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17) 남도풍운 =========================================================================
“미친!”
양지는 더 참을 수 없는지 성문 아래로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렸는데 손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대도가 들려 있었다. 제법 잘 벼려졌는지 햇빛이 비치자 도광이 번쩍할 정도였다. 내가 사라진 후, 자신이 진 이유가 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멱을 딸 것이다.”
대도를 풍차처럼 돌리며 나에게 접근했다. 홀로 나온 것이 가상해서라도 나 역시 한 발 내디뎠다. 뒤에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보지 않아도 김리일 것이다. 그는 몇 차례 공방을 구경하면서 이제는 내가 나설 때면 가장 앞에 서서 지켜보는 이가 되었다.
퍽!
다시 하나의 수급이 허공에 떠올랐다.
양도 수군을 이끄는 상장군 백휘직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마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는지 의아한 표정, 그 자체였다.
“네 이놈!,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백씨 일족으로 보이는 중년의 문사가 성벽 위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반응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송군과 탐라군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들은 기가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일전에 나의 힘을 한 번 겪은 후에 무자비함까지 겪게 되니 인상들은 하나같이 죽을상이었다.
나는 백휘직을 베었던 칼을 바닥에 꽂고 맨손으로 나섰다. 양지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곧 단숨에 끝내겠다는 듯 빠르게 다가왔다.
마치 망나니가 수형자의 목을 베듯 허공을 붕붕 돌던 대도는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나는 머리를 숙여 대도를 피한 후, 진각을 내딛고 주먹을 비틀며 양지의 복부를 강하게 타격했다.
양지는 몇 걸음이나 뒤로 구른 다음에야 무릎 꿇은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제야 복부의 고통이 밀려드는지 신물과 함께 트림이 흘러나왔다.
“쿨럭!”
양지가 일 합 만에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자 양군의 희비는 엇갈렸다.
양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대도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저번에 이어 계속된 망신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양지를 향해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기회?”
“네놈이 살아남을 기회 말이다.”
“대송(大宋)의 군관이 하잘 것 없는 고려인에게 항복하란 말인가?”
“그런 알량한 자존심 따윈 요나라에나 세워보지 그랬나? 요나라에 굽실거리는 것은 괜찮고, 고려는 하찮다는 것인가?”
서하와 요나라에게 평화를 구걸하면서 고려에게는 유독 자존심을 세우는 이유는 고려가 송을 요와 같이 사대(事大)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사대는 조선과 명, 또는 청과의 사대와는 다른 실리적인 이유가 앞섰다. 송의 현신들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았고, 요를 대적하는 데 함께 힘을 보태는 동반자임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간신들이 득세하면서 그러한 경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순망치한의 이치를 까맣게 잊고, 대국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가 금의 사대 요구를 재빨리 받아들였던 것은 그러한 송의 인식에 일침을 놓는 효과도 있었다.
나는 성벽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똑똑히 들으라! 그대들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에 불과하다! 예기에 이르길 난세지음원이노(亂世之音怨以怒)라고 했다. 난세의 음악은 원망하며 분노한다는 뜻이다. 관인의 자세는 무엇인가? 백성의 원망을 만드는 자인가? 어루만져 주는 자인가? 입신(立身)에만 눈이 어두워 천하지의(天下之義)를 버렸으니 이는 간신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간신이라고!”
양지는 울컥했다. 간신이라는 말을 들으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부정과 비판의식을 접고, 주류 사회로의 갈망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조기도 하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라는 생각,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옳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利)가 의(義)를 앞서는 순간, 허위와 부조리에 관대해지고, 옳은 가치 판단의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변명을 대며 말이다.
그럴수록 정직한 인재들은 세태(世態)의 무상함에 절망하고, 그들과 똑같이 변질하거나 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버리고 만다. 그것은 곧 사회규범의 혼란과도 이어지고, 한 국가의 패망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역사를 바꾼 지도자들은 그러한 절망에서 교훈을 얻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기꺼이 서기로 했다.
중원으로 한정하자면 과거 한나라 말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지금의 송이었다. 십상시의 득세로 촉발된 난세와 채경, 동관, 고구. 삼대 간신의 득세로 시작된 거듭된 농민 반란은 그 차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내 엄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단순히 간신 같은 단어에 반응했지만, 문에도 조예가 제법 있던 주동 같은 자는 달랐던 모양이다.
“건곤일초정이라…….”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건곤일초정은 시성, 두보(杜甫)가 쓴 ‘모춘제양 서신임초옥(暮春題? 西新賃草屋, 늦봄에 양서에 새로 초가집을 빌려 읊다.)’이란 시의 한 구절이었다.
