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17) 남도풍운 =========================================================================
내가 알기로 칠십 고령의 나이였다. 이 시대라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나이었건만 생각보다 정정해 보였다.
그의 등장은 뜻밖이었는데, 지금까지 듣기로도 그가 위험한 장소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기울었다고 느낀 것일까?
그의 표정은 무척 담담했다.
“동궁에게 진인이라 자칭하는 태사가 있다더니 그게 바로 그대였구먼. 낙향했다고 들었는데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것을 보니 수행을 위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대도 탐라가 탐이 나던가?”
말투는 잔잔했지만 곽여를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곽여는 그런 고유를 상대로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진인이라 자칭한 적은 없습니다. 과분하게도 동궁께서 그리 불러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언제고 진인으로 불리고 싶어하는 것은 맞습니다. 진인과 비슷한 말로 나한(아라한)이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지천명(50세)을 넘기며 제 뜻은 더욱 확고하여 그 하나를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릇된 것입니까?”
“그래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이곳은 탐라다. 탐라의 일은 탐라가 결정하다. 신라도 고려도 지금껏 그 원칙을 깨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손가락질하려던 고유는 올리던 손을 내리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탐라는 백제에 신속했다가 백제의 세가 기울자 신라에 입조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자 고려에도 역시 입조를 하여 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그런 신라가, 그런 고려가 중원에 사대했다.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그러했듯이. 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소국의 역사라면 차라리 대국에 편입되어 대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당장 겪을 백성의 불편? 얻기 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10년만 지나도 탐라는 어엿한 중원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고 탐라의 인재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이 흐르면 어쩌면 탐라는 중원의 정세를 쥐고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중원에서 일어난 왕조들의 역사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씨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이번 일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후회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고려의 힘이 요나 송보다 컸다면 나는 지난날의 한을 깨끗이 접고 적극적으로 고려로의 귀속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방법들을 고려에도 그대로 적용했겠지. 그런 우리의 절절한 선택을 아무런 선의도 없이 지금껏 살던 대로 살라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처사가 아니겠는가!”
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민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반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곽여를 슬며시 바라보았는데 고유의 절절한 주장에도 곽여는 한가롭게 백우선을 부쳤다.
“그래서…….”
한가로움이 지나쳐 소걸음처럼 느릿하기만 했다.
“다른 것은 다 집어치우지요. 탐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성주 본인에게만 있다는 것입니까?”
고유가 잠자코 있자, 곽여의 발언이 계속되었다.
“백성 모두에게 그 뜻을 물으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성주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한다면 신하는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그냥 시키는 일만 해야 합니까? 신하와 노예를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성주께서는 유학에 밝으시니 충과 효의 차이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간해도 부모가 듣지 않으면 울면서 부모를 따르는 것이 도리이지만, 신하는 군주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는 떠나는 것이 도리라 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한배에서 나왔지만, 임금과 신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 자식이란 혈연적 인연만큼 군신 간의 강력한 관계를 정의한 것이 의합(義合)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대할 때는 의에 의거해야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탐라는 삼성(고, 양, 부)의 연합 정권으로 출발했고, 이후 고씨의 세력이 강성하여 성주를 세습하게 되었습니다. 양씨와 부씨는 왕자로 격하되었지요. 이제는 그것마저 빼앗아 세습 후계자에게 왕자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하니 어떤 일을 계획하든 남은 자들의 반발은 예상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대국이 소국을 핍박하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지요. 우리의 힘이 강하니 군말 없이 따르라……?”
곽여는 여운을 남겼다. 그 사이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는데 소식을 듣고 부씨와 양씨 일족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나를 발견하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 양산숙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반가운 기색들이 역력했는데 부곡이 이끌고 온 추자도 해적이 이들과 친인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성주에게 대항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벌어졌고, 탐라와 추자도로 갈라섰었지만, 핏줄은 진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강제로 복속시킨 이들이 성주의 불리함을 보고도 목숨을 걸고 나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숫자로도 역전된 셈입니다. 성주의 논리라면 이미 우리의 힘에 미치지 못하니 항복만 남은 셈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송이 원군을 파견한다면 다시 역전되겠지.”
“얼마나 많이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두 배가 넘는 오천? 오천을 실어나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가 필요하고, 명분을 만들어야 하는지 잘 아실 분이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의외입니다. 더구나 이번 일은 탐라가 고려의 번국임을 잘 알면서도 송의 대관과 성주, 일부 전라 귀족의 욕심이 합쳐진 결과이니 이 사실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면 당분간 자중할 수밖에 없지요. 그 사이 조정의 압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최악은 고려 수군이 상륙하여 탐라 백성을 뭍으로 소개(疏開)하고, 전라, 경상 일대의 유민들을 탐라 개척에 투입시킨다면 나라만 빼앗긴 채, 잡척으로 격하되는 것이니 그것을 원하십니까?”
곽여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고유와 고당유는 진저리를 쳤다.
“너희는 항상 그런 식이지!”
또 한 사람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성 밖을 빠져나왔다. 아까 백휘직을 죽였을 때, 가장 괄괄하게 반응한 이였다.
“상장군을 거침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양도 수군이 제압되었다는 뜻이렷다! 도성 방위를 중히 여기는 남경의 수군이 이곳까지 내려올 일은 없으니 응당 합포 수군과 손을 잡았겠지. 애초에 우리가 탐라를 원했던 것은 합포 수군의 위세가 너무나 커서 균형을 맞추려 했던 것인데 오히려 범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너희다! 아니지, 너희 자체가 범이니 내가 여기서 떠든들 무엇하겠는가!”
