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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5화 (145/257)

00145  (19) 이세동조(異世同調)  =========================================================================

“오늘은 날씨가 무척 맑겠습니다.”

내 주위에는 십수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술을 대작하기 위해 다가왔다가 쓰러진 이들이었다. 남은 사람은 관승, 양지, 석보 정도였는데 이들 역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저도 주당이라 자처하는데 주신이 여기에 있었군요.”

잔을 들다 말고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석보가 ‘헤’ 웃으며 쓰러졌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항주나 소주로 먼저 가지 그랬습니까? 그곳은 밀주(密酒)가 성행하는 곳으로 술을 잘 마시면 보는 눈이 달라지지요.”

그 말을 끝으로 양지도 쓰러졌다.

나는 사발을 다시 들이켰다. 잔치는 이미 끝났지만, 사람들은 내가 술을 들이켜는 것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마실 수 있는지 내기를 거는 자들도 있었다.

현대도 술을 잘 마시는 것이 남자다움을 상징한다는 믿음이 남아 있는데 지금 시대는 그러함이 더 한 시대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데 단지 술을 잘 마신다는 이유로 호걸이라고 불릴 정도니 말이다. 유치하지만 나는 그러한 정서가 고맙고 즐거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는 모두 푹 쉰다. 출발은 내일 아침, 술시로 잡는다. 만약 나와 뜻을 할 수 없다거나, 성공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내일 이곳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 계획을 밀고해도 좋다.”

“그런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병사들이, 가족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 중에 몇몇은 사라질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안무사와 함께 개봉에서 온 무리다. 그들은 기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반역 도당의 무리에 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이탈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작전의 시작이었다.

그런 자들은 잔치에서 술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애초에 백성과 뒤섞이지 못하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끝까지 버티던 관승까지 나가떨어지자 가벼운 환호가 들렸다. 나는 손을 들어 답례하고 어서 파할 것을 소리쳤다.

“안무사가 묵던 관사가 있습니다. 그리로 납시지요.”

술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몇 잔 마시고 자리를 지켰던 청산이 다가왔다.

“재물은 모두 내성 창고로 모으겠습니다. 그곳에는 안무사가 축재한 재물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장군께서 어떤 기사(奇事)를 벌일지 상상이 가지 않으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무사의 식솔들은?”

“아,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었군요. 안무사는 정실을 일찍 잃고, 첩만 다섯인 호색한입니다. 그 첩들에서 세 명의 딸을 낳았지요.”

“그들은 관사에 머무르고 있겠군.”

“아까 제가 그녀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안무사의 성향이 워낙 기괴하여 성적으로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을 동정하는 백성도 있었지요. 그녀들은 소식을 듣자 안무사의 죽음을 외려 반겼습니다. 장군께서 원하신다면 수청(守廳)도 가능합니다. 안무사란 벽이 사라진 이상 그녀들의 운명은 다했다고 봐야지요. 장군을 새로운 벽으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전족(纏足)한 한족 여인을 맞아들일 지주는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

전족이라니, 그러고 보니 지금 시대는 한족 귀족 사이에 전족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전족의 시초는 5대 10국 중 하나인 남당(南唐)이었지만, 그것이 상류층에 유행처럼 번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전족은 한족만이 고집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타민족과 차별화한다는 문화적인 자긍심으로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전족을 했다면 수레가 따로 마련되지 않는 이상 도망도 치기 어렵다. 말 그대로 방안의 인형인 셈이다.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나?”

“술을 마시면 여자를 품고 싶어하는 것은 남자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성욕을 감내할 수 있다면 저는 품지 않으시길 청원합니다. 그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녀들이 장군을 등에 업는 것은 이곳 백성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당분간 그녀들을 기존처럼 대하라. 건주를 얻은 후 다시 생각해보겠다.”

“조언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묵으실 관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나는 관사로 가지 않겠다. 그리고 재물을 따로 옮길 필요도 없다.”

“그럼 어디서 주무시겠다는 말입니까?”

나는 그냥 웃었다. 청산은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여기서 주무시겠단 말입니까? 혹여 변이라도 당하시면…….”

“병사를 배치할 필요도 없다. 모두 쉬게 해라. 지금 이곳에 쓰러진 자만 열이 넘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내들이다. 누가 재물을 노리고 우리를 해하려 한다면 내가 애써 설득한 결과가 고작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믿는다. 설사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산처럼 쌓인 재물을 탐내는 복주인은 없을 것이다.”

