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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2화 (14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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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세동조(異世同調)

중원이 혼란스러우면 난세라 칭했고, 난세가 계속되면 백성은 난세를 종식시킬 영웅을 기다렸다.

그러한 영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처음부터 거창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시작한 자들은 단연코 없었다.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칼을 잡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결집하여 세를 늘려나갔다. 정의니 대의니 하는 것은 그런 와중에 생겨난다.

이익을 위해서 뭉쳤다면 그것은 그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의 결집으로 국한되지만, 정의와 대의, 신념은 그 자체가 당연하고 옳은 말인 경우가 많기에 가담할 명분을 쉽게 만든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득 없는 대의는 따르는 자가 많지 않고, 대의 없는 이득 역시 따르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천하를 통일한 군웅은 하나같이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초를 거쳐 민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대의와 함께 민생이란 이득을 백성에게 선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선언이 어떤 식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신하고 있었다. 중화(中華)는 중화(中和)될 것이며 중용(中庸)으로 나아간다. 아울러 세계의 법칙이 될 것이다.

“천하? 완전히 미친놈이로구나. 석보, 이놈! 지금 무얼 망설이는 것이냐! 주위의 병사만 오천이다. 네놈은 평소 전공을 세워 항주로 전보(轉補)되기를 원하지 않았느냐!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안무사의 뒤로 마치 귀신같은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호통을 치고 있었는데, 지켜보던 병사들은 파랗게 놀라 손가락으로 안무사를 가리키며 ‘저, 저…….’의 표현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내심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체가 없는 귀신처럼 산발한 잔영이 불쑥 안무사 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도술을 보는 것 같았다.

‘도술?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여동빈과 조국구도 실존하는 판에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신기한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 이미 탐라의 영험한 심방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십 년 전, 내공이 존재를 체험한 바가 있었다. 흥왕사 무승 열 명을 수하로 거두면서 그중 양욱이 기초적인 내공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잔영의 기괴한 모습이 무섭다기보다 흥미로웠다. 과연 저런 것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식귀(食鬼)란 것이 있다면 저 형태였을 것 같았다.

안무사는 자신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지기 시작하는 병사들의 겁에 질린 모습에 이상했던지 뒤를 돌아보았다.

“으악!”

평생 질러도 한 번 나올까 한 비명이 안무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악귀가 조금씩 안무사에게 다가가자 안무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안무사가 자리하고 있던 곳은 성벽이었다. 뒤로 물러나 봐야 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냐! 석보, 뭐하는 것이냐, 이 악귀를 해치우지 않고!”

안무사는 공포에 이성을 잃었다. 뒤가 성벽 끝인지도 모르고 발을 헛디디자 중심을 잃고 낙하하기 시작했다.

쿵!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복주 책임자, 안무사가 죽음을 당했으니 병사들은 일시 혼란에 빠졌다.

악귀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허공에 붕붕 뜬 상태로 점차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공간의 높낮이 제약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베어질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담대함이 깃들어 있었다. 악귀는 나와 일백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곧 악귀에게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복주의 차는 강남 일대의 귀중한 보물일진데 그런 보물을 가지고도 안무사의 사리사욕으로 백성은 빈궁하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한 백성의 소리가 모산(茅山) 정상까지 들리니, 미력한 수행자의 신분으로나마 군궁(窘窮)을 풀지 않을 수 있으랴.”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악귀의 정체가 곧 모산파 수행자의 분신이나 다름없음을 인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사들은 절을 하며 수복(壽福)을 기원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별로 기껍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런 마음을 수행자도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악귀의 형체가 점점 흩어지더니, 그 자리에는 낡은 도관의 청년이 자리했다. 그 청년 주위로 두 장의 부적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는데, 미루어 짐작하자면 그 부적이 악귀로 변신할 수 있는 도력의 원천이 아니었는가 싶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황당했지만, 희한하게 이해가 갔던 것은 아마도 온갖 환상 소설들을 접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켜보면서 담대하다 싶었더니, 정말로 그렇군요. 귀신침부(鬼神侵符)를 보고서도 벨 수 있을지 태연하게 읊는 사람은 결단코 처음입니다. 귀신침부는 보는 사람에 따라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모산에서 왔다면 공손승인가?”

수호전에서 최고의 도력을 가진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공손승의 스승 나 진인이고, 그가 사문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제자가 여럿이 아니라면 분명히 이곳에 나타난 자는 공손승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다만, 그 시점이 작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공교로웠기에 내가 모를 의도가 있는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공손승이라는 말에 담담하던 청년 도인의 표정에서 금이 갔다.

“실로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정말 궁금하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 진명을 알고 계십니까? 스승님과 노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거늘.”

공손승의 도술 실력은 수호전에서 그리 주목받지는 않는다. 정말 필요할 때 쓰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전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도술을 쓸 때는 양산박을 토벌하기 위해 관군이 몰려 왔을 때뿐이다. 엄청난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 아군에게 적당히 유리한 도술을 그때그때 선보이면 힘을 얻은 아군이 공격하여 승리한다는 공식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가진 도술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저 추측일 따름이다.

