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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36화 (136/257)

00136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주동이 그런 양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가장 원한이 깊을 관 총순이 척 장군에게 고개를 숙였소. 무엇을 더 망설이시오? 설마 간신들의 앞잡이로 다시 되돌아갈 생각이오?”

“하지만…….”

나는 양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도 동관, 채경 등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양가장은 부유한 토호 가문이자, 송 건국 초기의 명장이었던 양업(楊業)의 배출로 한때는 송 최고의 무가라고 꼽혔다. 그러나 양업의 억울한 죽음 이후 가문은 서서히 몰락해갔다.

말년의 양업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온 힘을 다해 요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휘하 장수들은 죽음이 두려워 그를 제대로 원조하지 못하고 후퇴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장수들의 배신으로 결국, 요에 포로로 잡혔고, 거듭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고 버티다가 죽음을 선택하여 충절을 지켰다. 그러나 그를 배신하고 후퇴했던 장수들은 입을 맞춰 오히려 양업을 변절자로 몰아붙였고, 평소 양업을 시기하던 환관들의 입김까지 더해져 양가장은 억울한 오명만 잔뜩 안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그런 상황을 눈으로 지켜보고 자랐던 양지로서는 입신출세하여 가문을 예전의 찬란했던 양가장으로 돌려놓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황, 어찌 쉽게 수긍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양지는 스스로 깨닫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척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일깨워주기로 했다.

“단지 양가장을 바로 세우는 것이 목표인가?”

“필생의 목표를 단지라니?”

자신의 비원(悲願)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양지는 울컥했다.

“본래 양가장은 대대로 인주(麟州)의 토호였다. 여러 차례 전란에 휩싸이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를 중시 여기는 가풍 때문이었지. 그중에서도 그대의 조부는 매우 특별한 분이라고 알고 있다. 약관에 북한(北漢, 951년~979년)의 장수로 발탁되었고, 수많은 공적을 세운 덕분에 유숭(북한의 창건자)의 양손자가 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송 태종은 북한을 멸하면서 그대의 조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강한 반대에 부딪혔지. 송 태종은 북한의 마지막 군주, 유계원을 협박하여 그대의 조부가 군주에게 약속한 충성의 맹세를 해지하라고 한 다음에야 그제야 울면서 송 태종을 따랐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고쳐먹은 다음에는 오직 송에 충성을 다했으니, 그대 조부의 빛나는 업적 중 태종 5년(980년)에 안문(雁門)에서 벌어진 전투는 고려까지 알려질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양지는 자신의 가문을 띄어주는 것이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색한지 표정은 묘했다.

요나라가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안문을 공격할 적에 양업은 직접 기른 정예 병사 5천으로 적의 배후를 기습해 패퇴시킨 대단한 전투였기에 이름을 천하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양지가 한껏 자부심을 느낄만했다.

“본래부터 태종의 신임이 대단했던 그대의 선조는 그 일로 위상이 더욱 크게 오르자, 본래 송나라 출신 장수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지.”

양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것이 양업이 죽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에 참여한 휘하 장수들이 기만(欺瞞)적인 태업(怠業)으로 일관하며 양업만 남겨두고 후퇴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양업의 죽음을 가져온다.

나는 그것을 양지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다. 양지는 송나라 치하에서 양가장을 재흥시키고 싶었지만, 그 열정을 이용한 간신배들 때문에 헛수고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성된 분노가 그를 송강의 난에 참가시켰는지 모른다.

“그대의 말이 맞소. 빌어먹을 놈들이 옹졸한 질투심으로 조부의 직할군만을 남겨두고 모조리 퇴각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부가 포로로 잡혀 죽음을 선택하지만 않았다면, 요의 발호는 더욱 늦어졌을 것이오. 억울한 누명까지 조부에게 덮어씌운 휘하 장수들이야말로 진정한 배신자라고 할 수 있소. 그들의 상소를 받아들인 환관까지 말이오. 젠장!”

