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망망대해의 외딴 섬처럼 풍현은 인근에서 유일한 평지라 할 수 있었다. 자연 이곳으로 모든 사람이 몰렸고, 남해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기다 바다 건너편에 대만이 자리하고 있다. 대만은 좋은 피난처 또는 무역 기항지가 될 수 있었다.
장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곧 내가 애초에 이곳을 정한 가장 큰 장점 두 가지 중 하나를 곧 볼 수 있을 터였다.
“다들 우리의 출현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민강 하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은 전선의 깃발이 송군을 표시하고 있었기에 적의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수십 척의 전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을지 걱정했을 것이다.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애먼 착취를 당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북쪽 강변으로 돌렸다.
마치 거대한 토목 공사 현장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절로 미소가 흘렀다.
관승은 처음 보는 광경인지 탄성을 내뱉었다.
“저도 말로만 들었지만, 이 정도였는지 몰랐습니다. 원지(遠地,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조선소가 이 정도인데, 등주는 어떨지…….”
그렇다. 이곳에는 바로 적지 않은 규모의 조선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조선소는 제작 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었고, 국가적인 산업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송이 직영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이곳 복주 조선소였다. 이곳 조선소의 역사는 900년에 달하며, 그것은 곧 내가 황제로 있던 시절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통일 진 시절, 전쟁을 피해 남하한 백성이 한데 모여 작은 어선을 만들면서 시작했던 것이 유래였다.
900년의 세월은 오랜 경험을 축적하기에 충분했다. 중원의 어느 조선소가 이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포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안무사(安撫使)가 머무르고 있는 야성(冶城)으로 향한다. 이미 결정했던 대로 주동은 포구를 장악하고, 관승, 자네는 인근 주민을 단속하고, 탐문하여, 이곳에서 가장 유력한 토호들이 누구인지, 인심은 어떠한지 알아내도록 한다. 양지는 내 뒤를 쫓도록 하고.”
“알고 있습니다. 주군의 역량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안무사는 본래 지방 관리의 근무 태도와 고과를 매기는 순회(巡廻) 보직이지만, 토호들의 입김이 센 변방에는 아예 정주를 시켜 토호들을 달래며 조정의 처지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하니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포구에는 탐문을 위해 나온 관인과 아전, 수백 명의 병사가 늘어서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배가 가장 먼저 포구로 들어가자 병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고, 선두에 선 중년 관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포구로 들어오는 것을 잠시 멈추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먼저 밝히도록 하여라!”
송군의 깃발을 보고서도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에서는 송 조정이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서너 명이 탈 수 있는 쪽배를 내려 나와 양지, 관승이 올라탔다. 주동은 배를 지휘해야 해서 남았다. 첫 계획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탐문이 시작되면 세 명이 뭍으로 올라가 상황을 정리한다는 것이 끝이었다.
단 세 명만이 쪽배를 끌고 포구로 향하자 사자라고 생각한 관인은 포위망을 물려 우리를 맞이했다. 이야기를 들어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응당 대화에 응했을 것이다.
“어디 소속이며, 무슨 일로 이곳에……. 컥!”
중년 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그의 목을 낚아챘고, 관승과 양지도 주변에 있던 아전들을 하나씩 인질로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졌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라 우리는 태연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반항할 사이도 없이 내게 목줄을 잡힌 중년 관인은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툭 치면 기절할 것 같은 인상을 보니 심약한 성격인 것 같았다.
“야성은 어느 쪽인가?”
나는 야성을 단지 야산(冶山) 기슭에 만든 성이라고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한의 유방이 무제(无諸)를 이 지역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생긴 도성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년을 훌쩍 뛰어넘은 고성이었지만, 송 태조가 이 지역의 성을 모두 허물 것을 명하면서 한 차례 허물어졌다가 이후 이곳을 다스린 지배자들에 의해 다시금 축조된 것이 지금의 야성일 것이니 옛 자취를 찾기는 조금 어려울 것이다.
“안무사 영감(令監)이 목적이오?”