삼십 중반의 문사는 워낙 흥분했는지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쉽게 지나갈 성질이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이 문제가 귀화인들이 송과 손을 잡고 탐라를 고려와 별개의 이익 창출구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곽여는 동시대의 인물답게 그들의 그런 고민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외친 낭랑한 어투에는 탄식이 담겨 있었다.
“아직도 훈요 팔조(訓要 八條)의 진의를 곡해하고 있는가?”
나로서는 훈요 팔조가 이 자리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훈요 팔조의 내용은 이러하다.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아래 지역의 산과 강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아래 지역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가나 왕의 친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어지럽게 하거나, 백제 멸망의 원한을 품고서 임금을 해치거나 난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이 문구는 해석하기에 따라 큰 논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에 이르는 옛 백제 영역 인사들의 등용을 금지하라는 해석은 주로 조선 시대에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전주 이씨인 이성계가 고려를 칠 수밖에 없었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호남 출신 차별론을 내세운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서적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택리지(擇里志) 등이 있다.
“여진 해적이나 왜구들로부터 경상 지역을 지키려 했다면 경주 수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개국 초기, 일찍부터 합포 수군을 배속시켜 전라를 경계했다. 그것을 모르는 자가 귀족 중에 누가 있던가! 그러면서 우리의 자구책을 배신이라고 말하는 너희야말로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조정에 들어가지 못하니 지방의 권세라도 단단히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긴 세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간신히 조정에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뿌리마저 뽑을 작정이로구나!”
만약 갑과 을을 정의할 수 있다면 정작 갑은 너희가 아니냐고 중년인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생각해보면 귀화 가문들이라고는 하나 백 년 이상을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고려인이 다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현종 2년(1011년)에 요나라의 침입으로 도성이 불타올랐다. 그때,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임금의 실록과 기록이 함께 불타올랐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나라가 간신히 안정을 되찾자 일곱 임금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는 작업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완성하는데 무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는 다시 없어야 할 슬픔이다. 그래서 충주와 창선에 사고가 만들어졌고, 각각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겨 엄중히 보관하도록 명이 내려졌다. 훈요 십조는 그 와중에 새롭게 발견된 사료였다. 즉, 전 실록에는 훈요 십조의 내용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 그것을 발견한 자는 최제안으로 그는 실록 편찬의 중요 저자였다. 그는 최항이 남긴 자료를 검토하던 중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표제가 신서(信書)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신서란 제목만 놓고 보자면 말 그대로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사적인 부탁이 아니겠는가? 임금과 측근에게만 전해진 비전(秘典)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대들은 실록 편찬에 참여한 신하들이 대부분 신라 구신(舊臣)의 후예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의심했고 그 의심이 다시 신라 구신 계열을 자극하여 서로 물고 물리기를 거듭했다. 태조가 어찌 이 나라를 건국했는지 생각해보라. 도선국사와 태사 최지몽은 영암 출신이었고, 태조의 비(妃)이자 혜종(惠宗, 2대)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 출신이었다.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훈요 십조를 직접 받았다는 박술희도 당진 출신이었다. 공주(충청도의 옛 백제지역)와 전라 사람을 피하라고 유언하면서 굳이 그를 불렀을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현종께서 요의 침입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한 장소로 전주와 나주를 선택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그대들은 온갖 박해를 겪고, 갖은 노력 끝에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 몸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면서 곽여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출신이 어디인지 아는가? 청주다. 태조께서 전라보다 청주에서 더 심한 저항을 겪으셨던 것을 그대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태조께서는 자신을 어렵게 만든 청주 호족들을 더 심하게 벌하셨으면 벌했지 같은 시기 전라와 공주가 더 심하게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디 말을 해보라. 나는 태조의 진의를 이렇게 생각한다. 백제인 전부를 차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려를 싫어하고, 원망하여 통합에 방해되는 일부 귀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이다.”
주위는 잠잠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본 곽여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신라계 귀족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대체할만한 지식인이 없어 태조께서는 그들을 총애할 수밖에 없었지.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견훤이 경주를 공격한 사실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원한이 중첩되고, 새로운 원한이 싹트고……. 참으로 어렵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대로 과거에 머무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것이고, 고려는 내부에서부터 썩어 언제고 망국의 길을 걸을 것이 뻔하다. 그러기를 바라는가?”
“그래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피해자다! 피해자란 말이다!”
훈요 십조에 가로막혀 정계 진출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고려사에서는 충청과 전라 인사가 상당 부분 보인다. 그럼에도, 억울하다는 감정이 드는 것은 알게 모르게 신라계에 밀려 차별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으로 이번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곽여도 이미 말한 바가 있었지만,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엉뚱한 곳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이미 사람이 죽고 죽어 풀기 어려운 원한이 생긴 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고 해도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음이니……. 탐라를 그대들에게 넘긴다면 수용할 텐가?”
곽여의 제안이 의외였는지 중년인이 짐짓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고유가 소리쳤다.
“탐라가 무슨 주머니 속의 물건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럼 아닙니까?”
“뭣이!”
“애초에 이들에게 넘기려고 했던 것, 원하시는 데로 넘겨 준다고 했을 뿐인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내놓는 것과 남이 강제해서 내놓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고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