“저, 저 도인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공손승이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병사가 아는 체를 했다. 공손승이 웃으며 부연했다.

“안무사의 횡포가 모산까지 퍼지자, 협의가 도졌나 봅니다. 스승께서는 마음이 외사(外思)로 향하는 것은 내사(內思)를 근간으로 삼는 수련에 마(魔)가 낀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장생(長生)이야 못하면 어떻습니까? 도탄에 빠진 자를 돕는 것은 신선이 되는 길보다 더 값진 일입니다. 일부러 사단을 일으켜 감옥에 갇힌 지, 칠 주야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백성의 하소연에서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장군이 출현했습니다. 제가 가진 도술은 위력이 클수록 제약이 심한데 장군에게 이목이 쏠린 사이 수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장천각을 만나보았는가?”

“장천각……? 아, 그분이라면 아직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나오면서 일이 곧 해결될 것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공손승은 나에게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녔을 것이다. 어찌하여 자신의 진명을 알고 있는지, 자신의 도술을 보고서도 그리 태연할 수 있는지 등등 말이다.

“그대가 가진 도술만큼 나 역시 가진 재주가 있다고 쳐두지.”

“하지만, 제 진명은 스승께서 도력을 베풀어 직접 내려주셨기에 설사 이선과 대면한다고 해도 대번에 진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그대 스승이 그대에게 진명을 내려주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겠지. 역사 역시 그대의 스승이 그대에게 진명을 내려주는 현장을 관찰했을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다.”

“하늘과 역사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장군은 천명을 보았단 말입니까?”

“아니…….”

나는 어느덧 노을이 지기 시작한 태양을 손바닥에 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시야에서 태양이 사라졌다. 내 손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이다.

“내가 만든다.”

수행자라고는 하지만 공손승은 피가 끓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협의지심을 품고 안무사를 징벌하기 위해 나섰다. 나 진인이 그냥 지켜본 것은 세파를 이해하는 것 또한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쥐여주는 천하에 이끌리지 않겠다. 천명은 받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공손승을 지나치고, 내성에 근접했을 때, 그 앞에서 나는 소리쳤다.

“열어라! 천하가 보일 것이다!”

거짓말처럼 내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뒤에는 석보가 따르고 있었고, 병사들이 열을 맞췄다. 성문 안쪽에서는 마찬가지로 병사들이 잔뜩 열을 맞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보는 격양된 음성으로 나에게 말했다.

“관리들은 항상 가져갈 생각만 했지,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베풀고자 하는 자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꿈은 있어도 그 꿈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우리에게 꿈도, 그 꿈을 이룰 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까짓, 운이 없어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저는 진작에 이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내 자식 새끼들에게 이 아비는 후회 없이 살았다고 떵떵거리고 싶었습니다. 제 배만 채우는 썩어 빠진 관리들을 모조리 일소하고 장군께서 말씀하신 데로 새 세상을 열어 봅시다. 천하? 얼마든지 가지십시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겠습니다.”

이어 공손승이 다가와 말했다.

“음양이 뒤섞이기 시작하면 천일(天一)이 됩니다. 천일은 곧 물이지요. 모든 형태가 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한데 물은 스스로 형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따라서 형태가 부여됩니다. 그것이 도량입니다. 천하가 혼돈에 빠져 음양이 뒤섞이고 있으니 원초의 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스승께서는 남이 하는 보편적인 행동을 따라서 하는 것이 순행(順行)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역행(逆行)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린 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천하에 옳지 못한 것이 순행을 이루고 있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행동하는 것이 역행이라면 저는 역행을 쫓을 것입니다. 이익을 다투는 것은 덕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덕이라고 합니다. 세인들은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거꾸로 돌리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즉, 이러한 이치로 따지면 이익을 좇는 행동은 순이고, 이익을 돌려주는 행위가 역이 되는 셈입니다. 도와 덕이 순행을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역행되는 것이 어찌 올바른 도와 덕이라 하겠습니까?”

공손승의 열변은 병사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누군가 함성을 지르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으로 퍼졌다. 외성 밖에서 대기하던 세이잔과 양지 역시 뒤늦게 그 함성에 동조했다.

“위로는 궁성에서부터 아래로는 읍리에 이르기까지, 밖으로는 융이만적(戎夷蠻狄, 동서남북 이민족의 총칭, 즉 중원을 둘러싼 전체 야인을 뜻함.)에 이르기까지 차가 보급되어, 그것으로 손님을 맞고, 제사를 지내고, 연회를 베풀었다. 산림천택(山林川澤, 방방곡곡)은 문전성시(門前成市)였고, 상고(商賈)는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복주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강남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옳소!”

병사들은 주먹을 쥐며 호응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을 그대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천하다. 가지고 싶은 천하다!”

함성이 다시 진동했다.

============================ 작품 후기 ============================

사대 문파의 위치를 주설정란에 올려두었습니다. 사진이 작아서 잘 안보이시는 분들은 왼쪽 클릭으로 사진을 다운받아 보시면 됩니다. 개편전에는 클릭하면 커졌는데 오류인지 지금은 이렇게 해야만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건의해서 개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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