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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1화 (141/257)

00141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석보는 흠칫했다.

나는 안무사의 양볼을 손바닥으로 잡아 힘을 주었다.

“으어어어…….”

양볼이 짓눌리자 안무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신음을 토해냈다. 벌린 입으로 침이 흘러나오자 내 손바닥을 적시더니 땅으로 실처럼 흘러내렸다.

“저, 저!”

안무사의 불행에 발을 동동 구르는 자도 있었지만 그런 자들은 대부분 혈색 좋은 군관들이었다. 아마도 임지에 함께 왔던 자들일 것이다. 그중 내가 눈여겨볼 만한 자는 없었다. 전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석보 뿐이었다.

“또 묻게 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양볼이 터지는 진귀한 모습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안무사는 등주 출신이다.”

쇠라도 씹어 먹을 것처럼 석보의 말투는 거칠었다.

“안무사가 너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나는 모두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오월(吳越)의 건국자 전류(??)와 촉(蜀)의 건국자 왕건(王建)은 소금밀매상이었다. 형남(荊南)의 건국자 고계흥은 거상의 집사 출신이었다. 남한(南漢)의 건국자 유은은 남해 교역상으로 아랍계 혼혈이었다. 초(楚)의 건국자 마은은 목공 출신이었다!”

내가 사실을 쭉 열거하자 주변 병사와 ‘그게 정말인가?’라며 사실 확인하는 자들이 여럿 보였다. 그것은 내가 노린 것이기도 했다.

“나는 고려인이다. 그대들과 같은 잡척이었으나, 무예를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다. 요의 사자들이 고려를 업신여기며 자신들이 유리한 각희로 어전 대회를 제의했을 때, 나는 홀로 스무 명의 출전자를 모두 눕혔다. 대회를 관전하던 요의 왕자는 자신의 부하가 되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혼자서 요나라가 자랑하는 스무 명의 각희 선수를 이기는 것이 가능하냐는 병사와 방금 성문을 가른 것을 보지 못했느냐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 자들로 갈라져 있었다.

외려 고려인이라고 칭한 것에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이 이채로웠다. 남방은 북방보다 이민족 수가 더 많았고, 외국의 접촉도 잦아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그렇지 않다면 남한의 건국자 유은처럼 혼혈을 순순히 왕으로 받아들일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북송이 남송으로 바뀌고 한족 지배층이 대거 남하하면서 한족 중심의 역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 지금은 한족이 손님격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출발지로 더할 나위가 없는 곳이다.

“채경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자 고려의 화석까지 노렸다. 고려의 일부 대신이 이권을 탐내 호응하자 관군을 사사로이 파병했다. 백성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고작 화석을 얻자고 바다를 건넜다. 북방의 적을 막고, 각지에 창궐하는 도적을 토벌하기에도 바쁜 판국에 말이다.”

병사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과 함께 실망감을 드러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새지 않겠느냐는 시각이었다.

“유배된 몸이었지만 고려의 장수로서 어찌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겠는가? 나는 채경의 대리자, 여주지부 여혜경을 죽이고, 성문 밖에 줄지어 있는 송군을 설득했다. 남아로 태어나 진정으로 필요한 일을 하자고 말이다!”

“……여주지부를 죽였다고? 여주지부가 어떤 분인지 네놈은 알지 못하느냐?”

병사들에게 소리치는 사이, 안무사 볼에 가해지는 악력(握力)을 줄였던지라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가래 끓는 소리로 큰일 났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안무사의 볼을 다시 힘껏 움켜쥐었다.

“어, 으어어어!”

“내 걱정을 해줄 때가 아닐 텐데.”

안무사는 내 눈빛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꿈틀거렸지만, 미약하기만 했다. 그의 눈빛이 체념으로 바뀌자 나는 다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아내가 두 명이다!”

갑작스러운 아내 이야기에 병사들은 무슨 소리인가 했을 것이다.

나는 자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의 인연은 어쩌면 나를 고려라는 한 점에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늦은 밤, 선죽교에서 그녀가 묘족 전통의 춤을 추던 것을 나는 절대 잊지 않았다.

“첫 아내는 묘족이었다.”

병사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려인과 묘족의 결합은 상당히 드문 유례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월족이란 명칭 자체가 어느 특정 부족을 가리키기보다 남방 민족의 총칭인 만큼 이곳에 모인 병사 중에도 묘족이 반드시 있을 터였다.

