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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34화 (134/257)

00134  (18) 파옹구우(破甕救友)  =========================================================================

(18) 파옹구우(破甕救友)

뜨거운 환호는 없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이미 나에게 심정적으로 굴복했다는 것을. 관승의 눈매는 잘게 흔들렸고, 양지는 거친 숨소리를 토해냈다.

“하하하!”

의도하지 않은 침묵을 깬 것은 곽여였다. 그는 거침없이 나아가 승평부 지사를 어깨동무했다. 승평부 지사는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일으킨 신위를 보고 난 다음에 한껏 위축된 모습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주목이 죽었소. 즉, 나주목에 소속된 1부(府) 8군(郡) 31현(縣)의 주인이 공석이 되었던 말이오. 그뿐인가? 양도 수군 역시 마찬가지 상황. 지사께서는 욕심이 나지 않소이까?”

곽여의 말투는 흡사 약장수를 연상케 했다. 승평부 지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가 어찌 나주목을 욕심낼 수 있단 말입니까? 백가와 지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상황이 바뀐 탓인지 말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욕심은 나지만 유력가들의 힘이 커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는 인상이 짙은 것을 확인한 곽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백가와 명가, 지가는 지역에서 그 위세가 대단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정에서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의 일이오. 그 역할을 중서시랑이나 예부상서가 담당했지만 전모가 알려지면 파직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인주 이가와 경주 김가가 주상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니, 이번 기회를 빌려 새롭게 떠오르는 가문들이 있을 것이오. 나주 박가가 그중 하나일 것이고, 영암 최가도 있소.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직접 앞장설 것이니 승평부 지사께서는 그저 돌아가는 판세를 앉아 구경만 하면 되오이다.”

나는 처음에 나주 박가가 내 정보를 탐라에 팔아넘겼다고 생각했다. 양쪽에 줄을 대고 유리한 쪽을 선택한 것이 결국 전라 귀족과 송군, 탐라성주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배를 타고 오면서 그런 사실을 곽여에게 말했었는데, 곽여는 대번에 고개를 흔들었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내가 엉뚱한 추측을 했음을 깨달았다.

나주 박가는 밀양 박가에서 분적(分籍) 되었기에 전라 귀족 사이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상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주 박가로서는 나주를 세거지로 잡은 이상 전라 귀족의 지지가 필요했고, 그래서 나름대로 굽히는 자세를 취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조정에서 나를 귀양지로 운송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그런데 보통 귀양지 유배라 하면 병사들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상인에게 유배 운송을 맡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곽여는 아마도 윤관의 의중이 은밀하게 나주 박가에게 전해졌으리라 추측했다. 이번 기회를 빌려 나의 충성심과 진정한 힘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것이란 말이었다.

나주 박가는 전라 귀족들이 주는 이익에 회유 된 척하며 나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흘렸다. 그것으로 나는 생명의 위협에 빠지게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죽음에 이르렀다면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는 말이 된다. 내 죽음은 이자겸이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할 것이고, 어찌 되었든 탐라의 문제는 귀족들의 유혈 분쟁으로 번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가 가장 좋아할까? 고려 왕실이었다.

곽여는 숙종의 입김이 있었으리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나 역시 공감했다. 내가 아는 숙종은 왕권 강화와 북벌에 모든 것을 건 인물이었다. 나 하나쯤 희생시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너무나 싼 대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내가 살아남아 탐라의 일을 처리해도 숙종이나 윤관으로서는 매우 기꺼운 일이다. 내가 그만큼 뛰어난 인재라는 것과 지극한 충성심을 단번에 입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년간 유배자 신분이라 공훈을 단번에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이기에 그렇다. 조정의 공식적인 기록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는 임무를 열성적으로 해낸 인재라면 어느 누가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노회하기 이를 데 없는 계산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곽여에게 물었었다. 왜 그런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느냐는 질문이었다. 동궁의 태사였던 곽여가 나에게 왕실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때 곽여는 웃으며 나에게 ‘장군의 웅지가 낳은 결과는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바뀌지 않기 때문이오.’라고 답했었다. 그것은 곧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고려에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위인들을 보면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고집스러운 일면을 보일 때가 있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잘못된 선택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고 때때로 실패를 맛보지만 끝내 결과를 놓고 보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 생각, 행동의 근원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평부 지사는 곽여의 은밀한 제안에도 거듭 망설였다. 곽여는 이내 승평부 지사가 망설이는 원인을 깨닫고 내 뒤로 도열한 병력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뭐 하느냐! 감히 반역을 도모한 전라 귀족들을 끌어내지 않고!”

