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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35화 (135/257)

00135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그건 곽여도 마찬가지였다. 여유만만하게 상황을 주도하던 그가 조금은 당황스러운 기색이라 미소가 절로 나왔다.

“고와 양의 혼례라…….”

곽여는 새로운 해결법이 미칠 파문을 내심 따져보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고당유에게 다가가 물었다.

“왕자는 어떠하신가?”

곽여가 둘의 결합이 어떠한지를 직접적으로 묻자 고당유는 얼굴이 벌건 채 섣불리 답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고당유에게 역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탐라의 분쟁을 해결한다면 양림은 자신을 바치겠다고 했다. 왕자는 그러한 결과를 바라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잠시 소녀를 곁눈질하더니 잡은 손을 꽉 잡으며 소리치는 소년의 모습은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곽여 역시 그 광경을 보며 웃더니 고유에게 말했다.

“어른과 아이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 다릅니다. 어린 시절, 삼성이 한데 어울려 해변에서 놀았던 기억을 성주께서도 가지고 계시겠지요? 그 기억이, 그 정이 남아 있다면 성주께서는 더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탐라의 미래는 이런 젊은이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고유는 한참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사이 누구도 그의 침묵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올 발언이 탐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당유에게 다가가 손을 머리를 얹고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래 나에게도 너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문씨 집안의 처자와 혼례를 올렸지. 누구의 성이 중요한지 알고 싶지 않았고, 오로지 누가 잘 노는지 그것이 궁금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니 욕심에 얽매어 많은 추억을 애써 외면해야 했다. 모름지기 일국의 군왕이라면 미래의 성과를 위해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미래의 성과라는 것이 결국은 이기적인 욕심의 또 다른 말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그는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뒷짐을 쥐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당유(唐愈)라 지었던 것은 문화가 흥했던 당의 치세보다 더 나은 성주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 초심을 잃고 오히려 사도(私道)에 빠져 유왕유심(愈往愈甚, 갈수록 심해짐) 해버렸구나.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탐라의 죄인이다.”

“아버님…….”

고당유는 안타까운 눈으로 아버지, 고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이 탐라는 신화의 대지였고, 신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영험한 심방들이 자주 출현했지. 그러한 저력을 믿지 못하고, 중원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은 어쩌면 자격지심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선포하고자 한다. 너의 개명을 통해서……. 받아들이겠느냐?”

이름을 바꿔 새 출발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고유의 선택은 나나 곽여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다.

“지금은 창선 해창으로 건너간 영험한 심방이 네가 태어났을 때, 친히 방문하여 이름을 지어주었었다. 심방이 말하길 너의 탄생은 탐라에 무척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탐라에 거주하는 신들이 너를 축복하며 직접 이름을 내렸다고 했지. 그러나 나는 애써 그 이름을 무시하고 내가 정한 이름을 너에게 붙여주었다. 그것이 당유였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중원의 기운을 탐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갔어야 할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고자 한다.”

신들이 이름을 내려준다는 설화는 대체로 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문득 해창에서 만났던 심방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와 일면식이 없었으면서도 내면의 실체를 정확하게 맞췄고, 그래서 영험한 무속인의 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당유의 탄생이 탐라에 무척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어쩌면 오늘을 꿰뚫어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추측은 이어진 고유의 말을 통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 되었다.

“조기(兆基). 그것이 너의 진명이다.”

“조기…….”

소년은 새로운 자신의 이름이 낯선지 연방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의미로 그 이름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조기, 그 이름은 열전에 등장하는 위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조기라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시의 명인 중 일인이자 이자겸을 저지했던 재상 중 한 명이 아닌가?’

고조기의 시는 그의 강직한 성품만큼이나 힘차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동문선에 실린 기원(寄遠)은 그의 여러 시중 가장 유명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기원(寄遠)

금자재성기옥관(錦字裁成寄玉關)

권군진중호가찬(勸君珍重好加餐)

봉후자시남아사(封侯自是男兒事)

불참누란미의환(不斬樓蘭未擬還)

안부를 묻는 시를 비단으로 말아 옥문관으로 부치나니,

부군께서는 부디 몸조심하고 진지를 챙겨 드소서.

제후를 임명하는 것은 본디 대장부의 일이니,

누란을 베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기원의 예를 보듯 그는 오언절구, 칠언절구와 같이 형식을 갖춘 시에 대단히 능한 재주를 보였다. 그 시들 대부분이 현대까지 전해진 것은 당시 상황을 아는 데 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이자겸에게는 강력히 맞섰던 그가 김존중(金存中)에게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지.’

이자겸의 뒤를 이어 세도가로 떠올랐던 것이 김존중이었다. 의종이 그를 매우 신임했던 탓인데, 그의 세도를 탓하기는커녕 그가 등창이 나자 왕이 어의를 보내 치료를 담당케 할 정도였다. 말년의 고조기는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탓에 강직한 신하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그것이 현대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 유일한 흠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김존중 역시 당대에는 시의 명인 중 한 명이라 불렸다는 사실이다. 시를 통해 교류하며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말년의 고조기가 강직한 신하들에게 비난을 받고 탄핵을 받아 좌천되었을 때 김존중이 구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죽는 시기도 비슷해서 김존중이 1156년, 고조기가 1157년에 수명을 다한다.

아무튼, 시를 통해 그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조기가 가지는 본뜻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까지 알게 되니 절로 미소가 흘렀다.

