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17) 남도풍운 =========================================================================
나는 어쩌면 그것이 곽여의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라를 넘겨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오히려 적들의 분열을 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이런 곽여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욕심에 눈이 가려진 자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중년 문사가 딱 그 짝이었다. 피해자라고 외치던 때는 언제고 곽여의 제안에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탐라를 순순히 내어주겠다고……?”
의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잔뜩 품고 있는 모습이 순진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고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들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우리들의 선처를 받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미 주인인 자신은 염두에도 없는 모양새였기에 절로 인상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남은 전라 귀족들의 뜻을 대변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중년 문사는 승평군의 지사라고 했다. 내게 목숨을 잃은 나주목의 휘하로서 수뇌부들 대부분이 몰살당한 이상 그가 남은 무리의 대변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고 싶었지만, 그제야 탐라성주의 분노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양쪽에서 엉거주춤하던 그는 마음을 굳혔는지 탐라성주를 에둘러 달랬다.
“이쪽에서 이렇게 화해를 청해왔는데 이쯤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어차피 탐라와 우리는 하나가 되기로 약조가 되어 있지 않았소?”
그런 그가 한심한지 탐라성주는 혀까지 차며 말했다.
“진정 이들의 의도를 모르시겠소? 이미 이들은 양도의 상장군과 여주지부의 목을 베면서 우리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소.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덮어두고 이들을 순순히 돌려보내라고? 그러다 고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어찌 될 것 같소? 그대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경주 김가 하나 누를 수 있겠느냔 말이오. 우리는 고려 조정에 송두리째 잡아먹힐 것이오.”
승평지사는 고유의 지적에 얼굴이 붉어졌다. 옳은 말 같아도 여러 사람 앞에서 무시를 당한 수치심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는 내가 죽인 자들과 혈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계집같이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봐야 저들의 술책에 더욱 휘말려 들 뿐입니다. 이미 여주지부가 살해된 이상, 화해란 있을 수 없는 법.”
관승이 대도를 움켜쥐고 출전했다.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자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나온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양지가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그는 도움을 뿌리쳤다.
그는 나에게 도를 들이대며 외쳤다.
“네놈이 강한 것을 잘 알겠다. 그러나 이미 나는 네놈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강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자가 주변 사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차례대로 잃었다. 이제 송으로 돌아가 보아야 그에게 돌아올 것은 치욕뿐이리라. 마지막으로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섰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부상을 당한 몸이었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나는 바닥에 꼽아 두었던 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그런가? 그랬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관승은 지금 자신의 죽음으로 항복할 명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복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치면 송군의 파견자 중 그나마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은 자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를 살릴 길이 이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승평지사는 관승의 개입으로 다시 피바람이 일 것으로 생각했는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지만 이내 쏟아지는 무서운 안광에 찔끔하며 물러났다. 그리고는 나와 불과 삼보 거리 정도에 다다르자 입을 뗐다.
“네놈이 강한 것을 알지만 나 역시 무예로 외길을 달려온 몸. 이번에야말로 다를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뭣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뿐이다. 죽으면 원한은 씻겨지는가?”
“나를 우롱하는가? 나를 살려 수하로 삼겠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망상을 아직도 하고 있다면 집어치워라.”
위정국과 학사문의 죽음이 관승에게는 나와 타협할 수 있는 선을 뛰어넘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나 역시 지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지도 몰랐다.
“면식이 있는 자가 상대를 죽였을 때는 그 근거가 옳든 그르든 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위 ‘죽일만해서 죽였다.’라는 것이지. 열등감, 체면, 자존심, 질투……. 어떤 단어를 갖다 부치던 살해 동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전쟁에서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죄책감이 없이 죽여 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고 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인 사람이 많을수록 전공으로 치부되어 출세하게 된다.
“네놈 역시 지금껏 무고한 인명을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 피해자들이 너를 원수로 여기고 있음에도 감히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은 너의 지위와 힘 때문이었다. 만약,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무뢰 집단의 대결이었다면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고, 네놈은 지휘관이다. 지휘관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다른 이들이 희생당한다면 그건 네놈에게 지휘관의 자질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것이 너의 결심이라면, 오라! 기꺼이 구천으로 보내주겠다.”
관승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하얀 종이에 둘러싸인 둥그런 물체를 꺼내 들었다. 둥그런 사과 모양의 물체는 곧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도로 베어버리려다가 이내 저 물건의 정체를 떠올렸다.
‘설마 위정국의 장기 중 하나였던 화구(火球)?’
화약 사용이 주특기였던 위정국이 탐라에 왔다면 당연히 그의 물품들도 함께 왔으리라. 처음으로 화기가 사용된 시대가 송이었고, 공성, 수성뿐만 아니라 야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개발된 것으로 화전(火箭), 화창(火槍), 화구(火球) 등이 있다. 화전은 일종의 소이탄이었고, 화창은 무협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이화창(梨花槍)을 가리키는 것으로 창끝에 화약을 달아 적에게 닿으면 터지는 일회용 형태로 당황한 적을 창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화구는 최루탄 정도로 보면 맞을 것이다. 아직 폭발 화기에 대한 연구보다는 연소(燃燒) 화기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 있는 시대라 일시적으로 폭발음을 통해 청각을 흐리고, 더불어 섬광, 연막의 효과를 보는 물건이었다.