내가 그 구절을 언급한 것은 조선 시대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의 일화가 지금 상황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북경을 다녀오고 난 다음 집 근처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건곤일초정이라고 붙였다.
건곤일초정의 뜻이 하늘과 땅 사이 한 채의 초가 정자라는 뜻이니 운치 있는 이름이라고 여겼을 법도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홍대용은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의미로 썼다.
북경에서 세계적 수준의 과학, 수학 등의 학문을 체험했던 홍대용으로서는 유교적 가치에 얽매어 세상으로 빗장을 열지 않는 조선에 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었다.
“황제는 간신들에 둘러싸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간신들은 도량이 좁아 어진 사람을 미워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을 시기한다. 그것이 기존의 질서라면 나는 능히 그 질서를 깨겠다. 그대들이 지닌 출중한 무예를 간신들의 손발로 쓸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나를 따라 큰 도적이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각기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를 가슴에 품고 있는데도 이들이 옳지 않은 명령을 따르는 이유. 그것은 수호전에서 임충이 이미 보여준 바가 있다.
임충은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소설 상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일반적인 관료의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아내가 희롱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고구가 자신보다 상관이라는 이유로 분노를 억누르거나, 음모에 빠져 유배형에 처했음에도 가족들을 위해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 그에게 있어 기존 주류 사회에서의 이탈은 곧 하층민으로 강등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박이 거듭되고 돌아갈 길이 완전히 끊겼을 때, 폭발한 분노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양산박으로 향하게 되는데 양산박에서도 그러한 일은 반복된다.
양산박 두령 왕륜은 능력도 심성도 별 볼 일 없는 자로 유능한 인재의 출현을 항시 두려워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임충 일행을 경계했다.
양산박에서마저 주류 편입을 거부당한 임충은 참지 못하고 왕륜을 척살한다. ‘심흉협애 질현투능(心胸狹隘 嫉賢妬能, 마음이 좁아 어진 사람을 질투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시기한다.)’ 그것이 왕륜을 척살하는 명분으로 세웠던 글귀였고, 그 글귀로 말미암아 단순한 도적떼였던 양산박은 부조리한 간신들을 상대하는 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양산박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응어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주류에서 배척당하여 가진 재능을 범죄에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된 분노의 표출일 것이다. 소설에서 이들의 분노 표출을 통해 부조리한 위정자들에게 경고를 보내고자 했던 것은 수호전을 구전한 민중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수호전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이 임충의 역할을 내가 맡는 것이었다. 무예가 뛰어나지만, 누명을 쓰고 도망친 관군 장수라면 나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술렁이는 그들에게 다시 소리쳤다.
“여혜경과 백휘직이 죽었다. 죽도록 방관한 그대들의 앞날 역시 끝장났다는 말이지. 그나마 이뤘던 공적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오히려 무능력자로 찍혀 평생 변방을 전전하거나 요나 서하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것을 원하는가!”
이것이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고려인인 내가 대의니 신념이니, 아무리 떠들어보아도 저들 처지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지금 시기는 같은 중원인으로서 대화할 수 있었던 한나라 말기와는 처지가 판이하였다.
그렇다면 같은 꿈을 꾸는 동료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수호전의 방식이 해답이 될 것이다. 그들의 난처한 사정을 십분 활용해 일단 동료로 끌어들인 후 앞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송군의 표정이 다들 어두워졌다.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다.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던 탐라행이었을 것이다. 그런 탐라행에서 하나의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수뇌진들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상황, 과연 채경이나 동관이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제 그만하시지요.”
양지 뒤에서 소년이 나타났다. 내가 이미 한 차례 본 얼굴이었다. 이름이 고당유라고 했던가? 탐라성주 고유의 아들이자 차기 후계자였다.
성안은 웅성거렸다. 차기 후계자가 소리 없이 홀로 성문을 빠져나갈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질책이 성안에서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탐라성주 본인인 것 같았는데 전쟁의 여파에 휩쓸릴 것을 염려하여 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장군의 용맹함은 놀라움을 넘어 절로 경외를 일으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장군의 뜻대로 되었으니 자비를 베푸심이 어떨는지요.”
“자비라니!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양지가 소리쳤지만 처음 기세와는 다르게 어딘지 의기소침한 면모를 보였다. 내가 한 엄포가 그들에게 먹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엄포가 아니라 송으로 돌아간 그들의 미래는 뻔한 것이었다.
고당유는 그런 가운데서도 태연하게 자신의 할말을 이어나갔다.
“장군은 탐라의 유래를 아시나이까?”
