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19) 이세동조(異世同調) =========================================================================
과거 나는 이러한 함성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뭉클했다. 그러나 오늘의 함성은 그중에서도 특기(特記)할만했다.
예전의 나는 한인으로 태어나 한인 국가를 건설했다. 중화(中和)를 외쳤지만, 한인을 제외한 타민족은 이방인에 가까웠다. 손님 대접에 충실했다고 해야 할까?
고려인으로 태어나 고려 역사에 충실하며 발해를 부흥시켜 또 다른 대안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을 했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고구려, 발해, 요, 금과 같은 만주 정권의 연장선이 될 가능성이 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강력한 북방 기마 민족들과 숱한 피를 흘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상을 채 펼칠 시간을 제때에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미 황제까지 해본 내가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시행착오는 신물이 나도록 겪어 보았고, 선택에 대한 갈등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정의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만과 독단이 아니라 천의무봉(天衣無縫)처럼 무엇을 행하더라도 내 뜻을 설파할 수 있다는 오랜 숙련의 결과물이었다.
내가 어떤 길을 걷든 나는 내가 품고 있는 정의를 버릴 것인가?
‘아니다!’
방법의 차이일 뿐, 걷고자 하는 길은 항상 똑같았다.
그렇다면 역사가 어그러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공손승이 말한 것처럼 역사 순행의 결과가 지금 백성의 고욕이라면, 나는 기꺼이 역행을 따르리라 마음먹었다.
송의 황제와 대신들이 나를 역천(逆天)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들의 천명은 내가 가질 천명과 다르다. 진정한 천명을 놓고 진가(眞假)를 가리는 쟁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한 투쟁을 통해 세상은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수동적인 자유와 권리는 동물원에 갇힌 맹수와 다를 바 없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움직여 우리를 걸어 나올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내가 이 시대에 설파할 중요한 가치였다.
“장군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기막힌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다. 수행자인 저의 가슴까지 몹시 울려서 뒤흔들리게 할 정도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장군에 대한 확신이 조금 부족합니다. 모산에서 장군을 지켜보겠습니다. 부디 지금 보여준 그 의기 그대로 정진하시길……. 미력하나마 저 또한 힘을 보탤 것입니다.”
공손승은 합류를 거부했다. 아니 애초에 합류를 권한 적이 없으니 거부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맞지 않았다. 공손승은 미련없이 휘적휘적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걸음 가다가 잠깐 멈추더니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안무사를 놀라게 하고 장군께 다가갔을 때, 일백 보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일백 보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장군의 기세에 도술이 먹히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장군을 대적할 자는 천하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장군을 뛰어넘는 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하니…….”
“나 자신을 알라고 말한 학자가 있었다. 나는 자신을 매우 잘 알고 있고, 그대의 우려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포구에 첫발을 디디며 내 명호를 결정했다. …… 청산(?山, 세이잔)!”
청산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공손승을 향해 또박또박한 어조로 명호를 밝혔다.
“불패! 장군은 불패라 칭하셨습니다.”
공손승의 눈매가 살포시 구겨졌다. 충고를 독선으로 맞받아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공손승 뿐만 아니라 나는 주위가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나는 부정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패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교만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탐욕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태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음욕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분노에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패다!”
나는 폭풍 같이 몰아쳤고, 잠시 침묵하던 병사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를 다시 보내주었다. 공손승은 그제야 이해가 간 표정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수행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대로만 된다면 중원은 민 태조 이후 새로운 성군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길이기에 우려도 생깁니다. 장군의 결의를 유심히 지켜보겠습니다.”
떠나는 공손승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나는 양지와 석보에게 전력 점검과 뒷마무리를 부탁하고 청산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안무사의 인수(印綬)보다, 도적문서(圖籍文書)의 확인보다 장상영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 곁에 소하가 있었다면 선후가 바뀌었다고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장상영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그의 저서, 호법론이 대한민국 보물 목록(제702호)에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원본은 아니고, 고려 우왕 시절, 정국이 어수선하자 당대의 유학자, 승려 등이 호법론을 판각하여 불법으로 혼란한 정국을 다스리고자 했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할까?
호법론의 원 저자이자 능력 있는 재상이기도 했던 장상영을 만나는 것은 그래서 뜻밖의 인연이라고 생각되었다.
