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19) 이세동조(異世同調) =========================================================================
‘내가 있는 이상 그리되지 않을 것이다.’
송이 금에게 밀려 장강을 넘기 전에 미리 강남을 선점하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나는 채권자로서 그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소, 이강 부자를 곁에 앉혀 식견을 시험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에 청산이 땅을 칠 정도로 질문에 막힘이 없었고, 여유가 흘렀다. 그러다 율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율가가 다른 학문과 다른 것은 사회, 그 자체가 어떻게 통합하고 화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세밀한 지침을 내린다는 데 있습니다. 즉, 이론보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실천의지에 크게 좌우되지요. 민 제국의 율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의 실천의지가 역대 어느 군주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군주가 다시 등장하지 않는 한 율가의 부흥은 어렵습니다.”
이소의 말이 맞았다. 유학이 개인의 윤리에서 점차 사회로 확대된다면, 율가는 사회 윤리를 개인 윤리에만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제한도 가할 수 있는 차이점이 있었다. 손해에 민감할 밖에 없는 약소층보다 상류층의 책임을 증가시키는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 윤리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사람이 전부 개인 윤리에 통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 합의에 강제성을 부여하여 지키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법가 사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유가, 도가, 법가를 삼각형 형태로 그린 후, 각자의 장점을 취하여 가운데에 설 수 있는 중론이 율가라 믿었다.
“제국은 하나같이 선명한 이념을 개국의 실마리로 삼았습니다. 저 역시 그러하지요. 저는 율학의 가치를 주장(主將)으로 삼아 적을 상대할 것입니다. 영웅은 나라를 창업할 수 있지만, 그 나라의 영속을 보장하는 것은 올바른 가치입니다. 이역만리의 타국들이 종교 문제로 갈등을 빚고, 그것을 핑계로 서로 살육하는 것을 보며 당대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화두가 무엇인지 고심했습니다.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국제적인 공조가 이루어지고, 단 두 차례뿐이었지만 열방(列邦)이 한 경기장에 모여 평화를 기원하고, 건전한 승부의 장을 펼쳤던 그때로 회귀하려 합니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발전된 정치, 올바른 정치를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자면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선생과 아드님에게 간곡히 바라오니 부디 저와 같은 꿈을 꾸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청하자, 이강은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였고, 이소는 내 행동을, 내 발언을 관조하고 있는 듯했다.
“민 태조는 사람을 만나면 항시 진심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태조께서 인재를 대하심에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금력 또한 자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무수한 인재가 태조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은 태조가 보여준 신념이 자신들의 여망에 부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꾸자는 제안은 그만큼 무섭습니다. 일생을 걸어도 쟁취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실로 거대한 역사(役事)의 참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가자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그 보상은 후대의 평가로 돌려받습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보상입니다. 그럼에도, 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어야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습니다. 장군의 열망은 다른 위정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이 느껴집니다. 그 순수함이 진정이라 믿겠습니다. 촌부 이소, 비록 능력도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열정만은 장군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청하나니 출사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눈치를 보던 이강도 넙죽 어미를 조아리며 외쳤다.
“이강도 삼가 출사를 청합니다. 받아주십시오!”
나는 중천에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았다.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제대로 된 길이 어떤 것인지 몰라 흔들린 적도 많았던 좌충우돌의 세월이었다. 이제야 본 궤도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함께 건주로 가겠습니다. 건주 일대의 지리는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으니 장군의 계획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청이었습니다. 자자, 기쁜 날이니 한 잔 받으시지요.”
술이 오고 갔다. 오늘 같은 날은 자신도 마셔야 한다며 이강도 한 잔을 받았다. 그러나 술이 잘 받는 체질이 아닌지 금세 벌겋게 달아올라 쓰러져 자기 시작했다.
