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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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가을로 접어들려는지 아니면 일이 무사히 풀려서 그런 것인지 얼마 전까지 느껴졌던 짜증 나고 습한 해풍은 선선한 상쾌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육지가 보입니다!”
높게 치솟은 돛대 위에서 견시병(見視兵)이 소리쳤다.
선수에서 해풍을 만끽하고 있던 나였기에 해안선과 그 뒤로 우뚝 솟은 산들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었다. 내가 탄 배 좌우로는 80척의 전선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있었는데, 나름 장관이었다.
“이제 시작이군요.”
관승이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육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탐라를 떠난 지 열흘 만에 보는 육지이자 내 행보의 첫 단추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보는 저 땅의 이름은 복주(福州)였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가 망하자, 월나라의 주축이었던 민월(?越)족이 남하하여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워낙 최남단이다 보니 중원의 통일 왕조는 점령만 해놓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자치령 식으로 통치를 맡기는 경우가 흔했다. 그것은 내가 건국했던 민 제국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월족의 자치를 허락하고, 대신 그들을 민 제국에 동화시키는 쪽으로 정책을 펴나갔었다.
당나라 말기에 전화(戰火)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이곳으로 많은 이주자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오대십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발전을 발판삼아 민국이 건립되었다.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북송 시대인 지금, 아직 변방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복주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은 남송 시대부터다. 복주의 잠재력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송 태조 조광윤은 개봉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복주가 반란의 기운이 있다고 보고, 그곳의 성을 모두 허물라는 지시를 내렸다. 후대의 황제들이 필요성을 느끼고 성을 다시 쌓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하지만 북방보다 남방에 투입되는 경비는 보잘것없었고, 그만큼 부실했다.
그런 만큼 복주를 제압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성이란 것은 단시간에 쌓을 수 없기에, 수성할 수 없다는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심각한 약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복주 일대가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것은 북방이 전부 산악지형이기 때문이다. 대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진군로가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송이 제대로 진상 파악을 하고 대군을 내려보내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흘러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거리가 워낙 멀기도 하거니와 이천 명 정도의 소요 사태는 지방 토호들끼리의 다툼 정도로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단은 곧 민강 하류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상륙하고자 하는 곳은 복주의 주도(主都)인 풍현(風縣)으로 현대의 복주시(Fuzh?u)다. 민나라의 수도였기도 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제압해야 할 곳이었다.
훗날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가 머물렀으며, 마르코폴로도 거쳐 갔을 뿐만 아니라,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가 바로 이곳에서 출항할 정도로 유명한 저곳에 이제 내 이름 역시 남을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두근거림에는 일전에 관승에게서 들었던 무의 하늘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측면도 있었다.
나는 그때 관승이 설명해주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전 금군 교두, 왕진이 건방진 화산파 도사를 혼쭐내준 것은 무척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면서 내공이란 것의 허황함을 세인들에게 알렸지요. 그러나 저는 우연히 모산파 도사를 만나 내공이 담긴 무예를 견식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개미를 보고 위협을 느끼지 않듯 세속의 무예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관승이 밝힌 모산파 도사의 이름은 공손승이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듣고 하마터면 입운룡(入雲龍)이란 별호가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었다. 수호전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을 꼽으라면 공손승이 단연 선두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모산파 도사로 출현했다는 것은 그의 스승인 나 진인(眞人) 역시 모산파 출신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모산파는 관승이 밝힌 사대문파 중 한 곳이었다.
“모산파는 민의 4대 황제인 성종 때, 위화존(魏華存)이란 도사가 모산(茅山)에서 상청경(上淸經)을 읽다가 득도하여, 만든 문파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가 9대 종사(宗師) 도홍경(陶弘景)이 당시 태호 일대에 암약하던 수적 무리 수천을 하루 만에 사라지게 하는 재주를 보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모산에 가면 모산파의 성전이 있는데, 그곳에서 수행하는 자들은 평범한 도인들이고, 무맥(武脈)을 잇는 도인은 극히 소수로 모산 깊숙한 곳에 따로 모여 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승의 설명 중 대부분은 그 역시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양지나 주동도 그런 이야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역사적 사실에 껴맞춰 상당한 사실들을 여럿 알아냈고, 흥분되는 결과의 연속이었다.
“소림사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흔히들 숭산 소림사가 무예의 성지로 알려졌지만, 기실 그곳은 학승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상징성 때문에 속가를 받아들이는 의식을 그곳에서 하지만 무예를 가르치는 곳은 상주(相州, 하북성 안양현)의 액하사(腋下寺)지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외원에서 수련하는 속가제자들이지만, 정종(正宗)만이 출입할 수 있는 내원은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하더이다.”