그렇게 겁에 질려 있던 사람이 야성의 방향을 묻자, 대번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안무사의 악정(惡政)이 심했던 것일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체요? 아니면 제거요?”
“내 질문에 답이나 해라.”
목줄을 잡은 손에 약간의 힘을 주자 그는 컥컥 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리만 가면 야성입니다.”
그의 말투가 한껏 누그러졌다. 나는 그의 목에서 손을 떼고, 어깨동무로 팔을 둘렀다. 그는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미약한 몸부림이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제 생각이라니요.”
“안무사가 사라졌으면 좋겠나?”
“대체 무슨 뜻으로 소관에게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일 것이고, 살려야 한다면 살릴 것이다.”
“안무사는 재상(채경) 쪽 사람인데 대관절 대인은 어느 쪽이기에 그리도 자신만만하십니까?”
“개봉 부윤”
“개봉 부윤! 포면 대인 말씀이십니까!”
휘종이 고구나, 동관, 채경 등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리된 것이 몇 년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중앙 소식을 전해듣고는 있겠지만, 띄엄띄엄 얻는 정보에 불과하니 내가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말을 의심할지언정 확인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속뜻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참말입니까?”
나는 그냥 진한 미소로 화답했다. 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그를 완전한 오해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기대를 충분히 부응해주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자 나는 품속에서 검정 철패(鐵牌)를 꺼냈다.
“개봉 부윤께서 각차법(?茶法)의 폐해를 알고 보낸 것입니까?”
철패는 예전 포면을 만났을 때, 해남도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선물 받은 것이었다. 철패를 보이면 포면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은 대접을 받으리라고 했었는데 그때는 각성 전이라 그저 기념으로 간직했을 따름이다. 이것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관인의 입에서 각차법이란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돌아가는 사정이 짐작이 갔다. 그리고 내가 복주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송 대는 어느 때보다 상행이 활발했던 시기다. 북방의 적들을 돈으로 달래 평화를 산 송의 외교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다.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송은 전매 제도를 체계화시켰다. 그렇게 정해진 것이 소금, 술, 차다. 유통량으로 따지자면 소금과 술이 으뜸이었고, 차는 두 품목에 비해 유통량이 적은 편이었지만 이득으로 따지자면 앞의 두 품목과 비교할만했다. 이 시대부터 차마 무역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차는 하남에서 재배되어 하북에서 소비되는 행태였는데, 판매 지역이 더욱 늘어나면서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었다.
송은 그럼에도 전매차의 가격을 비싸게 유지했다. 그것은 요나 서하가 받아야 할 공물을 차로 대체함으로써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했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어느 정도 대중화되어 서민들도 조금만 무리하면 마실 수 있게 된 차가 졸지에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자연 생겨난 것이 밀차(密茶)였다.
차가 생산되는 주현의 포호(鋪戶, 중산층)들이 남는 토지에 차 나무를 심어 스스로 차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단속하는 관리가 나오면 자가소비분이라고 핑계 대고, 뇌물을 찔러주니 제대로 단속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전매차로 거둬들이는 이익이 10분의 1로 감소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채경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1102년에 밀차에 대한 강력한 법 집행과 차 생산 증대 독려를 각 지방에 명한다.
차 생산 증대는 쉽게 말해 밀차를 전매차로 흡수하라는 강제성을 띄고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는 관리에게 승진과 포상을 걸었으므로 눈에 불을 켜고 밀차 단속에 나서는 시기가 지금이다.
대표적인 예가 숭녕 3년, 바로 올해 포상받은 관리의 기록이다. 목주(睦州) 재성장(在城場)의 차 수매량이 올해에 88만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前) 해, 수매량은 44만근이었다. 한 해 사이에 무려 두 배가 증가한 것이다. 관의 수매 과정이 얼마나 강제적이고 무리한 요구가 개입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리들의 과욕이 차 생산자들을 화나게 하였음은 뻔한 일이다.
“전매차는 개봉으로 모두 모인 후 경매를 통해 대상들에게 배분된다. 복주의 차는 그중에서도 매우 유명하여 비싼 값에 거래된다.”
