 왕안석의 신법을 받아들여 면역법(免役法, 관호에게 세금을 걷고자 제정)을 시행하였다. 철종은 한전법을 개정하여 새롭게 부활시켰다. 당금의 황제(휘종)는 어떠한가? 즉위하자마자 뜻있는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기존 한전법과 면역법을 합친 더 강력한 견제법을 만들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바뀐 것이 있는가?”

이소와 나는 마치 눈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내 마지막 반문에 이소는 한숨을 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선택해라! 생계를 위해 창을 잡은 자들은 창 대신 땅을 준다. 너희가 아는 전호와 노복을 우리에게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너희가 상상하지 못했던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돈도 주고 땅도 준다. 더 바라는 것이 있는가? 말하라!”

유학과 척을 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척을 지고 싶은 유학은 권력에 기댄 가짜 유학일 뿐이다. 진정한 유학자라면 본질을 깨달을 것이다. 황제는 그들이 필요할지 몰라도, 아무런 기득권도 없이 맨땅에서 시작한 나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예전의 나라면 그들을 포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지방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송 태조가 그 폐단을 끌어안았기에 지금에 이르러 고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중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부를 도려내는 고통이 필요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주춤거리던 적병 중 한 명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약속한다. 나는 수전전객을 없앨 것이며, 지주에게 유리했던 법을 모두 파기하여 원점으로 돌릴 것이다.”

지주에게 전호와 노복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제 활동을 모두 예속당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경제 활동이란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길을 터주면 이들은 선택할 것이다. 이들은 과거처럼 살길 원할까? 그 답은 너무나 쉽다. 그래서 지주들은 더욱 이들을 옥죄려 했다.

나에게 질문한 적병은 두 손에 잔뜩 쥐고 있던 재물을 버렸다. 빈손이 된 그는 엎드려 외쳤다.

“나는 장군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군을 따르는 병사들 또한 우리와 같은 약속을 받았겠지요. 장군께서 관호와 형세호를 때려잡겠다면 이까짓 재물에 탐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제발 그들을 매질하는 자리에 나를 넣어주십시오.”

군중심리는 순식간에 움직인다. 한 명이 무릎을 꿇자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청했다.

“저는 성안의 병사 중 최소한 열 명은 데려올 수 있습니다. 돈? 돈도 좋지만, 관호와 형세호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장군, 저도 열 명은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장군, 저는 같은 마을 출신들이 백을 헤아립니다. 절반은 넘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장군, 성밖에 거주하는 관호와 형세호를 모두 꿰고 있습니다. 저를 길잡이로 삼아 주십시오.”

납차(蠟茶, 복건차의 별칭)가 황실 전매용이라는 명성을 얻어 전국적으로 특별한 지명도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건주에 자리한 차원(茶園)이 일천 곳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복건의 대표적인 지주가 되는 셈이다.

본래 차 전매의 목적은 지방 재정의 확충보다 군비조달과 중앙재정 확충이 컸다. 그럼 지방 관부는 무슨 수로 재정을 조달했을까? 그것을 지주들이 채워주는 것이다. 자연 지주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다.

그것을 모두 이들에게 돌려주어도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것보다 더 큰 재원이 남아 있었다.

‘오로지 건주에만 존재하고 있는 30곳의 어용차원(御用茶園). 그것만 내 손에 넣으면 된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어용차라 한번 맛이라도 보려는 자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차 제조 기술을 자랑하며 오직 황실과 그 일원들에게만 허락되는 어용차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함부로 마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건주가 후방치고는 매우 많은 수만의 병사가 주둔하는 것이다.

어용차원을 빼앗기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금군이 출동할 것이다. 예상한 바다. 노리는 쪽의 목적지가 하나라면 지키는 처지도 수월하다.

적병들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성으로 돌아갔다. 매복에 당해 겨우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덧붙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만 지나면 성문은 자연적으로 열릴 것이다. 참고 살았던 세월만큼 그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고, 분노는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일만의 병사가 고작 사천을 이기지 못하고…….”

기병 군관은 이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넋을 잃었다. 보병 8500에 기병 1500이 동원된 것은 이 지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출병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져 해적을 상대할 일도 없고, 자신들을 위협할 강대한 이민족도 없다.

그러니 평소에는 얼마나 거들먹거리고 백성을 위협했을지 짐작이 갔다.

기병들을 따로 격리하고, 그들이 타던 말을 한 자리에 모으니 마치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현장을 정리하기 바쁜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말들을 모두 팔면 얼마나 받을 것 같은가? 복주에 있을 가족들에게 자존심 좀 세울 수 있을 것 같은가?”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말은 처음 봅니다. 전마가 무척 비싸다고만 들었을 뿐 정확한 셈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자네들에게 돌아갈 몫일세. 비싸게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리와 안남, 왜, 고려 할 것 없이 상인들을 불러 흥정을 붙이세.”

