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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28화 (128/257)

00128  (17) 남도풍운  =========================================================================

“당신들의 실수는…….”

흔들리는 검 끝으로 더욱 얼굴을 가져가는 곽여였다. 그런 곽여의 행동에 놀라 여혜경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단할 수도 있지. 그러나 힘이란 것은……. 권력이란 것은!”

찌를 테면 찔러 보라는 듯이 한 걸음을 내딛자 여혜경은 두 걸음을 물러났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마구잡이로 검까지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량하기까지 했다.

“상대적이라는 것이지.”

“단단히 미쳤구나! 동궁의 총애를 믿고 설치는 것인가!”

더 참을 수 없는지 여선재는 분노를 폭발했다.

“동궁의 총애? 제자가 스승을 경외하는 것은 고려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긴 족보도 없는 환관이 날뛰고 있는 송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뭣이!”

여선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로서도 생경한 장면이었다. 청수한 도인으로 여겼던 곽여에게 독설가의 면모가 있을 줄 말이다. 곽여의 공박(攻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 누군가는 목적을 이루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막고 싶어하지. 전쟁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략이 필요하고 책사들은 그중 으뜸을 ‘정공법’이라 칭했다. 정공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유리하면 정석적인 진군과 포진이 가장 유리하다는 뜻이지. 그건 정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곽여가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어쩌면 초나라 시절의 경험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으악!”

두 차례의 비명이 터졌다. 백휘직과 홍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발목을 힘껏 밟았다. 발이 완전히 돌아간 모습에 지켜보던 여선재와 그 일행들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마치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라고 되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하동현령 신안지는 관인들이 흔히 차고 다니는 패도(佩刀)를 뽑았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족히 일백 명은 넘어 보이는 장정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곽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군. 정쟁에서 암투를 벌이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지. 만약 상대방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정면 승부를 펼친다면 그건 오직 하나다.”

뒷짐을 쥔 곽여의 표정은 오연했다.

“확실히 이긴다는 자신감이다. 그래서 자네들이 움직인 것이 아닌가? 명분이야 승자 쪽에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 쪽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지.”

신호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이 뛰어들어야 할 때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다리를 부러트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선재 등을 수행하는 사병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 주변으로는 더 많은 수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거만하게 나왔던 것은 권위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가 타협할 수 없는 야만적인 무력에 압도당하는 순간, 아무런 타개책이 없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곽여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떠올렸을 것이다.

얼떨결에 몇 명의 사병이 길을 가로막았지만, 식전 운동거리도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손짓 발짓이 오고 갔고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날아갔다.

“한 놈…….”

선두에 섰던 여선재의 멱살을 움켜쥐고 일부러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리 장사라도 멱살잡이로 성인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네놈은……. 네놈은 대체 누구냐! 천한 것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호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양새였으니 자신의 처지를 잊고 헛소리를 남발할 만했다. 나는 대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발목을 으스러트렸다.

귀하게만 자라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마치 업화(業火)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눈물과 콧물이 흙범벅이 된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예전의 나라면 이들을 어찌했을까? 순리에 따라야 한다며 법대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을 영유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세상에는 법으로 계도(啓導)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권위를 이용해 법을 갑옷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사실 그런 행위의 잘잘못을 같은 인간으로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모순인 것을 알지만, 누군가는 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여야 하는가? 최소한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나를 가로막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멱살을 잡힌 진주 기관, 노책은 괴물 같은 내 모습에 눈물을 쏙 빼며 자진해서 포승을 받을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주위로는 오십이 넘는 사병들이 저마다 쓰라린 부위를 어루만지며 신음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책의 발목을 으스러트리고 곽여를 돌아보자, 곽여는 그저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강보를 툭 치며 말했다.

“뭐하십니까? 죄인들을 투옥하십시오.”

“대체 저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리면 좋을 것이 없단 말일세!”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지 강보는 곽여의 가벼운 행동을 질타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가벼이 움직였다고 생각했으면 예부시랑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셨겠지요. 저를 믿으신다면 이들을 하옥하고,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양도 수군을 도닥거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강보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내가 일을 저지른 이상 외통수였다. 구 기관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강보는 회담이 길어질 것 같다는 구실을 내세워 100여 척의 양도 수군이 요동칠 가능성을 잠재웠다. 의심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강보의 이름이 워낙 무거워 일단 밤을 새워 기다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리가 된 다음에야 곽여는 내 정체를 강보에게 말했다. 뒤이어 탐라에서 있었던 이야기까지 모두 끝나자 강보는 한숨을 쉬었다.

“고려는 탐라를 차별해왔다. 뭍으로 오르는 것조차도 꺼렸지. 내가 가진 권한으로 그들을 포용하려 했으나 그들이 품고 있는 억울함의 만분지 일이나 희석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고름이 터지리라 생각했지만 이리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참으로 개탄스럽구나.”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강보는 괴로워했다. 그런 강보를 구 기관이 위로했고, 유재가 달랬다.