병사들은 눈치를 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묘한 광경이었다. 병기를 모두 해제한 송군 사이로 진입한 병사들이 남아 있던 전라 귀족들을 성안에서 끌고 나오자, 그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고, 송군이나 탐라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곽여 앞에 무릎을 꿇은 그들은 관승, 양지, 탐라성주의 이름을 연방 외쳤지만 돕고자 나선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곽여와 어깨동무를 한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승평부 지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팔아넘겨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곽여가 노린 효과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탐라를 가지시겠소? 아니면 나주목이 되시겠소?”

온갖 저주가 승평부 지사에게 쏟아지는 와중에 곽여는 태연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승평부 지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지만 이미 외통수였다.

그런 와중에 승평부 지사가 발끈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중년인이 원독을 품고 한탄을 내뱉은 한 문장 때문이었다.

“이래서 마한 왕족의 발탁을 그리도 말렸건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마한의 건국을 보면 조선의 왕 기준이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남하하여 한땅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사학자들은 기준의 핏줄이 중원인인지, 토박이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기씨 후손들은 중원에서 건너온 기자(箕子)가 한반도 북부에 정착하여 조선을 세웠다는 기자 조선설을 신봉했다. 자신들을 왕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자면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조선을 통치할 때, 위만의 침입을 받아 남하했고, 그렇게 닿은 곳이 전북 익산시였으며 마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백제가 그런 마한을 복속하면서 기씨는 일개 중소 귀족 가문으로 전락했고, 그 후예가 지금 승평부 지사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마한의 건국은 학자마다 여러 논란이 있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고대 마한이 이미 존재했고, 고대 마한의 주인을 내쫓고 우리가 아는 마한을 연 것이 기준이라는 시각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승평부 지사가 백제에게 멸망한 마한의 후손이 확실하다면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이 배신했다고 판단할만한 근거는 된다고 보았다.

승평부 지사는 작심했는지 곽여의 어깨동무를 풀고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백제의 후예는 충신이고, 마한의 후예는 역신인가! 애초에 무궁한 이득을 얻기 위해 나선 일이거늘, 일이 틀어졌기로서니 가문을 들먹이고 호도하는가!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그것으로 내 마음이 정해졌다!”

한 차례 시원한 호통을 선보인 승평부 지사는 곽여를 돌아보았다.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까?”

“물론이외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곽여가 강한 어조로 약속하자 승평부 지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짚으며 두 손을 모았다.

“승평부 지사, 기치(奇治). 나주목의 자리를 받겠나이다. 그리고…….”

어차피 선택의 길은 없었다. 탐라를 받아보아야 어쩌겠는가? 탐라성주가 멀쩡히 눈을 뜨고 있고, 탐라군이 존재한다. 지지할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받아봐야 독만 되는 것이었고, 받을 이유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칼 한 자루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곽여가 어떤 이유로든 내렸을 것 같았다. 그의 손에 칼이 들려졌고, 주변은 한동안 비명으로 가득 찼다.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전혀 망설임 없이 남은 전라 귀족을 모두 처리하자, 그제야 탈진이 오는지 휘청거렸다.

그런 그를 곽여가 부축하며 말했다.

“보기보다 제법 강단이 있군.”

