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40화 (140/257)

00140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석보는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자 주춤거렸다. 기세에서 밀린 것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그것을 인정하면 대개 한 가지 반응으로 귀결된다. 믿을 수 없어서, 자존심 때문에, 몸으로 확인하길 원한다. 석보 역시 그런 부류였다.

성큼성큼 성벽 계단을 내려와 나와 마주 섰다. 그 사이, 내성의 병사들이 몰려나와 반원으로 에워쌌다. 더는 진출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나는 마음이 편했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일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장정 다섯이 달라붙어야 겨우 들 수 있는 빗장을 일도양단하다니……. 그것도 정확하게 성문의 결을 따라…….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복장을 보아하니 산동의 관리인듯싶은데 먼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느냐?”

자신의 유리를 굳게 믿는지 열린 성문을 닫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낭패당하는 모습을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입고 있던 관복은 관승의 예복으로 군구(軍區)에 따라 차림새가 조금 달랐기에 석보가 알아보았던 것이다.

석보의 질문에 나는 큰 목소리로 답했다.

“채경은 세 차례에 걸쳐 차법(茶法)을 개정했다.”

채경의 이름이 함부로 흘러나오자 석보를 비롯한 몇몇 군관들이 안색이 급변했다.

“언뜻 보면 가우 4년(嘉祐, 1059년) 이전의 차법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절차와 과정은 그때보다 더 세분되고 철저해졌지. 그래서 차의 유통과 판매가 원활해졌다.”

나를 포위한 것은 실수였다. 오히려 한꺼번에 설득시킬 수 있는 고마운 무대였다.

“그 혜택을 누가 받고 있나? 농민? 상인? 국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뜻밖에 석보는 순순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내성에서 나온 군관 하나가 칼을 뽑아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가 팔꿈치 공격에 턱을 걷어 채이고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채경이 고구, 동관과 손을 잡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조정과 백성 사이에 선 지방관리들은 인의(仁義)를 함구(緘口)한 채, 모든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다. 뜻있는 선비들은 목숨을 잃거나 유배형이고, 요와 서하, 대리의 압박에서 백성을 보호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왔다.”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이냐?”

주변은 싸한 반응이 감돌았다. 대놓고 역모를 말하는데 쉽게 동조할 수 있을까? 나는 석보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혁명(革命)이다.”

“혁명? 반란과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는 애국자인가?”

“애국자라니?”

“말 그대로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남세스럽군. 나는 복주인이다.”

마치 닭살 돋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석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현대의 중국도 저러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고, 실제로도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 방대한 영토인지라 애향심이 앞섰다.

대화 직후, 내성 방면으로 반원을 그리며 포위하고 있던 병력이 일자로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기병 수십 기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선두에 중년의 관헌이 말 고삐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어디서 온 누구이기에 감히 본관의 관할에서 겁도 없이 설치느냐.”

“그러는 너는 누구냐? 안무사 본인인가?”

포위된 상황에서 안하무인 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중년 관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석보!”

석보를 외치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놈을 당장 죽여라! 당장!”

“명을 따르겠습니다.”

석보는 허리를 감고 있던 유성추를 풀기 시작했다. 유성추를 쓰는 무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호기심이 들긴 했지만, 그 호기심 때문에 대국을 망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나는 확인을 위해 손가락으로 그 중년 관헌을 가리키며 석보에게 물었다.

“저놈이 안무사가 맞느냐?”

“나도 간담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네놈의 배포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이로구나. 안무사 영감을 화나게 한 이상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럼 저놈이 안무사가 맞는다는 거군.”

연방 손가락질이 자신을 향하니 안무사는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석보를 재촉했다.

“저! 저놈의 입을 당장 다물게 하라!”

그러나 움직인 것은 내가 먼저였다.

제법 치열한 격전 끝에 안무사를 만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순순히 나와준 것은 무척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자는 내가 성문 빗장을 가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저 적으로 보이는 자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혹시 아는 자인지, 동태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나왔을 것이다.

“이놈, 어디로 가느냐!”

내가 곧장 안무사를 향해 뛰자, 석보는 뒤따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호통을 날렸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으니 나와는 제법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내가 갑자기 쇄도를 시작하자 안무사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주위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는 인해(人海)의 벽을 보며 마음이 놓이는지 껄껄 웃음까지 짓는 여유를 보였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나를 노려보겠다는 것이냐? 그 기세 하나만큼은 항우가 울고 가겠구나. 그러나 그것으로 더욱 비참한 죽음이 예약되었다.”

송군이 오합지졸이라고 하지만 자리를 잡고 방어를 하는 것은 이민족보다 오히려 뛰어난 점이 있었다. 방패병과 창병이 벽을 만들자 마치 고슴도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요나라 침입 시 고려도 사용했던 방법이기에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이어진 공격은 아마도…….

솨라락!

후 열에 대기하던 궁수들이 일제히 활 시위를 당기자 포물선을 그리며 화살이 날아들었다. 수패가 있었으면 막기 수월할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이소에게 맡겨두고 탐라로 향했었다. 그러나 조금 아쉽다는 것이지 필수인 것은 아니었다.

무협 소설에서 흔하게 나오는 삼류 초식 중에 팔방풍우(八方風雨)라는 초식이 있다. 여덟 곳의 방위를 비바람이 몰아치듯 공격, 또는 방어한다는 의미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칼을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머리 위로 칼이 바삐 움직이자 화살들이 튕겨져나갔다. 전장에서 곡사는 대량 살상을 위해 무척 유용한 수단이지만 단신(單身)을 상대할 때는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곡사와 직사를 섞어 사용했다면 나도 꽤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궁수가 앞 열에 서야 한다. 송군의 방어체계에는 없는 교리다.

