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무척 덩치 큰 장수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아이를 때리려던 중년인은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눈빛에는 ‘대체 왜?’라는 두려움 섞인 의문이 실려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를 빼앗아 멀리 던져 버리고, 관승에 외쳤다.
“지금 배에 실려 있는 군량을 모두 하선(下船)한다. 포현 곳곳으로 병사를 보내 배고픈 자는 모두 모이도록 한다. 탐문은 그곳에서 하면 될 것이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명단을 작성하라.”
“주군의 뜻을 잘 알지만 그러다 오늘 공성에 실패라도 하면 저희는…….”
군량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식량을 푼다고 해도 며칠 연명할 수 있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나는 말없이 관승을 쳐다보았다. 관승은 내 결심을 읽었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제가 괜한 의심을 품었습니다. 주군이라면 실패란 없을 것입니다.”
관승이 깨끗이 물러나자, 나는 어리둥절한 중년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지금 내 이야기를 잘 들었겠지? 포구로 가면 식량을 내어줄 것이다.”
“대체…….”
중년인은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다만,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답답했는지 관인이 나섰다.
“지금 감찰사의 자비성(慈悲聲)을 듣지 못했나? 안무사를 처리하기 위해 동경에서 오신 귀한 분일세. 어서 포구로 움직이지 않고 무엇하는가!”
“옛? 안무사를? 그 빌어먹을 종자를 처리하러 오셨단 말입니까?”
눈을 휘둥그레 뜨며 중년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더니 죽이려던 아들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자신 역시 바짝 엎드렸다.
“부처께서 어디 있나 매일 같이 원망했는데,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인께 미리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악행을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안무사가 이들에게는 강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는 중년인이 아내와 아들을 일으키며 집안에 있는 모든 바구니를 꺼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집안에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달려나왔는데 그 수가 어림잡아도 여덟은 되었다. 나이대를 봐서는 그나마 몸집이 큰 장남을 죽여 밑에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했던 것 같다.
힐끔 보고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하는데 뒤에서 힘겹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의 아들이었다. 이제 열서너 살로 보이는 소년은 길쭉한 팔다리를 지녀 더욱 앙상하게 보였다.
“두미(杜微)입니다!”
있는 힘껏 소리치는 소년의 눈은 기이한 열기로 가득 찼다.
“대인의 고명을 알려주십시오.”
“내 이름을 알아 무엇하려느냐?”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언제고 제가 대인의 목숨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너의 목숨만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이 몸을 내놓을 결심을 했지만, 정말 죽기 싫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남아로 태어나 죽을 자리가 여기인가 하는 안쓰러움이었습니다.”
강단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다 문득 소년의 이름이 수호전에 등장하는 누군가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이 아이가, 표기상장군 두미?’
방랍이 난을 일으키자 그 휘하로 들어간 인물이었다. 흡주에서 대장장이를 하다가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비도의 달인으로 소문났다. 방걸이 벽력화 진명을 죽이는데 비도로 거들었고, 모야차 손이랑, 험도신 욱보사를 비도로 죽였다. 송강이 방랍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자, 토벌군 장수들 위패 앞에 끌려나와 배가 갈리고, 심장이 꺼내지는 형벌을 받아 생을 마감한 인물이었다.
“나는 준경이라 한다.”
“민 태조의 이름과 같군요.”
민 제국 당시 이곳은 월족의 자치구였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일이었다. 내가 준경이란 이름만 쓰고 척이란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고려에서 공신으로 받은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저지를 일들에 대한 미안함이며, 이준경만의, 척준경만의 삶이 아닌 포용의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나는 가물거리는 야성의 끝자락을 주시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패(不敗).”
이 담대한 호언에 주변에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관인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나를 따라잡을 생각도 못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다.
“하하하, 형님이 아니면 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이선이나 사문은 행적만 간간이 전해질 뿐 만난 사람은 극소수고, 일사는 요 황제 곁을 벗어나기 어려우니 평생 가야 만날 일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삼절오은이 상대가 될 터인데 제가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형님을 능가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탐라의 일을 종결짓자, 가장 먼저 나에게 다가온 이는 양지였다. 관승이 주군이라고 부르면서 깍듯한 예를 차리는 것에 비해 양지는 관승이 지적해도 형님이라는 단어 사용을 굽히지 않았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더 가깝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느덧 야성의 정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성벽 위에는 사자 갈기를 연상시키는 털북숭이 장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세이잔(靑山)! 죽고 싶어 환장했는가! 안무사 영감께서 불문곡직하고 이방인들을 포구로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한창 민감한 때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아무래도 저자가 남리리 석보인 것 같았다. 그런데 관인을 부르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세이잔이라니? 그렇다면 관인은 왜인이란 말인가? 종종 왜국에서 중원이나 고려로 이주하는 무리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부류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세이잔에게 물었다.
“중요한 때라니? 안무사가 획책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는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한 달 전에 무진거사(無盡居士)가 이곳에 잠시 들렀는데 안무사가 그를 잡아 둔 상태입니다. 처리 여부를 묻고자 재상(채경)에게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안무사로서는 잘 보이기 위해 저지른 일이지만 자칫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재상의 사자가 도착할 때까지 이방인의 출입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요.”
“무진거사? 장천각(張天覺)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어째서?”
장천각의 본래 이름은 장상영(張商英)으로 천각은 그의 자다. 그는 촉 사람으로 신법파로 활동했고, 괄목할만한 행정적 성과도 거뒀다.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지만, 채경이 권력을 잡자 지방으로 좌천당했고, 간신배라는 오명까지도 썼다. 그러다 세수 확대를 위해서 행정에 능한 대신이 필요했던 채경이 그를 잠시 데려다 썼고, 짧은 공존이 이루어졌다.