“그녀의 이름은 자매였다. 자매는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고려 고관에게 팔렸다. 때마침 고려 고관이 역모를 꾀했었고, 나는 역모를 진압하는 진압군에 속해 있었다. 공을 세워 그녀를 얻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어디 가나 남의 연애담은 흥미롭기 마련이다. 특히나 병사들에게 있어 대의니, 정의니, 신념을 외치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욱 집중도를 높였다. 반쯤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

반전은 어떤 의미로든 사람을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든다. ‘왜’라는 호기심은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는 복수를 위해 세상을 활보했다. 복수를 이루고 다시 고려로 돌아오기까지 10년, 무려 10년간, 나는 2만 리를 횡단했다. 100여 곳의 나라를 통과했고, 사막, 초원, 강, 산악 지대를 가리지 않았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려에 도착한 후,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없는 고민을 하면서 불행히도 한 가지를 빠트렸다. 자매와 초야를 치른 다음 날, 그녀와 함께 오지산 백화봉 정상에 올랐던 그때의 마음가짐을 말이다. 자매는 자신들의 뿌리인 단풍나무와 또 다른 기원의 대상인 민 태조의 입상 앞에서 나의 무사를 빌었다. 백년해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사만을 빌다니, 어찌 어리석지 않을까?”

말은 그러했지만 나는 깊은 정을 담고 있었다.

당 중기 이후, 심화하는 사회 불평등을 한족 외의 민족을 차별화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근시안적인 정책 행보가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비단 지금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똑같이 거론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보수 우경화란 단어가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은 자칫 나라를 공멸로 이를 수 있는 극약처방임에도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생각에 진보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묘족이 단풍나무와 민 태조의 입상을 한 자리에 두었던 것은 과거 모든 민족이 차별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그러한 평화로움을 원해서였을 것이다. 내 이름이 준경인 것 또한 하늘이 정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나는 너희에게 앞선 발언에서 약속하겠다고 한 것이 있다. 이제 그 약속을 들려주마.”

나는 안무사를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안무사는 갑작스러운 반응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심이 흐트러져 쓰러졌다.

“오월의 전류는 닭, 물고기, 계란 등 백성이 주로 먹는 식재에 세금을 붙여 원망을 샀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촉의 왕건은 불만자를 색출하기 위해 심사단(尋事團)이라는 순검 조직을 가동하였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형남의 고보욱(高保?)은 무의미한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향락을 일삼았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초의 마희성(馬希聲)은 현명한 신하를 멀리하고, 자신의 어리석은 주장만 고집하여, 내정을 망쳤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의 유성(劉晟)은 동생의 아내를 후궁으로 들이는 문란함과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열변을 토하는 사이 안무사는 슬금슬금 내성으로 기고 있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오(吳)의 양행밀(楊行密)은 당나라 잔존병과 전전하던 도적을 모아 친위대로 부렸는데 이들에게 너무 의존한 결과 그저 괴뢰(傀儡)에 불과하여, 온갖 부조리를 넘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고 생각한 안무사는 없는 힘도 생기는지 벌떡 일어나 내성으로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남방에서 차는 곧 음식이다. 궁핍한 백성이 한 해가 가도록 소금을 먹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차는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병이 걸릴 정도라는 말이 떠돌았다. 예전에는 늦은 봄에 채취한 품질 떨어지는 차로 입맛을 달랠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전매로 거둬 태워버리고 비싼 차만 유통하니 궁핍한 백성은 예전처럼 싸게 구할 수 없어 차 맛을 잊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약속이다!”

고요했다.

그 사이 안무사는 내성에 도달해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명령을 내렸다.

“궁수들은 뭐 하는 게냐! 어서 저놈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기보(騎步)는 당장 역도들을 싹 잡아들여라! 어서!”

그러나 그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다들 망설이고 있었다. 안무사가 재차 같은 명령을 내리자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멈춰라!”

석보가 호통하자 느릿하던 움직임은 원상복귀되었다. 내성에 도달해 자신감을 찾은 안무사가 펄펄 뛰며 소리쳤다.

“네 이놈, 석보! 감히 내 명을 거역할 생각이냐! 미천한 네놈을 거둬준 은인이 바로 나다! 당장 저 대역무도한 죄인을 공격하지 못할까! 망설인다면 네놈마저 죽일 것이다!”

석보는 안무사의 호통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대체…….”

그는 나와 겨우 삼보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그래서야 이 땅을 가져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오? 모든 것을 다 준다면 당신은 대체 무엇을 가지겠느냐는 말이오!”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지금껏 그런 약속을 한 위정자를 만나보지 못했기에 지켜지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허풍선이로 보일 수 있었다. 나는 석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잠시 받아들이면서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의문을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백성에게 다 주고 얻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다.

“천하.”

석보의 눈이 한껏 치켜떠 졌다.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을 가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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