흔히 소림사의 시조, 달마대사가 무예도 창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 여러 사료가 발견되고 과학적인 증명이 이루어지면서 소림사 무승은 소림사에 본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절에서 파견 형태로 보내졌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관승의 설명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왕진 교두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알려진 화산파는 아시다시피 험준하고 신비로운 산세로 유명한 화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산은 영험한 곳으로 소문나 일찍부터 여러 도문이 들어섰습니다. 그중에서 화산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곳만 열 곳이 넘는다고 하지요. 왕진 교두가 만난 화산파 도인은 그런 여러 화산파 중 한 곳의 도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듣기로 북봉(北峰) 정상에 존재하는 화산파가 진짜라고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화산파가 실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북봉을 올랐으나 정상 입구(1614m)에서 화산논검(華山論劍)이라는 표지석만 볼 수 있을 뿐, 위로 올라가는 길은 항상 안개가 자욱할 뿐만 아니라, 이 장 정도의 거리가 끊겨 있다고 합니다. 만약 반대쪽에서 한 사람이 막아서면 천하의 누구도 건널 수 없다고 하는군요.”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탐독한 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동시대 실존 인물을 여럿 다루고 있다. 우연하게도 나는 전(前) 시대를 사는 셈이었는데, 내가 놀랐던 것은 그 이야기들이 지금의 나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청성파가 있습니다. 한 말에 흥성했던 천사도(天師道, 오두미도)가 시발이었습니다. 3대 교장(敎長)이었던 장로(張魯)가 민나라의 침공을 받아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찍부터 정교분리를 외치던 청성산의 도인들이 그 사건 이후 장로에게 등을 돌리면서 청성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청성파는 현재 가장 유명한 문파가 되었는데, 그것은 현 장문인인 유해섬(劉海蟾)이 사문(四門) 중 유일하게 최근의 활약상과 이름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문파는 장문들의 생김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지요.”
유해섬의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이선 중 한 명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유해섬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선은 종남산에 거주하는 두 선인을 가리킵니다. 한 명은 여동빈(呂洞賓)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조국구(曹國舅)지요.”
그 이름을 듣고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여동빈과 조국구는 도가에서 경외하는 팔선(八仙)에 속해 있다. 명나라 시대에 확립된 팔선은 신비주의 경향이 강해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 허다한데 그중 그나마 사실적으로 표현된 인물이 바로 이 둘이었다.
여동빈은 당나라 사람으로 보통 알려졌으나, 유해섬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최소한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여동빈은 송 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고, 그것은 곧 김용의 사조영웅전의 세계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동빈의 둘째 제자가 바로 왕중양(1113년-1170년)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존 인물로 전진교의 창시자이다. 김용의 소설에서는 천하오절의 중신통(中神通)으로 출연하여, 제1차 화산논검에서 나머지 인물을 꺾고 천하제일인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북봉 화산파에 올라 화산논검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이선 중 또 다른 한 명인 조국구는 설화(說話)에서는 종리권과 여동빈 두 명에게 가르침을 받고 팔선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 내가 사는 시대만 놓고 따지자면 조국구가 더 빨리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조국구는 명판관이었던 포청천과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본래 황제의 인척으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그가 도인이 된 까닭은 포청천과 얽히면서부터였다.
관승은 그들의 별호도 알려주었는데 여동빈이 검선(劍仙), 조국구는 악선(樂仙)으로 불린다고 했다. 둘 다 명호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러 화가가 상상하여 그린 여동빈의 초상화는 항상 검이 빠지지 않았고, 조국구는 조선의 김홍도가 그린 인상(印象)과 유사했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피리, 생황, 박판(拍板, 나무로 된 캐스터네츠)을 두 명의 동자(童子)와 각기 나눠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따지자면 마지막 일사(一邪)는 일마(一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김용이 쓴 의천도룡기의 주인공, 장무기는 정파인들이 마교라고 비난하는 명교(배화교)의 교주가 되는데, 선대 교주로 등장하는 이가 바로 방랍(方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시대 명교는 독특한 이론으로 말미암아 천대를 받았는데, 그래서 주로 밀상(密商)을 하며 은밀하게 세력을 넓혔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방랍이 진짜 명교의 교주라고 할지라도 난을 일으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십수 년 뒤다. 명교가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는 시대인 만큼 내 추측은 섣부른 감이 있었다.
“일사는 곽약사(郭藥師)라는 발해인입니다. 요의 최고수라고 알려진 인물이지요. 전대 하북삼절, 검호 적설 님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돌아가셨다고 보통 알려졌지만,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북방을 철옹성처럼 방비하던 적설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요 황제가 곽약사를 파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둘은 아무도 모르게 대결을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설 장군은 상처가 도져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누구도 확인해줄 사람이 없지만, 곽약사는 멀쩡히 살아남아 제위상장군(諸衛上將軍)이라는 칭호를 받고 황제를 가까이서 수행하고 있다고 하니 저는 사실로 여기고 있습니다.”
곽약사의 이름까지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송사(宋史)에는 채경, 동관 등을 제치고, 간신의 대명사, 진회(秦檜)와 나란히 간신전(奸臣傳)을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인생 역정 때문이다.
그는 발해 유민이었고, 일찌감치 요나라에 투신하여 공을 세웠다. 그의 부대는 발해 유민으로 이루어져 높은 충성심과 단합심을 보였기에 상승군(常勝軍)이란 별칭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요 멸망 직전에 그는 송으로 귀순하여 휘종을 섬겼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금나라로 넘어간다. 금사(金史)에서 그를 공신(功臣)이라 기록한 것을 보면 참으로 역설적인 삶이다.
발해 유민이라고 했으니, 그는 고영창처럼 수벽타나 탁견희의 고수가 아닐까 싶었다. 나와는 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과연 누가 더 강할까?
“내가 더 강하다.”
“네?”
내 혼잣말에 관승이 반응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풍현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