무심코 베는 순간, 화구는 내 눈앞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 한순간을 노리려는 것이 관승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내가 화구를 피한다면 화구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근처에서 터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문득 1993년에 개봉되었던 이연걸의 태극권이 떠올랐다. 이연걸의 영화 중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영화였던지라 백번도 넘게 본 것 같았다. 오죽하면 꿈에 이연걸이 태극권을 터득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였을까.
몸치라 당시는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동작들이 지금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태극권의 손동작은 수벽타와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나는 문득 나에게 수벽타와 호흡법을 가르쳐준 고영창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쯤 발해를 다시 세우기 위해 부흥 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다.
-고구려와 발해는 무예의 원류가 같다. 그러나 필요성에 따라 두 갈래로 갈렸지. 하나는 탁견희, 또 다른 하나는 수벽타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탁견희는 발, 수벽타는 손기술이 위주다. 둘 다 중요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수벽타가 유리하다. 그래서 고려도 수벽타를 군부 무술로 채용했지. 밀집된 공간에서는 발보다 손이 더 빠르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느 무예나 기본적인 동작은 대개 비슷하다.
이연걸이 태극권에서 흩날리는 꽃잎과 나뭇잎을 두 손 허공에 가두었다면 수벽타 역시 그것과 비슷한 동작이 있다. 마치 구름을 어루만진다고 하여 운수(雲手)라는 멋진 이름이 붙어 있는 동작이었다. 나는 얼른 잡고 있던 도를 바닥에 꼽고, 손바닥을 폈다.
두 손바닥이 위아래에서 서로 마주 보는 형태를 만들었다. 곧 그 안으로 화구가 날아들었다. 약간의 충격에도 터지도록 종이로 감싼 만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에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양 손바닥이 8자를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하나의 멋진 그림 같은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탄성으로 알 수 있었다.
손안에서 회전하던 화구는 마치 배구의 토스 장면을 연상시키듯 하늘 높이 솟구쳤다. 빠르게 치솟는 화구에 모두 시선이 팔렸다. 하나같이 그 화구를 내가 어찌 처리할지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마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경이로운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관객들 같았다.
“춘절은 아니지만…….”
춘절에 연화(煙火, 폭죽)를 사용하는 풍습은 7세기 초, 당나라 건국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수나라 시절이 맞을 것이나 내가 민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수나라의 역사가 사라지고 바로 당나라로 넘어간 터라, 민나라 말기쯤에 이미 폭죽을 터트려 춘절을 기념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화구가 최정점에 올라 서서히 낙하하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아아아아아!”
나는 힘껏 울부짖었다.
마치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사자후(獅子吼)가 실상은 부처의 진리를 담은 정법(正法)이라면 나는 말 그대로 사자의 울부짖음이었다. 부처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고 하는데 그건 한 개인이 우주보다 존귀하다는 생명 존중 사상을 담고 있었다. 사자후가 그것을 실현하려는 방편이었다면, 나의 사자후는 누구보다 강하다는 마초스러운 확인이었다.
-인종 공효대왕 병오 4년(1126년) 5월 자겸이 궁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감의 갑옷과 무기를 제 것처럼 썼다. 자겸과 갈라서기로 한 준경이 왕을 모시고 군기감으로 향하는데 자겸의 무리가 활로 준경을 위협했다. 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런 곳에 다다랐음을 온몸의 반응이 나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완숙해진 호흡법은 복부에 숨을 가득 채워 일거에 밖으로 표출되었고, 성대가 진동했다. 성대의 진동은 음파를 만들었고, 그 음파가 입안을 통과하면서 공명을 일으켰다. 공명은 입술을 빠져나오면서 강력한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은 곧 물리적인 힘으로 표출되었다.
펑!
화구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불꽃과 연기를 피워내자 사람들은 그저 멍한 표정뿐이었다. 이런 일을 어디서 겪어 보았을까?
탁! …… 탁, 탁, 탁, 탁, 탁!
뒤에서 지켜보던 송군 한 명이 창을 바닥에 떨어트리자, 뒤를 이어 연쇄 반응처럼 여기저기서 창을 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일선 지휘관들의 당황스러운 독촉에도 항복을 결심한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관승 역시 얼이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한 수라고 믿었던 화구가 가로막힌 것도 기가 막힌 일이었겠지만 설마 그것을 개인의 무력 과시 용도로 쓰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대 문파의 장문들이 이 자리에 나선다고 해도 이 정도 신위를 보여줄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거늘……. 그대가 진짜 사람이오?”
복수도 올라갈 나무가 보여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만약 복수의 대상이 하늘이라면 마음의 상처를 간직할지언정 체념할 수밖에 없다. 관승이나 위정국에게 피해를 보았던 백성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엉겁결에 읊조린 사대 문파라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삼절오은은 흔하게 들어보았어도 사대 문파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혹시 무협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구대 문파 중 일부를 가리키는 것일까? 삼절 중 일인인 이탁이 소림사의 속가 출신이라고 했으니, 소림사는 그중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물을 여유는 없었다. 이번 일을 해결한 뒤에 물어도 늦지 않았다.
“보았는가!”
모두에게 외쳤다.
“나는 중원으로 간다!”
마치 사이비 교주가 되는 느낌이었지만 이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여겼다.
“중원을 구(求, 책망)할 것인가! 구(救, 구제)할 것인가! 대장부로 태어나 그 정도 호기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찌 대장부라 칭하겠는가!”
주위는 내 패기에 밀려 잠잠하기만 했다. 나는 눈을 빛냈다.
“대장부의 길을 보여주겠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