그를 책임자로 앉힌 탓에 일은 술술 풀렸지만, 채경 일파는 공평하게 정무를 보는 그가 눈엣가시였다. 어느 정도 국정이 안정을 찾았다고 판단하자 그를 내쳤는데, 그것이 아마 지금 시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이잔은 장천각이 들렀다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임지로 떠나던 길이었을까? 아니면 귀양?
그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몰랐을까, 그 이름을 들은 이상, 그를 반드시 내 사람으로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호법론(護法論)이란 책을 저술했는데, 이 시대의 담론이 비뚤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방법을 책에서 제시했다.
지금 시기는 유학이 우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도가와 불교의 영향도 만만치 않던 시대다. 유학이 압도적인 위세를 펼치게 되는 것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가 등장하면서부터인데 그의 탄생은 앞으로 30년쯤 남아 있었다.
사상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담론을 이끌기 위해 유학자들은 배불(排佛)을 고집했고, 유, 불, 도에 우열이 있음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런 유학자들 가운데서 장천각은 불교가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유학은 눈에 보이는 질환을 고치고, 도학은 혈맥의 질환을 고치며, 불교는 골수의 질환을 고친다.’라는 말을 남기며 각자의 쓰임새를 강조했다.
그러나 배불론자에게는 장천각을 숭불파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발언일 뿐이었다. 그래서 채경 일파에게 핍박받는 와중에서 완고한 유학자들에게도 공격을 받았다. 그러니 관직을 오래 고수할 수 있었겠는가?
“의주(宜州)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산곡도인(山谷道人)의 병세가 악화하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합니다. 무진거사는 관직에서 밀려난 감에 시간을 내어 옛 친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의주는 뱃길로 가는 것이 빠른지라 이곳에 잠시 기항했던 것인데 그 정체를 알고 안무사가 포획한 것이지요.”
의주는 대리와 접경지대로 해남도까지 배를 타고 와서 인근에서 북상하면 개봉에서 육로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그 중간 지점인 복주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했다가 과잉 충성에 빠진 안무사를 만나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산곡도인이라…….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는가?”
산곡도인은 나와도 인연이 있는 황정견을 가리킴이다. 십 년 전,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촉 지방에 유배되어 있던 것을 소동파가 불렀던 것이 아닌가? 그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태평지주(太平知州)로 복직했지만, 2년 뒤 다시 무고를 당해 의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한다. 생각해보니 그 시기가 바로 올해, 또는 내년쯤 되는 모양이었다.
소동파가 작고한 이후, 당대 문호로 꼽힌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일인이자, 서예로는 북송사대가의 일인, 시로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조가 되는 거물이 눈을 감는다고 생각하니 유신의 마지막이 떠올라 씁쓸함을 더했다.
반면 그와 즐거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의 글씨 하나 얻으려고 동남아로 함께 가는 도중에 김한충이 얼마나 조아리며 사정했던가? 나는 그런 글씨를 얻어서 무엇하냐고, 강증과 술잔을 기울였었다.
“안무사를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군.”
나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수천 명이 성벽에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상황, 남리리 석보는 나의 담대한 행동에 섣불리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전령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랬다면 나는 백기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성문에서 불과 십 보 정도를 사이에 두자 화살 하나가 내 발밑에 꽂혔다.
“그만! 더 접근한다면 죽여버리겠다!”
성벽 위를 올려다보니 석보 곁의 한 병사가 명령을 받아 활시위를 당긴 뒤였다. 나는 화살을 지나쳤다.
“세이잔, 뭐하는 것이냐! 이놈이 죽어도 좋다는 것이냐!”
태연히 경고를 무시하는 내 행동에 석보는 세이잔을 다그쳤다. 그러나 세이잔 역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성문 앞에 섰다. 성문은 보통 성벽 안쪽으로 지어져 있기에 그곳까지 들어선 이상 화살을 맞을 염려는 전혀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지 않는 이상 나를 공격할 방법이 없다. 반대로 한 사람이 성문을 여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놈아, 성문에 바짝 붙어 있다고 내가 네놈을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나는 분명히 경고했으니 후회는 하지 마라!”
“틀렸어.”
마치 동굴처럼 소리가 울렸다. 증폭된 공명은 바로 위에 있을 석보에게도 도달했을 것이다.
나는 허리춤의 도를 빼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단단히 자루를 잡고 머리 위로 치켜 올랐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일직선으로 칼을 내리긋는다. 중원의 삼류 무사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초식이다.”
석보와 나는 서로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이윽고 내뱉은 그의 웃음으로 충분히 그의 표정을 그릴 수 있었다.
“으하하! 인제 보니 단단히 미친놈일세! 그런 칼질로 성문이 열린다면 그게 어디 성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야성은 꾸준한 보강 공사를 거쳐 일만의 병력도 능히 막을 수 있는…….”
쩍!
낙뢰가 거목에 내리꽂히듯 나의 칼은 성문을 갈랐다. 성문과 성문 사이를 굳게 걸어잠그고 있던 빗장이 틈을 따라 내리쳐진 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모두의 놀란 얼굴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나는 발로 성문을 뻥 찼다.
단숨에 열린 성문을 들어서니 석보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태산압정(泰山壓頂)이다.”
하수와 고수를 가르는 범주는 초식의 절묘함, 화려함이 아니라, 그 초식으로 보여주는 위력이다. 나는 칼끝을 석보에게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