흔히 쓰는 단어 중에 조짐(兆朕)이란 단어가 있다. 좋거나 나쁜 일이 생길 기미가 보이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조(兆)’는 거북이 등 딱지가 갈라진 모양이라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 길흉을 뜻하는 한자어이자, 산술을 뜻하는 한자어이기도 하다.

심방이 고당유에게 ‘조기(兆基)’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기(基)는 토대(土臺)의 의미로 사용됨을 고려하면 조기는 곧 근본이 시작되는 기미라고 할 수 있었다. 탐라의 역사가 고조기의 대에서부터 정식으로 고려에 편입되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감을 이미 심방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님!”

흐뭇하던 미소도 잠시 상황은 급변했다. 고유가 혀를 깨물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입가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고, 그런 고유를 고조기가 급히 부축하여 안았다.

고유는 그런 고조기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혀를 깨물어 자진한 것이니 마땅히 구두로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던 탓에 슬픔보다는 허망함이 중인들에게 밀려들었다.

곽여는 혀를 찼다. 고조기의 성주 승계를 순조롭게 하려고 책임을 홀로 걸머졌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탐라를 껴안으려는 고려로서는 더 이상의 압박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고조기가 고유의 시신을 안고 슬프게 울자, 고조기를 위로하는 것은 양림의 몫이 되었다. 고조기의 울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곽여가 말했다.

“성주의 죽음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가?”

고조기는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아버님이 제게 조기라는 이름을 되돌려 주신 것은 탐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책임지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허물과 책망은 자신이 모두 안고 가신다는 뜻이니 아들로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망의 대상은 오직 진작에 아버님의 뜻을 꺾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했던 저 자신뿐입니다.”

“참으로 올바르고 훌륭한 생각일세. 비록 만남의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그 끝은 단언컨대 탐라의 영광으로 돌아갈걸세. 만약 전 성주처럼 과거를 치러 재기(才氣)를 알리고자 한다면 이 몸이 곁에서 성주를 돕도록 하겠네. 신임 성주를 시작으로 누구도 고려로 출사하는 탐라인을 핍박하거나 차별하지 못하도록 전심전력으로 돕겠네.”

곽여가 내민 손을 고조기가 받아들이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들이 흘러나왔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사라졌고, 서로를 향한 적의도 크게 줄었다.

순간 떠오른 재미난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김리의 표정이었다. 어쩐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는 하늘과 고유가 보는 하늘은 같은 것이었을까? 같은 하늘을, 같은 꿈을 꾸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유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양산숙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말없이 고개를 숙였는데, 그 행동의 이유는 이후 그의 발언으로 알 수 있었다.

“딸아이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장군은 탐라의 은인입니다.”

나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 한 번의 사과로 지난 갈등과 오해는 눈 녹듯이 씻겨져 내려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멀뚱히 있던 김리를 불러 고조기와 인사를 나누게 하는 모습까지 보고 이제 내가 이곳에서 관여할 일은 없음을 깨달았다. 남은 것은 송군의 처리뿐이었다.

나는 관승과 양지에게 다가갔다. 관승은 내가 다가올수록 표정은 더욱 굳어져 갔다. 그들 사이에는 어느 틈엔가 주동도 끼어 있었다. 결과야 어쨌든 모든 것이 다 끝난 마당에 고유의 죽음이 재현되는 비극을 막기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네는 내가 여전히 원망스럽겠지.”

관승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탐라성으로 고유의 시신이 모셔지고, 곽여와 김리 역시 탐라인들을 쫓아 탐라성 안으로 들어가버린 다음이었다.

“한(恨)스럽소.”

원망이 아니라 한이라니…….

“처음 순검(巡檢)이 되었을 때, 나는 전장에서 전해져온 병사들의 사망 소식을 고향에 알리는 역할을 몇 달간 한 적이 있었소. 부고(訃告)의 대상은 대부분 부모였지. 늙은 어미는 아들의 부고를 듣고 슬픔을 금치 못했음은 자명한 일. 그 와중에 나에게 아들을 죽인 자가 누구냐고 묻는 자는 한 명도 없었소. 전쟁에서 아들을 죽인 자는 전쟁을 벌인 국가 그 자체였지, 개인에게 원한을 돌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아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을 죽였을 것이기에…….”

관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한스럽소. 그대의 무예를 감상하니, 그대의 말에 반박할 용기도, 원한을 갚고자 하는 의지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오. 전쟁이란 본시 그런 것인데, 나는 승리의 신이 항상 내 곁에 있는 줄로만 알았소. 누군가 나를 위협하고, 누군가 나의 지인들을 죽이고, 누군가 나의 군대를 패배시키는 그런 일을 상상해본 일이 없단 말이오. 게다가 그대는 사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웅지를 자극하여 사감(私感)에 빠진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으니 자신의 미약함과 어리석음에 한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소? 지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나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들이 만족할까?”

관승이 무릎을 꿇었다. 양지와 주동은 그의 돌연한 행동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처음 겪는 일이라는 방증이다.

관승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소관은 힘은 제법 있었으나, 세상을 바꿀 도량은 없다고 보았기에 지인들과 입신출세를 목표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이제 와 깨달으니 장군과의 악연은 언제고 일어났을 선택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군의 뜻대로 천하를 바로 세우십시오. 대의가 바로 섰을 때, 소관의 한도 지인들의 죽음도 천하가 이해할 것입니다.”

관승이 비장하게 외치자, 송군 일부는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들이 생겼다. 그렇게 하나둘 숫자가 늘어가자, 양지는 자신은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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