“저희를 그렇게까지 믿어주시는 것은 좋으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아직 나는 술을 다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이곳에 오지 못한 백성도 있다. 나는 그들과 술을 나누겠다.”

아무리 나라도 이틀을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 사람은 진심을 말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러한 진심, 그리고 쌓인 한을 가감 없이 듣고 싶었고, 풀어 주고 싶었다.

청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장군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분입니다. 제가 살면서 장군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모산파의 도사를 본 것만으로도 평생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거늘, 장군은 모산파 도사가 이곳에 왔다는 것조차 지워버리시는군요. 그럼 전, 장군 옆에서 시중이나 들겠습니다. 어여쁜 미인이 아니라 탐탁지 않으시겠지만 속하의 충정이라 생각하고 참으십시오.”

“하하하!”

청산의 넉살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잔치가 파하여 잠깐 적막했던 야성에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산처럼 쌓인 재물을 보고 놀랐고, 그 앞에서 술을 마시는 나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 옆으로 수십 개의 빈 술통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취한 사람들과 수십 개의 빈 술통이 널브러진 가운데 고고하게 좌정을 하고 술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불상처럼 보였는지 자못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는 자도 있었다.

호기롭게 나에게 술잔을 달라고 요청하는 자들에게는 나는 기꺼이 잔을 나눠주었다. 쉬지 않고 술을 마셨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건주의 지리에 능하다는 소무(邵武, 복건성 소무시) 출신의 장년이 등장하자 나는 마침 궁금하던 건주의 지리를 물었다. 대강 아는 바가 있지만 아무래도 세세한 부분은 이 지역 사람들에 비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한 내용을 종합하며 이랬다.

건주와 복주는 민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배를 타면 수월하게 갈 수 있다. 다만, 상류인 건주에서 하류인 복주로 올 때만 적용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살이 제법 세서 노를 저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도보로 가기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주-복주 간 수운을 가장 이용하는 경우가 민강 상류에서 벌목한 나무를 복주에 자리한 조선소로 보낼 때라고 했다.

“건성은 북쪽으로는 무이산(武夷山)을 끼고 있고, 민강이 마치 해자처럼 성 주위를 둘러가는 형태입니다. 하천에서 건성까지의 거리는 대략 20장 정도가 되는데 완만하게 경사가 진 구릉 지대입니다. 건성에서 화살을 쏘면 하천 넘어까지 도달하기 때문에 정공법으로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내가 말술이라도 술이 들어간 이상 취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런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지리를 말하려면 강이 어떻고, 산이 어떻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떻다느니,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잔을 받아든 중년인은 건성을 전장으로 놓고 설명하고 있었다. 필시 이런 쪽으로 지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술을 맛나게 마시고, 허름한 장포로 입가를 닦았다.

“풍현이 이렇게 떠들썩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제 장군의 연설과 신위를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될 정도로 말입니다. 촌부가 힘을 내어 장군을 찾아온 것은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를 통해 들은 장군의 계획이 우려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안무사의 수족들이 건성으로 달려가 모든 것을 낱낱이 알릴 거란 우려 말이오?”

장년인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말고 멈췄다. 그것도 잠시 술잔을 쭉 들이켜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군께서는 그것까지 염두에 두셨던 모양이군요. 그들을 반간(反間)으로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재물로 소문을 내 건성의 병사를 야전으로 끌어들인다. 아니, 매복을 활용하시겠군요. 건성의 남쪽엔 협곡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잠시 주변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청산이 놀라며 말했다.

“장군께서는 진짜 그렇게 싸우실 생각이었습니까?”

아무래도 나는 배우가 될 자질은 없었던 모양이다. 예전의 나도 가후 같은 인물들 앞에서는 항상 발가벗겨진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도 그러한 성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안심하십시오. 사람이 잠시 모이지 않는 틈을 타서 장군 앞에 선 것이니 장군의 수족을 제외하고는 새어나갈 일이 없습니다.”

“제가 인물을 몰라 뵀군요. 선생의 대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장년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낱 촌부입니다. 대명이랄 것까지도 없지요. 이소(李召)라 합니다.”