장상영은 눈을 감고 좌선에 빠져 있었다. 청산이 옥문(獄門)을 열면서 기척을 냈음에도 그는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청산이 그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지만 내가 제지했다.
“유학이 불교에서 얻은 최대의 성과는 모든 인간이 완전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불교 교리를 통해 지금껏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외로움을 풀었다는 것이다. 유학에서 우주를 말하고, 천지인을 논하는 것은 장대한 주제조차도 결국 인간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쓰기 위한 것이었고, 불교와 도교 역시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좌선(坐禪)이 무념무상을 지향하거나, 공안(公案, 화두) 같은 눈앞에 없는 상상에 정신을 집중했다면, 오늘날에 의식 있는 학자들은 기존 좌선의 정신을 탈각(脫却)하여 새롭게 거경(居敬)이라 칭하기로 했다. 현실을 투영하여 행(行) 가운데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事)는 경건함으로 생각한다.’ 이 얼마나 멋진 제언(提言)이 아니겠는가?”
이야기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눈썹을 꿈틀거리던 장상영은 내가 혼잣말로 시작한 이야기를 끝내자 눈을 활짝 열었다. 한때 재상까지 올랐던 거물답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격물(格物)에 대해 제법 해박하구나. 안무사 밑에 그대 같은 자가 있을 줄이야.”
청산이 곁에 있어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고 좌선에 든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관복의 휘장이 이곳과 다름을 눈치챈 것이다.
청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장군은 안무사의 수하가 아니라, 오히려 안무사를 처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안무사를 처단?”
“그렇습니다. 안무사는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안무사가 죽었다? 모산파 도사도 한 패였던가?”
“그건 아닙니다. 우연히 장군의 거사와 맞아떨어진 것뿐이지요. 도사께서는 할 일을 다했다며 모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허…….”
장상영은 장탄식을 내뿜더니 이내 나를 향했다.
“등주의 군관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고 누구의 명을 받았느냐?”
“스스로 일어섰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스스로?”
장상영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지금 반란을 일으키겠단 것인가?”
“태조가 송을 세운 것은 반란이었습니까? 창업이었습니까?”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그리고 내 눈빛을 지그시 살피던 장상영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태조께서는 휘하 장수들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 당시 공제의 양위를 무혈로 받아내면서 말씀하시길,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고 소회를 밝히신 바가 있다. 그런 태조의 성정을 귀관과 같은 야심가와 비할 수 있겠느냐?”
“야심가라……. 전생까지 생을 넓혀도 처음 듣는 단어로군요. 야심가라, 야심가……. 맞습니다. 저는 야심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생 이야기는 농이 일부 섞여 있던 것이긴 했지만, 진심도 담겨 있었다.
“나 혼자 편안하게 살자면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살면 됩니다.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은 내 육신도 정신도 매우 고단한 일이 되지요. 헛수고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단함을 풀고 끊임없이 움직일 힘이 야심(野心)이라면 저는 기꺼이 품겠습니다. 오히려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치는 성스럽고 경건하게 대해야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성스럽거나 경건하게 대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누군가 똥물에 발을 담가야 한다면 그것을 제가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이 야심이라면 저는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
나는 들어온 입구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나가서 병사들에게 물어보지요. 제가 그들에게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면 저는 기꺼이 사라지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저를 선택한다면 천각(天覺)께서도 달리 생각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제가 꿈꾸는 천하에 함께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귀관이 꿈꾸는 천하는 대관절 무엇인가?”
“꽃이 핀 채로 영원히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보기에는 좋겠지만, 그것이 순리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좋은 것을 보아도 이렇습니다. 지금의 천하는 어떻습니까?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꽃이 지는, 그러한 순리가 존재합니까?”