“맞습니다. 복주의 차는 천하제일입니다.”
중년 관인은 자부심을 한껏 담고 있었다.
“그러한 복주의 차 상당수가 도성 경매를 거치지 않고 시중에 유통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안무사가 제 일을 다하고 있는지, 혹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윤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어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그러하니, 뜻이 있다면 협조하라.”
“안무사의 죄과를 밝히시겠다면 소관은 무조건 따르겠나이다.”
그가 넙죽 엎드리자, 활시위를 당기며 경계하던 병사들이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안무사를 경원(敬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 안무사 영감에게 80척 전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야성을 걸어잠그고 농성이라도 벌이면 일만의 병사로도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이 재상의 사자가 도착이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 모두 역모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본관을 믿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호언에도 관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남리리(南離離) 석보(石寶)가 버티고 있습니다. 감찰사(監察使)께서 남협 전조 정도의 무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은 한, 얕보아서는 안 되는 무서운 녀석입니다.”
남협(南俠) 전조라면 포청천을 돕던 무사, 칠협오의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시대의 호걸이라고 불렸던 그와 비견될만한 인물이 외지인 이곳에 있다니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내가 지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웃어넘겼고, 계속된 여유에 관인은 조금 낯빛이 살아났다.
그런데 그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다가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남리대장군(南離大將軍) 석보로구나. 그는 복주 출생이라고 알려졌다.’
석보는 수호전 최후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방랍의 오른팔 격이었던 인물이다. 유성추와 벽풍도(劈風刀)를 상황에 맞게 자유자재로 써서 장, 단거리 전투 모두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지휘에도 능해서 양산박 호걸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로 기록되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급선봉 삭초, 화안선예 등비, 상문신 포욱, 철적선 마린, 금모호 연순 등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 중에는 소설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도 있기에 모두 믿을 수 없지만, 그만큼 그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방증일 것이다. 거듭된 활약에도 동관의 대병이 투입되자 전황은 불리해졌고,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한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보기 드문 실력자와 대결이라니 가슴이 뛰고 있었다.
“앞장서라.”
“지금 바로 야성으로 가겠단 말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곳은 일만의…….”
“지금이 미시 초반(13시).”
중천에 떠오른 해와 내 그림자를 보고 대략의 시간을 가늠했다. 중간에 말을 끊고 시간을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관인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술시가 되기 전(19시)에 성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관인이 반색하며 물었다.
“네? 혹시 소관이 모르는 대병을 숨기고 계십니까?”
“그렇다. 그러니 어서 앞장을 서라.”
그러자 관인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5리의 거리는 금세였다. 나는 가면서 한때는 민(?)의 도읍이었던 이곳이 상당히 피폐해졌음을 실감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아이들은 비쩍 골아있었다.
한때 번영을 누리던 상업 도시가 위정자의 악정으로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과일이 곳곳에 널려 있고, 사람 몸집만 한 물고기가 민강을 헤엄치고 있으며, 오골계를 집집이 키웠다는 마르코폴로의 기록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를 화나게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비로 보이는 자가 뭉둥이를 들고 자식을 때리려고 자세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로 보이는 여인은 나무 뒤에 숨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멈춰라!”
나는 야성으로 향하던 발길을 그리로 돌렸다. 마침 마르코폴로를 떠올리다가 그 광경을 보고 한 구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복주 주민은 어떤 불결한 것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이곳의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풍습에 따라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한 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창칼로 사람을 죽인 뒤, 피를 빨아먹고, 인육을 먹는다.
나는 뒤를 돌아 확인했다. 관인을 쫓아오던 병사 대부분이 머리 앞부분이 짧고, 얼굴은 파란 표식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무심코 넘겼던 것들이다.
“없애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군.”
“네? 누구를 또 없애시겠다는 것인지.”
먹고 살기 위해 자식을 죽이려는 아비의 태연함이 나에게는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지나치려는 관인의 모습도 역시 슬펐다. 수호전에서 등장하는 인육 식당을 보며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크나큰 비분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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