병사들은 흠칫했다. 뒤따르던 이소와 이강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전마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건주의 집산물만해도 어마어마한 양이거늘 전마까지 굳이 저희에게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일천의 기병이면 일대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위험…….”

“쉽게 구했지 않습니까?”

“한 번은 통할 수 있어도 두 번 같은 일은 어렵습니다. 장군의 재주가 하늘에 닿은 것은 알겠으나…….”

“다른 방법으로 손에 넣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유롭게 받아치자 이소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내 입에서 이유가 계속 흘러나올 것임을 짐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강이 나섰다.

“쉽게 힘을 얻을 수 있거늘, 그것을 애써 포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군과 아버지와의 논답을 통해 조금 깨달은 부분이 있습니다. 장군은 백성이야말로 진짜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말을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마음을 얻어 천하를 얻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자 한다. 일천의 기병? 지금 저 포로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으냐, 1500에 달하는 기병이 그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군(지방군)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은 차가 있으면 또 구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깜박이며 이강의 어깨를 쳤다.

“고려나 왜, 안남, 대리에서 상인들이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잠시 이 말들을 빌려 쓰도록 하자. 그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다 이내 웃음보를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장군은 재미있는 분입니다. 잠시 빌려 쓰는 정도야 병사들도 용인하겠지요. 그 사이에 복건을 모두 평정하시겠다는 복안이 아닙니까?”

“어용차원을 빼앗기면 조정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진압군이 내려올 것이다. 그 일전에서 우리가 승리하면 조정은 더는 우리를 핍박할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벼슬을 내리고 달래려 하겠지. 우리를 살살 달래 대리를 공격하도록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장강 이남에 설치된 지방각화무(地方?貨務) 6곳을 모두 손에 넣고, 강남의 다리(茶利)를 안정시킬 것이다. 그리되면 송의 재정은 완전히 파탄 난다. 그때 그들의 선택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지 않으냐? 나 역시 매우 궁금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이강이 놀라는 것 못지않게 이소 역시 내 계획의 전모를 듣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되면 강남이 자랑하는 세 가지 전매품이 장군의 의중에 따라 좌지우지됩니다.”

이소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각화무라는 것은 전매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장강 이남에는 수운이 편리한 여섯 도시에 각화무가 존재했다. 각화무는 세 가지 전매 품목, 차, 술, 소금을 사들일 권리를 상인들에게 파는 역할을 했다. 즉, 상인들에게 먼저 현물, 현금을 받고, 다교인(茶交引), 염교인(鹽交引)과 같은 물품 어음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개봉에서 전매를 거의 관장하지만, 모든 거래를 도성에서만 한다는 것도 비효율적이었기에 내린 조치였다.

“발해가 망하자 많은 사람이 발해의 부흥을 외치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요나라의 정치가 너무나 가혹해서? 실상은 다르다.”

뜬금없는 발해 이야기에 이소와 이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발해는 술, 소금, 누룩의 유통을 국가에서 독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금의 징수가 관대했지. 백성의 살림살이가 여유로우니 자연 국가의 부는 올라갔다. 요가 발해인의 반발을 우려해 발해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전매법을 적용시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대우하에서 발해인은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러다 요가 한인 유학자들을 우대하여 관리로 특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속칭 재정 전문가라는 자들은 송의 폐단이 그대로 담긴 전매 제도를 발해인에게 적용시켰다. 그들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부여받은 의무라고 설명했지. 그러자 발해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권리가 없는 부당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 요나라 백성이라면 아예 요나라의 백성임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었지.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발해인의 의중을 모아 내부 개혁을 할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겠지.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구정물에 맑은 물 한 바가지를 부어 희석하느니, 차라리 구정물을 모두 쏟아버리고 맑은 물 한 바가지를 남기겠다고.”

강경한 내 태도에 이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타협의 여지는 없습니까?”

“백성이 정치를 걱정할 정도가 되면 위정자들의 잘못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백성이 한목소리를 내어 그제야 깨달을 정도라면 권력을 놔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러합니까? 유학자들은 충효를 둘로 나눌 수 없다며 하나 됨을 강조했지요?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낳아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나라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백성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흔히 그 논리를 나라에 비유하면 대다수는 그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충고한다. 대한민국인이면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인이라는 것이다. 내부 개혁을 통해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설득한다. 가진 자들, 기득권은 그렇게 우리를 설득한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다는 것은 기득권의 지각 변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애국심이 값어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라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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