다시 백성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평생 마실 술을 다 마시는 느낌이었다. 고려에서의 나는 그렇게까지 주당은 아니었는데 오늘만은 오기로라도 버텨야 한다는 심정을 품고 독하게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병력 점고가 시작되자 어제보다 이백 명의 인원이 부족했다. 그중 군관이 절반이었는데, 숫자로 보면 중간 간부들이 거의 빠져나간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누구 밑으로 모여야 할지 몰라 재배치했다. 술기운이 사라진 병사들은 현실적인 위기를 느꼈는지 어제보다 자신감이 하향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나는 먼저 야성을 수비하고, 전선을 지키며, 인근 군현을 접수하는 임무를 관승과 양지, 주동에게 맡겼다. 내정 보좌로 청산을 남겼으니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혹여 이소나 요시치카가 도착할 것을 대비해 미리 귀띔을 해두었다.
관승, 양지, 주동은 불만이 대단했다. 나만 일을 다하니, 자신들은 식충이가 된 것 같다며 투덜 되자 그들의 임무 역시 쉽지 않음을 상기시켰다.
“복주 인근 일백 리 일대는 건주 보다는 못하지만 평지다. 민강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조금만 노력한다면 자급자족도 가능하지. 이곳 풍현을 제외하고 인근에는 세 개 현이 있는데 너희도 들어서 알겠지만, 관리들의 평이 좋지 않다. 쓸만한 자는 포섭하고, 악행을 용서할 수 없다면 기꺼이 처단하라. 세 개 현에 배치된 병사들의 합이 대략 사천 정도가 되는데 손해 없이 처리하려면 꽤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삼 인은 쉬운 일이라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내 뜻을 받아들였다.
나는 병력을 나눴다. 복주병 오천 중 이백명이 이탈하여 4800이 남아 있었고, 나를 탐라에서부터 따른 산동병이 2000이었다. 원정의 목적 중 하나가 복주병의 사기를 올리고, 그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나는 복주병 4000을 원정군으로 삼았다. 800명을 남긴 것은 그들이 인근 지리에 익숙했고, 대항군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하여 남긴 것이었다. 다들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라 될 수 있으면 칼을 맞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원정군 4000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소리쳤다.
“약속한다! 나는 너희보다 항상 앞에 있을 것이고, 물러나면 항상 뒤에 있을 것이다. 자부심을 품어라! 반드시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후일 위대한 첫걸음으로 기억될 것이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초나라 시절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었다. 초나라 시절의 위기 상황은 돌발적인 열세에서 초래되었을 뿐, 대부분은 여유롭고 풍족한 작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뛰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어려움은 성공으로 연결되었을 때, 더 값진 감동을 일으킨다.
숙영지조차 변변히 마련하지 못해 그냥 되는 데로 자리를 잡고 몸을 뉘어야 했다. 만약 내가 중동에서부터 중원까지 횡단해본 경험이 없었다면 야영이 무척 어색하고 서툴렀을 것이다. 사막과 초원의 경험을 되살려 능숙하게 물을 찾고, 그나마 편하게 몸을 누울 평지를 병사들보다 먼저 찾아낸 덕분에 병사들의 믿음은 한층 오른 것 같았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자들은 운동하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재배치한 십인장을 기준으로 한 무리씩 찾아다녔다.
팔씨름도 했고, 씨름도 했다. 구슬픈 노래를 듣기도 했고, 내가 노래를 불러야 하기도 했다.
인원이 많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는 오기나 항우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예전의 내가 전장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병사들에게는 그저 굽어보는 존재였을 따름이다.
그러다 돌을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내기에도 참가했는데 다들 수준급의 솜씨들이었다. 그중에서 단연 발군의 실력을 갖춘 젊은 병사가 있었는데, 생김새가 어쩐지 이곳 출신 같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그러한 의문을 묻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산동병입니다.”
산동병은 이번 원정에서 제외라고 분명히 말해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연유를 물었다.
“탐라에서부터 장군의 신위를 계속 지켜봤습니다. 게다가 장군의 열변은 제 가슴을 격동시켰지요. 장군의 신위를, 장군의 열변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이미 제게 하늘입니다.”
순수한 의도는 이해했지만 이렇게 해서는 군기가 서지 않는다. 나는 일단 관등성명을 물었다.
“저는 동창부(東昌府)의 장청(張淸)이라고 합니다.”
동창부는 현대 중국으로 치자면 요성시(聊城市)다. 주동이 동창부의 도두였으니 그의 휘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위정국을 죽이는 자리에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가만있자, 동창부의 장청? 몰우전(沒羽箭) 장청!’