“전하의 혜안으로 척 장군이 탐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욕심에 먹힌 원한을 풀고 탐라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탐라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 탐라를 고려로 귀속시키자는 말이오?”

“송이 화석강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탐라 역시 횡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왜나 송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도록 탐라를 고려가 품자는 것이지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탐라를 긍휼히 여긴 예빈경과 척 장군이 힘을 합친다면 저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전하의 비공식 재가(裁可)도 떨어진 마당에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맺힌 원한이 그리 쉽게 풀릴지는 모르겠으나…….”

강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안은 정광이 가득했다.

“선조께서는 고려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셨소.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따진다면 어찌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소?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구하겠소.”

“예빈경의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결의를 다지는 인사가 오고 갔다.

“잡아둔 자들의 처리가 시급합니다.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명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명분을 만든다고 해도 반발은 매우 극심할 것입니다.”

“반발? 그따위 반발쯤은 진주 강가가 다 막아내겠소. 아니 밀양 박가와 경주 김가도 설득할 수 있소. 나와는 사돈 집안이지. 안동부와 상주부의 수령 역시 내 말 한마디면 달려올 것이오. 귀화 귀족들의 위세가 얼마나 강한지 해봅시다.”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강보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밀약 박가과 경주 김가 거기에 진주 강가의 힘이면 경상도의 힘이 거의 결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안동부와 상주부는 경주, 진주와 함께 경상 지역의 핵심으로 지금쯤이면 김부식의 형제들이 수령을 맡고 있을 시기다.

“예빈경께서 그런 결심이라면 이미 우리가 이긴 싸움입니다. 내일 해가 뜨는 데로 양도 수군의 군관들을 한배로 집합시키고 모두 제압한다면 병사들은 순순히 손을 들 것입니다. 배들을 포구에 전부 계류(繫留)하는데 성공한다면 척 장군과 합포 수군을 탐라로 출진시킵니다.”

“그러나 스승님.”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김리가 끼어들었다.

“고려 귀족들이야 위세로 찍어 누른다고 하더라도 송의 관리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남지 않습니까? 관리를 파견한 막후실력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맡겠습니다.”

내가 담담히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대체 무슨 수로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지 그 방법이 궁금했을 것이다.

“탐라가 안정돼도 저는 여전히 귀양인 입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공적도 아니니 풀어줄 명분도 없습니다. 최소한 몇 년은 그 상태일 것입니다.”

“그 정도는 우리가 힘을 쓰면…….”

예빈경의 말을 무례하지만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힘까지 더해지고 이자겸이 약간의 손을 더한다면 숙종이나 동궁, 윤관이 무리하지 않더라도 나를 구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번 일이 오히려 더 좋은 기회였다. 최소한 고려 땅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조건이니 말이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참지정사께 미리 말씀을 드리고, 송으로 건너갈까 합니다.”

“송으로? 설마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유재는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미친 짓일세. 혹여 자네의 행적이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단순한 외교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닐세. 국교 단절은 물론이고 전쟁까지도 생각해야 한단 말일세.”

“그럼 하지 않겠습니다.”

선선히 포기하자 고집부릴 것으로 알았던 유재는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황제와 측근들의 황음(荒淫)으로 송은 쇠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망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고려에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자신감을 얻어오고 싶습니다.”

“자신감이라니? 무예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비무행이라도 벌이겠다는 것인가?”

“맞습니다. 제 이름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증명하고 싶습니다. 중원이 항상 최고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행로 속에서 때때로 의적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의적? 아아!”

곽여의 눈빛이 반짝였다.

“화석강이라도 털겠다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곽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화석강은 황궁으로 가는 것입니다. 화석강 탈취는 곧 역모지요. 막후를 흔들어 그가 고려에 신경을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 아니겠습니까?”

“막후의 암살도 아니고, 화석강의 탈취도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송이 고려로 관심을 돌리는 것을 막겠단 말인가? 답답하니 속 시원하게 말해주게.”

답답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강보가 그들을 대신해 물었다.

“생신강(生辰綱)을 탈취할 것입니다.”

“생신강?”

생소한 단어에 어리둥절하다가 화석강과 의미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는지 점차 내가 생각한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김리는 정답을 알아서 흥분된 것인지 아니면 그 방법 자체가 흥분된 것인지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권력자의 생일 때 진상되는 물품을 털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수호전에서 조개, 오용, 공손승, 완씨 삼형제가 처음 등장했던 때를 떠올렸다. 간신 채경에게로 가는 생신강 탈취를 모의하면서부터가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제가 표적이 되겠습니다. 고려의 일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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