양지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오른발을 들어 강하게 땅을 박찼다. 양지가 화풀이하는 동안 나는 이번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왕안석은 일찍이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제정하여 나라의 궁핍한 재정을 채우고자 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왕안석의 신법은 문란한 국정을 새로 잡기 위해 행정과 세금 분야를 정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부분 대지주와 대상인들이었다. 처음에 왕안석의 신법(개혁)과 사마광의 구법(보수)이 대립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친 당쟁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충고해주는 세련된 정치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바로 그 윗선이었다. 윗선이라면 즉, 황제를 말한다. 황제가 애초에 신법을 채택한 것은 세입을 늘리고, 군대를 충실히 하여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덜기 위함이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가 결핍되었다. 바로 개혁의 보상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들어오는 수입에만 관심이 있었지 백성의 삶의 질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점차 심화하여 극에 달한 것이 바로 지금, 휘종 시대다. 휘종은 신법파인 채경을 재상으로 삼아 재정 수입을 늘리려 했다. 그리고 그 수입은 오로지 자신의 우아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백성에게는 불행하게도 채경은 유능한 간신이었다. 왕안석이 짧게나마 이룩한 신법이 자의로 해석되어 백성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데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병사들에게 소리쳐 언급한 방전균세법이었다. 왕안석이 방전균세법을 도입한 이유는 대지주가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나라 몰래 숨긴 논밭을 찾아내 세금을 매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채경은 그런 방전균세법의 취지를 무시하고, 공전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토지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공전법은 쉽게 말해, 그 대상을 대지주뿐만 아니라, 영세지주, 자영농에까지 확대 적용하고 세금 또한 과도하게 인상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토지 소유권에 대해 국가가 몰수할 수 있는 권한도 추가했는데, 이것이 훗날 송강의 난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대지주나 대상인들은 비교적 계약서 작성에 철저했지만, 영세한 농민들은 보통 구두 약속만으로 토지를 사고파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계약서가 미비하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토지를 빼앗긴 자들은 결국 반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신법이 징수의 목적으로 악용되다 보니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왕안석이 요괴 우두머리로 표현될 정도로 악평에 시달렸지만, 차츰 왕안석의 신법과 채경의 신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오히려 그리워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제도와 법에 애민(愛民)을 담고 있는가, 그저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도구로 이용되느냐에 따라 일국의 흥망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북송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전법은 어떠한가!”

공전법이란 말이 들리자마자 발끈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 저들 중에도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군대로 향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화석강은 또 어떠한가!”

이제는 주먹을 하늘 높이 뻗으며 호응하는 자도 생겨났다. 나 역시 오른 주먹을 하늘을 꿰뚫어 버릴 듯 힘차게 위로 뻗었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비분(悲憤)!”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결국, 이들은 내 뜻을 알아들었다

“강개(慷慨)!”

양지가 이글거리는 분노를 표출하며 주먹을 말아쥐고 크게 외치자, 마치 파도타기처럼 같은 답이 들려왔다.

나는 목이 터져라, 다시 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함성이 나에게 돌아왔다.

“비분!”

“강개!”

“비분!”

“강개!”

“비분!”

“강개!”

흔히들 비분강개의 동의어로 함분축원(含憤蓄怨), 절치부심(切齒腐心) 등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는다는 함축분원과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인다는 절치부심이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분한 마음을 품는 작위적인 표현이자 개인적인 의사표현이라면, 비분강개는 나도 모르게 울분이 터져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가리키는 동시에, 세태(世態), 국운(國運)과 같은 공동체적 분노를 상징한다. 지금 중원에 가장 걸맞은 구호라고 할 수 있었다.

“중원으로 간다!”

“와아아아!”

탐라가 들썩일 정도의 환성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들썩였다. 환성을 끝낸 병사들이 송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숙영지가 거둬지고, 물자들이 배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추자도 해적, 부곡은 자신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냐며 투덜댔지만 아무 피해도 없이 끝났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밥값도 못했다며 혹시 시킬 일이 없느냐고 물어본 것을 보면 말이다.