문득 이소(李素)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쯤 바다를 건너오고 있을까? 잠시 상념에 빠졌으나 지금 나는 이소라는 정체 모를 기인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자와 이름이 같아 손님을 두고 잠시 결례를 범했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오히려 장군과 제가 인연이 두터운 것 같아 흥겹습니다.”

“촌부라고 여기기에는 선생의 풍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시지요.”

“풍문으로는 장군이 성난 사자와 같다고 하던데 지금의 장군은 다르군요. 그저 빈한한 율사(律士)일 뿐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법을 다루는 서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율사란 직책 자체가 없던 시기다. 나는 문득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아는 율사란 율가 서원을 졸업한 서생을 일컫는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유재(劉載)님을 아십니까?”

그 이름을 듣고 그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유재 율사(律師)를 아십니까? 제가 그분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율사(律師)까지 나왔다. 나는 문득 과거로 돌아가 장굉, 장소, 서간 등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율사(律士)를 키우는 선생을 율사(律師)라 칭했었다.

“과연, 그 선생의 그 제자라, 사제를 모두 만나다니 저도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부시랑 유재는 곽여와 함께 창선도에서 나를 도와준 인연이 있었다. 그는 본인이 율가 학사라고 말한 바가 있었고, 강남 지역은 율가의 뿌리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밝혔었다.

언제 그들을 찾을까 싶었는데 이소의 만남으로 나는 앞길이 트이는 기분을 받았다.

그때였다.

“아버지!”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이제 열 서넛으로 보이는 야무진 소년이었다. 이소는 내게 빈 잔을 들이밀며 말했다.

“제겐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늦잠을 자기에 그냥 두고 나왔더니 이제 쫓아온 것 같습니다.”

소년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속도를 멈췄다. 아버지 앞에 선 소년은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을 대며 숨을 허덕였다. 소년의 숨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소가 소년에게 말했다.

“인사부터 올리거라. 유재 율사와도 연이 있는 분이시다.”

“제 절 받으십시오. 친우, 두미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강(李綱)이라 합니다.”

소년은 냉큼 넙죽 엎드렸다. 나를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친우란 놈이 두미가 죽을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편히 늦잠을 자고 있었단 말이냐?”

“장군, 그것은…….”

이소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자초지종이 있는 모양이었다. 소년, 이강은 이소가 설명하려고 하기 전에 자신의 웃옷을 벗어젖혔다.

“아, 저런…….”

청산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채찍을 맞은 것처럼 등 뒤가 그물처럼 심하게 부어 있었다. 이소가 혀를 차며 내게 말했다.

“제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미 아비는 두미를 다른 집의 아이와 바꾸려고 했지요. 차라리 자신을 잡으라고 대들었다가 싸리비로 흠씬 얻어맞고 기절했더랍니다. 이 녀석을 집까지 데려다 놓은 사람이 바로 두미지요.”

슬픈 이야기였다. 자신의 아들을 차마 잡아먹지 못하고, 남의 자식과 맞바꿔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려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이해한 아들. 그런 아들의 친구. 이것은 이들의 잘못인가? 결단코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비인(非人)의 사슬을 끊을 것이다.

이소가 내 빈 잔을 따랐다. 한 잔을 들이켜자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큰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다짜고짜 질문에 소년은 잠시 갸우뚱하더니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강입니다.”

나는 이소에게 급하게 물었다.

“선생의 고향이 소무라고 했지요? 이강도 그곳에서 낳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상한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가 열을 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로 내심 열을 내고 있었다.

‘이 소년이 충정(忠定) 이강이라니!'

남송의 수호자로 보통 악비를 꼽지만,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더 적었다. 그가 바로 이강이다.

이강의 자는 백기(伯紀)이고, 호는 양계(梁溪)로, 충정은 그의 시호다. 악비와 함께 금나라와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유배된 전력이 있었고, 고종 초에는 재상에 임명되어 자칫 무너질 수 있었던 남송 초기의 내치와 국방을 바로 잡았다. 그는 뛰어난 문인이었지만 전황이 위험하고 급할 때, 직접 의병을 모아 위기를 타파한 적이 여러 차례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악비가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면서 문에도 조예가 있었다면, 이강은 뛰어난 문사이면서 군사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평할 수 있다. 둘의 힘이 온전히 합쳐졌다면 북진도 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천적 같은 인물이 있었다. 현대까지도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는 진회(秦檜)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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