그를 부축하며 시선은 우연히 나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이후의 중얼거림이 일부러 보라는 것처럼 선명했다.

‘주상께서 좋아하시겠어.’

완전히 돌아선 이상, 기치는 한때 상관이자,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귀족들을 상대로 가혹한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뜻하지 않은 마한 왕족 발언의 여파로 마한 귀족과 백제 귀족의 대립으로 구도를 몰고 간다면 생각보다 더 큰 유혈로 번질 것이고, 귀족 세력이 감소하길 바라는 숙종으로서는 무척 바라던 일일 것이다. 곽여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고려 내부 세력은 정리된 셈이었다. 남은 것은 탐라와 송이었다. 탐라성주 고유는 살육의 현장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 차례요? 고씨들을 다 죽이면 탐라는 부씨와 양씨의 것이 될 테니…….”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본 것 같았다.

“아버님…….”

고당유는 고유의 깡마른 손을 꼭 잡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주군!”

남쪽에서 요시치카와 양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보낸 길잡이들도 있었고, 나를 남해도까지 무사히 데려다 준 대잠녀(大潛女)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방관한 무리로 처신하던 양산숙의 얼굴에 기쁨이 감돌았다.

그런데 양산숙보다 나는 오히려 고당유에게 시선이 갔다. 양림을 보는 눈빛에 안도가 감돌고 있지 않은가?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던 모양이다. 나는 어쩌면 평화의 실마리를 잡은 듯했다.

가장 먼저 내 곁에 도착한 요시치카는 주변을 살피더니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빠졌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사이 고유가 곽여에게 말했다.

“욕심인 것을 알지만, 이 몸의 죽음으로 탐라를 온전히 놔줄 수 없겠나?”

“성주는 너무 욕심이 많았습니다.”

곽여가 고개를 가로젓자, 고유는 기대하지 않았는지 허허로운 면모마저 보였다. 그는 고당유가 잡은 손에 다시 남은 손을 겹치며 말했다.

“아비가 원망스러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구나.”

고유는 고당유의 손을 풀고 곽여에게 말했다.

“그대들에게 일족의 목숨을 맡기지 않겠소. 나에게 칼을 주시오. 내가 직접 하리다.”

나는 개인의 무력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가능성을 이곳에서 보았다. 병사 숫자로만 보면 송군과 탐라군의 우세였다. 그런데 오직 나 한 명으로 말미암아 대항할 의지를 상실했다.

만약 저들이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승리했을망정 상처뿐인 영광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나의 등장은 더 죽었어야 할 인명을 살린 것과 같다. 적을 죽여야 승리하는 전쟁에서 나는 오히려 적을 살리며 승리한 것이다.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곽여가 순순히 칼 한 자루를 내주려고 하자, 내가 제지하며 나섰다. 곽여는 내가 마지막에나 나설 것으로 알았는지 이른 등장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 소녀와 약속했었다.”

요시치카에게 뒤처졌던 양림이 대잠녀와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친족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여기저기 흩어진 수급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양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영등이 되었고, 용왕이 되었고, 별성마마가 되었다. 이제 그 약속을 여기서 지키고자 한다.”

나는 양림에게 성큼성큼 다다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당황하는 그녀를 끌고 고당유에게 다가갔다. 소년소녀는 갑작스러운 대면에도 어색하기보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더 앞섰다. 양림이 이곳에 더 일찍 도착하여 상황을 알았다면 아마도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며 사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떠올랐다.

“탐라는 삼성혈을 근원으로 한다. 고씨가 사라지고 이성(二姓)만 남게 된다면 탐라라 부를 수 있겠는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서로 배척했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씨의 몰락으로 허약해진 탐라는 주변국들의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고,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양림과 고당유의 손을 포갰다. 무척이나 긴장된 상황임에도 둘의 표정은 부끄러움으로 가득했다.

“삼성이 공존하며 평화롭던 예전으로 돌아간다. 그 시작은 이 아이들의 결합이 될 것이다.”

고유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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