마침 나는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당분간 곽여의 손발이 되어 조정과 연락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윤관이나 동궁에게 연락하는 것은 곽여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나로서는 몇몇 지인에게만 은밀히 소식을 알리면 끝이었다.

그러기 위해 요시치카를 부곡에게 딸려 보내기로 했다. 이자겸이나 이소가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요시치카가 가야 하는 이유도 있었고, 이번에 미처 써먹지 못한 견도의 병력을 중원으로 옮기기 위한 것도 있었다. 또한, 나에게 반드시 오겠다고 할 이소의 호위 무사가 되어야 했다.

애초에 의도는 역관을 통해 견도를 고려인이 점령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면 어떨지에 대한 것이었지만 국가적인 일도 아니고 당대의 개인적인 점령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커서 미련없이 포기하기로 했다. 중원에 신경을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기 때문이다.

정주성에 거주하고 있는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십 인의 측근들에게는 마양도로 근거지를 옮기라고 일렀다. 백산부의 고욕과 교류하며 이 년만 버텨달라는 바람도 적었다.

중원으로 간 나는 귀양지를 무단이탈한 죄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려가 요에게 받을 책망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었다. 곽여가 중간자 역할을 할 것이니 별무반이 결성될 때쯤이면 죄를 씻기 위해 백의종군으로 참가할 계획이었다.

모함으로 파면당했다가, 별무반 결성 당시 윤관의 부름으로 하급 군관으로 복귀하는 실제 척준경과 결과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자겸에게는 비교적 솔직하게 내 행보를 알렸다. 특히 탐라의 일은 사실에 가깝게 적었다. 그렇게 생긴 귀족 가문의 공백에 관심을 두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중원행의 이유는 비무행을 들었고, 이소를 데리고 가는 것은 이자겸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면 고려로 다시 돌아가겠으니 그때는 힘을 써서 사면을 시켜달라는 청도 함께 했다. ‘아직 너와 인연을 끊고 싶지 않다.’라는 구애였다.

그렇게 하나둘 정리를 하는 사이, 탐라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전 탐라성주 고유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에는 탐라의 거의 모든 주민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쯤에 나는 관승과 양지, 주동, 김리 등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탐라를 점령하려는 목적 중에는 야명주나 화석의 반출뿐만 아니라, 다른 의도도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환관 동관은 서화나 고서를 보는 눈썰미가 뛰어납니다. 그는 일찍부터 민나라의 실록에 눈독을 들였는데, 그것으로 이민족을 움직일 수 있다는 소문을 믿어서였습니다. 왕안석이 민나라의 제도와 법률에 관심이 많아 신법에 상당수 반영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었지요. 그러면서 실록이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유구까지 진출하여 살폈지만 불완전한 사본을 얻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다 혹시 탐라나 고려로 건너간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되었지요. 민 태조의 부인 중 신라인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주동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김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창선 사고를 몇 차례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해마다 장마가 지나면 보관한 책들을 응달에 말리는데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런데 책의 훼손을 우려하여 불학무식한 백성은 배제하니, 인근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선비를 청합니다. 당연히 몇 없습니다. 저는 고서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자원했습니다. 그러다 얼핏 보았습니다. 민국실록이었던가요? 전해지는 사료가 불충분하여 이름만 얼핏 알고 있는 민나라의 실록이 사고에 있다니 참 신기했습니다.”

고려 실록의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로 되어 허가받은 승려만이 직접 작업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고서는 겉으로 훑는 정도는 가능했다고 한다.

추측하긴 했지만 정말로 민국실록이 창선 사고에 있었다니 이게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내 머리 정도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흥미진진했던 것은 사대문파 이야기를 관승과 나누면서였다.

“삼절오은은 물론 뛰어납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요의 각희 선수들과 다를 바가 없지요. 진정한 무의 하늘은 따로 있습니다. 이선(二仙) 사문(四門) 일사(一邪)가 바로 그것이지요.”

궁금했던 사대문파를 비롯해 그들의 정체를 듣게 되자 나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현대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이름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과 겨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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