곧 방패와 창으로 밀집된 벽에 도달했다.

나는 양팔에 각기 창대를 낀 후, 손으로 자루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두 발로 방패를 강하게 걷어찼다. 마치 평행봉에 올라타기 위해 양쪽 봉에 팔을 얹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 손으로 평행봉을 지탱하는 단계와 같았다.

걷어찼다는 표현보다는 도움닫기가 더 알맞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짧은 비명과 함께 두 자루의 창이 뽑혀 나왔고, 창을 놓친 병사들이 방패병과 뒤엉켰다. 방패병은 내가 발로 걷어차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고, 창병은 앞으로 끌려왔으니 사이좋게 포개진 형상이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 후 열의 병사들이 기민하게 움직였지만 그렇게 놔둘 내가 아니었다. 창병의 단점은 좁은 공간에서 전혀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검을 차지만, 대개 평범한 보병이라면 창 한 자루가 무기의 끝이다. 나는 칼을 집어던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맨손이 편하다.

나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걸고, 엎어 치고, 메치고……. 예전 흥왕사에서 무승들을 상대하던 것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간어제초(間於齊楚, 강한 자 틈에 끼어 괴로움을 받음.)라…….”

병사들에게 딱히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나중에는 포섭의 대상이 되기에 처음부터 나는 살상을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살상하지 않고도 능히 뜻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갖춰졌다. 그저 기꺼울 따름이었다.

“저, 저놈을 막아라! 어서 막으란 말이다!”

순식간에 안무사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낯빛이 하얗게 변하며 말 고삐를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거친 고삐 질에 말이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들썩였다.

내성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지체될 것이 확실하기에 나는 방금 뒤로 메친 병사의 창을 잡아 주춤거리는 안무사의 말을 노렸다.

창은 적중했지만, 안무사 곁을 지키던 기병이 몸을 던지는 바람에 안무사는 말을 돌리는 데 성공했고, 등자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네 이놈!”

때마침 거의 뒤쫓아온 석보가 유성추를 날리자, 한 번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리하면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다시 던질 수 있겠지만, 거리가 멀어진 이상 확실히 맞춘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가볍게 유성추를 피하고, 그 사이 앞을 가로막는 병사를 뒤로 메쳐 석보의 진로를 잠시 막은 뒤, 손을 품에 넣었다. 품에서는 주먹만 한 작은 나무상자가 나왔다.

“관승이 강권하더니, 쓰임새가 있었군.”

걸쇠를 풀고, 뚜껑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충격을 막기 위해 보통보다 더 두텁게 한지로 감긴 화구였다. 탐라에서 관승이 나에게 비장의 한 수로 썼던 물건인데, 본래는 내게 허무하게 죽은 위정국의 물건이다. 이러한 화구는 대략 십여 개 정도가 더 있었는데, 혹시 모른다며 나에게 하나를 건네주었었다.

나는 바로 안무사를 향해 투척했다.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까운 땅바닥만 노려도 충분했다.

곧 펑하는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섬광과 연기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달리던 말은 갑작스러운 폭음에 매우 놀라 앞발을 들며 멈춰 섰고, 안무사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달리는 도중에 낙마하면 충격이 상당하다. 더구나 낙법도 모르는 자가 뒤로 떨어지면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

나는 달려가 그의 목줄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 포위망은 더욱 밀집하여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석보가 있었다. 석보의 얼굴은 크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일은 일대로 벌어진 것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고 있느냐?”

“안다.”

단칼에 자르는 차가운 대답에 석보는 흠칫했다.

“오대십국의 하나, 민나라가 멸망한 지 150년이 흘렀다. 개민왕 왕심지는 애초에 이곳 출신도 아니었고, 정식 관인도 아니었다. 그가 사병을 동원해 복주를 점령하자 당에서는 그를 절도사로 임명하고 치안을 맡긴다. 역모로 중히 다스려도 시원찮을 판에 말이다. 그때의 당과 지금의 송이 다를 것 같은가? 모든 것을 떠나 아무 명분도 없던 왕심지가 개민왕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민생을 크게 향상했기 때문이다. 중계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 그 이익으로 문인, 승려 등을 모아 문화를 진흥시켰다. 그렇게 20년간 번성한 민나라는 어떻게 망했지? 중원의 통일 왕조들이 겪는 모든 부조리를 왕심지 사후, 불과 20년 사이에 다 겪었지. 장남이 동생에게 살해당하고, 동생은 다시 자신의 장남에게 살해당했다. 그 장남은 어떠했는가? 혹세무민한 사교를 광신하여, 개민왕이 애써 이룩한 도학과 불교의 정치 조화를 무너트리고 무차별 살인을 일삼았지.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족 중에 적당한 자를 골라 왕을 세웠지만, 그 왕 역시 폭정을 일삼았다. 이러하니 다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신하 중 한 사람이 왕위에 올랐다. 위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신하들은 저마다 왕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면 왕좌의 주인이 바뀌어 있고, 정치는 아예 실종되어 버렸으니, 백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과도한 세금을 내는지, 군역을 치러야 하는지 탄식만 나오게 되었다.”

석보를 비롯해 병사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내가 이토록 이곳의 역사에 정통한 것이 이채로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네놈이 개민왕의 후계자라도 된다는 말이냐? 복주가 외지인에게 휘둘릴 정도로 그토록 우습게 보였더냐!”

“그럼 이놈은…….”

나는 안무사를 가리켰다. 그는 잠시 기절해 있다가 이제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의 멱살을 잡고 있자, 크게 분노를 터트리려 했다. 그러나 낙마한 고통이 밀려들면서 눈매를 찡그리고 신음을 발했다.

“이놈은 복주 출생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