장상영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귀관의 입심이 대단하구나. 병사들을 설득했다고 자신하는 것도 그러한 입심의 결과겠지. 그러나 나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진심을 입심이라 생각하시다니, 그저 섭섭할 따름입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듣기로 천각께서는 와병 중인 산곡도인을 만나러 의주로 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안무사를 이미 처리했다니, 충고 한마디를 하도록 하지. 귀관이 등주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를 이곳으로 이끌고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이곳의 병사를 모두 합해도 일만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장정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유지할 군량이 모자라서이지. 개민왕의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말일세. 만약 귀관이 뜻을 바꿔 안무사를 대신하겠다면 내가 서신을 써주도록 하지. 능히 복주를 아우르며 그대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천각께서는 제가 원하는 꿈이 그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것이 아닌가? 등주는 예로부터 남만해로 가기 위해 복주를 중간 기착지로 활용했지. 안무사는 이런저런 핑계로 입항료를 갈취했을 것이고, 상인들의 입김이 그대에게 들어갔겠지. 정의감까지 있었던 귀관은 안무사를 이번 기회에 처단하기로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하하하!”
그럴듯한 추측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성큼성큼 장상영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강제로 옥에서 끌고 나왔다. 그는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왔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라며 소리치는 것을 모른 척하고 지상으로 올라와 활짝 트인 내성과 외성을 보여주었다.
내가 나타나자 석보와 양지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점고가 끝났습니다. 사실 점고랄 것도 없지요. 장군께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셨으니……. 장군께서 이끌고 온 산동병 이천에 복주병이 오천입니다. 총 칠천이지요. 문제는 군량입니다. 군선에 실린 병량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있는 탓에 하루 한 끼로 배급을 제한해도 보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야성에 비축된 군량은?”
“그것까지 고려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안무사는 차 전매 대금을 일부 횡령하여 채경에게 상납한 것 외에도 전매량을 조작하여 빼돌린 차를 담보로 안남과 밀교역 했습니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마련한 식량은 동관에게 보내졌습니다. 동관이 요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각지에 군량과 병사를 뽑아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동관의 눈에 띄고자 하는 자들은 악착같이 쥐어짰지요.”
“군량이 동경으로 마지막으로 올라간 것이 언제인가? 그대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이 일대에서 동경으로 올라가는 전매 차와 식량은 모두 건주(建州)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설마? 건주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건주는 현대 중국에서 남평시(南平市) 일대를 가리킨다. 행정구역상 수부(首府)는 복주였지만, 최대 성시(成市)는 건주라고 알고 있다. 복주 일대의 토산품이 이곳에 모여 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복주와 건주가 합쳐져 복건성이란 이름으로 현대에 이른 것은 그러한 위상을 반영한 것이다.
-건주와 절강의 차, 촉의 비단, 정요의 백자와 함께 고려의 청자는 천하제일이다. [수중금(袖中錦)]
송, 태평노인의 저서, 수중금은 귀족들이 하나쯤은 가져야 할만한 10대 명품을 꼽은 것이었다. 고려청자가 송 청자를 제치고 청자 중의 제일이라고 꼽힌 것이 특기할만한 사실이지만, 건주와 절강의 차가 최상으로 꼽힌 것이 내게는 더 주목할만한 사실이었다.
그 지역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산지가 구할을 차지하는 복건 일대에서 평야가 가장 많은 곳, 민강의 풍부한 수량이 수상 운송을 가능하게 만드는 곳. 그 두 가지의 조합으로 복건 일대의 식량을 책임지는 거의 유일한 곳. 대나무가 중원에서 가장 많은 곳. 그래서…….
“종이의 최대 생산지. 그래서 목판 인쇄 기술이 중원에서 최고인 곳. 얻을 것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병력이 주둔하는 곳이기도 하지. 못해도 삼만은 넘을 것이다. 칠천의 병력으로 삼만을 깬다? 야성은 건성(建城)에 비하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설사 어찌어찌 얻는다고 해도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라 수성이 무척 어려운 곳에 속한다. 아서라, 애꿎은 복주인의 피만 흐를 것이다.”
장상영은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의 사기가 생각보다 높은 것을 보고 뜻밖이라는 반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아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더라도 건주의 전력이 그보다 훨씬 강하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개민왕은 복주, 건주, 천주. 삼주를 얻어 민나라를 창업했습니다. 저는 이제 복주를 얻었을 뿐입니다. 건주로 나아가 천하에 고하고자 합니다. 천각께서 산곡노인을 만나러 가는 것을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가면서 제가 천하에 고하는 일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일성에 응해주십시오. 그것이 천각께 원하는 바입니다.”
“무모하다. 참으로 무모하다.”
장상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장상영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천하는 더욱 놀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