탐라의 뿌리가 삼성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고당유의 설명은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탐라는 처음부터 탐라란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뭍에서 보자면 우리는 도이(島夷)에 불과했지요. 시조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 선조에 이르러 당시 강국(强國), 신라에 입조(入朝)하려 했는데, 뭍에 도착하여 닻을 내린 곳이 탐진(眈津, 전남 강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발걸음을 재촉해 경주에 닿았습니다. 신라의 임금은 선조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하길 ‘얼마 전 객성(客星, 별성마마)이 남쪽에서 빛나는 것을 보고, 귀한 손님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았다.’라며 융숭한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임금은 탐진의 탐과 신라의 라를 합쳐 우리가 사는 섬을 탐라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고, 그 제의를 받아들여 탐라국이란 명칭이 생겼습니다.”
객성은 흔히들 별성마마 또는 호구별성을 일컫는 말로 천연두를 옮기는 신을 가리킨다. 즉, 객성을 보았다는 의미와 극진한 대접은 마치 별성마마를 앞에 대하는 듯 후환이 두려워 조심조심 좋도록 하여 돌려보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전까지 백제에 복속되어 있다가 신라로 방향을 튼 탐라의 입장을 신라가 배려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객성이 먼저 손님의 방문을 귀띔해줬다고 하여 고후 선조에게 다시 제의하길 탐라를 다스리는 자의 명칭을 객성의 성(星)을 따서 성주(星主)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삼성혈의 주인은 고씨뿐만 아니라 양씨와 부씨도 있으니, 이들에게는 왕자(王子)라는 칭호를 내려 합심하여 탐라를 다스리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리하여 태조(왕건) 때까지 그 전통은 이어져 왔습니다.”
총명하게 생긴 이 소년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 깨달았다.
왕자의 자리가 고씨에 의해 대물림되기 시작한 이유, 오늘과 같은 일을 꾸민 까닭, 그것은 신라가 융숭한 대접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비교되는 현실을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고려 초기까지 자신들을 대하던 대접과도 다르다고 언급하며 현재 야박한 상황이 지금에 이른 이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아비는 탐라 출신으로는 첫 번째로 고려 조정에 출사한 인재였으나, 탐라를 우습게 보는 주류 관료들에 의해 출세가 가로막혔고 좌절과 분노를 안고 탐라로 돌아왔다.
그때, 내 뒤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태조께서 탐라의 조회를 받으시매, 성주는 고자견(高自堅)이요,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라 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약속했는데, 태조께서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접대하는 범절(凡節)을 일국의 임금에 따르도록 하였고, 푸짐한 진상을 내렸다. 그대의 아비, 고유는 처음 빈공(賓貢)에 합격하여 정종(靖宗) 을유년(1045년), 남성시(南省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병술년(1046년)에 지공거 최융(崔融)의 방(?, 최종합격자)에 세 번째로 이름이 적혔다. 뛰어난 재능으로 벼슬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으나 탐라 출신이라 하여 중서문하성에서는 배척을 일삼았다. 그러기를 10년, 그대 아비가 괄시에 지쳐 낙향을 결심했을 때, 문종께서 그제야 그대 아비의 재주를 알아보시고 국자시를 주관토록 하는 명예를 내리셨다. 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것으로 마음이 풀렸으리라 믿었다. 아마도 그대 아비의 한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나…….”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곽여였다. 그는 언제나 제갈량의 복장을 선호했고, 오늘 역시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선풍도골의 용모에 탄성을 터트리는 이도 있었다.
“분명히 그대의 아비에게 한을 심어준 자들이 고려에 존재한다. 그것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대의 아비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년, 고당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곽여의 말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곽여는 고당유의 시선을 넘어 성문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탐라성주 고유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았다.
“살면서 뜻이 맞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지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뜻이 통하는 자들 역시 존재하지. 어째서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는가? 고유는 분명히 재주 많은 인재였다. 그러나 탐라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홀로 동분서주한 탓에 정작 그에게 손을 내밀던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문하시중 최제안(崔齊顔, 최승로의 손자)이 있었고, 비서소감(秘書少監) 이인정(李仁挺)이 있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자 했지만, 그대의 아비는 자존심을 내세워 외면했지. 아까운 인재를 잃겠다고 생각한 최제안이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유언으로 그대 아비를 언급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문종께서 그대 아비를 다시 주목할 까닭이 있었겠는가? 고려가 탐라에 잘못한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대의 아비는 수단을 잘못 선택했다. 협잡꾼들에게 놀아난 그대의 아비에게 탐라의 이름을 지키려는 고고한 옛 자존심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묻겠노라!”
곽여의 외침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소년, 고당유는 그 사이 머리에 맴도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정적을 깨트리려 했다. 그때, 고당유의 뒤쪽 저만치, 성문에서 늙수그레한 자가 발걸음을 이리로 옮겼다. 탐라성주 고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