소설 상에서 동창부의 관군 장수로 출현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지금은 새카만 애송이 병사 시절인 모양이었다.
“제발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선봉에 서라면 서겠습니다.”
장청은 내가 혹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릴까 봐 조바심이 났는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단호하게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청의 장기를 충분히 발휘하면 희생을 전무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규율이 병사의 목숨보다 중요한가? 규율도 결국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눈감아주는 것은 한 번뿐이다. 대신 너에게 중임을 맡기겠다.”
남아도 된다는 말에 장청은 뒷말을 듣기도 전에 않고 뛸 듯이 기뻐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무조건 나를 따라라. 나를 끝까지 쫓아라. 가로막는 적은 네 돌팔매로 쓰러트려라. 안위는 네가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다.”
“장군을 따르면 된다고요? 그거야말로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절대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다.”
내가 군대의 선두에 서면 보좌하는 아장 역할 정도로 생각했을까? 그때가 닥쳤을 때, 놀란 표정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밤마다 나는 각 부대를 돌며 대화를 나누고, 장기를 자랑했다. 병사들은 나를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행군은 마치 소풍과 같았다. 칠 주야가 걸린다던 건주에 5일 만에 다다른 것은 그만큼 병사들의 의욕이 고취되었다는 뜻이리라.
우리는 건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이곳에서 바로 2리 앞에는 이소가 지적했던 협곡이 있었다. 사람이 오갈 길이 해발 200m 정도였고, 양쪽에 자리한 산은 400m에서 600m 정도의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숲이 무성하여 매복에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첫날 이후로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장청은 우려를 금치 못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매복을 의심해볼 만할 텐데요. 더구나 이곳 출신들은 이러한 지형을 숙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바보가 맞다.”
“네?”
“욕심이 이성을 가리는 것이지. 패배는 항상 지휘관의 과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재물이 담긴 수레를 협곡 여기저기에 흩트려 놓았다.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건성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민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이소와 이강이 나와 나란히 섰다.
“이제 곧 성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배다리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겠지요. 우리의 정체와 병력 현황을 모두 꿰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일 것입니다. 더불어 가득 모인 재물을 손에 넣고자 하는 욕심까지.”
나는 야성에서 재물의 사용처를 특정하지 않았다. 탈주한 자들은 그것을 멋대로 상상했을 것이다. 병력 소수로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니, 성문지기를 매수하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나의 신위를 구경했지만, 건성은 야성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성문을 자랑했기에 인간의 힘으로 자를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럼 그전에 선수를 치면 어떨까? 우리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이다.
‘나하반드 전투(Battle of Nehavend)의 판박이.’
사산 왕조의 참패로 아랍에게 이란 정복의 길을 터주고, 이란이 이슬람화되는 결과를 낳은 중요한 전투가 바로 나하반드 전투였다. 그렇게나 중요한 전투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승부가 결정 났다.
역사를 읽는 자들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그들의 무지함을 비웃지만, 역사는 또 반복된다. 역사를 단순히 재미로 읽었을 뿐 대응할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개전 명령도 없이 선두의 기마대가 우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성을 떠난 이들이 제대로 역할을 했다는 방증이다.
“작전대로, 뿌리고 후퇴한다!”
이소가 병사를 독려했다. 병사들은 각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패물들을 꺼내 들었다. 협곡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 셈이다. 미련없이 버리고 병사들은 대오도 흐트러진 채 마구잡이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소와 이강도 출발했다.
“기병은 이 정도의 재물에 혹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병은 다르지.”
말에서 내릴 여유가 없는 기병과 구보를 하는 보병은 상황이 다르다. 달리면서 바닥에 구르는 패물을 곁눈질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다. 한 사람이 손을 뻗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도 뻗을 것이다. 군중심리는 삽시간에 발동한다. 보병이 기병을 미처 따르지 못하게 된다.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
기병의 속도는 후위에 처진 우리 병사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안전하게 매복할 장소까지 후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나와 장청의 몫이었다. 장청은 처음에 우리 둘이서 후퇴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농담이 심하다며 웃었었다. 그러다 진담인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이 해야 할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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